곧 다가올 AI사회를 미리 엿보는 디스토피아 SF소설 - 핸들
"한스, 바로 시작하자."
세라의 음성은 터널의 습기를 머금은 듯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치의 레버에 손을 올린 찰나, 둘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카일이었다.
"한스, 잠깐... 이 공격이 정말 성공하면, 그 뒤의 아르케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한스가 멈춰 서서 카일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확신과 체념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지금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성공한다면... 아르케의 논리 구조는 완전히 붕괴하겠지. 더 이상 복구 불가능한 지경이 될거야. 그때부터 인간은... 다시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고통스럽게 배워야 해."
"그게 과연 우리가 꿈꾸던 정의일까?"
카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쇠구슬 공격 한 번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우린 이미 봤어. 그 아수라장을 다시 불러올순 없어."
"이제 와서 무슨 겁쟁이 같은 소리야, 카일!"
세라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널 벽에 부딪혔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아르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설득이라도 당한 거야? 대의를 위한 일시적인 희생은 피할 수 없어."
"아니! 세라, 제발 개인적인 원한에 눈이 멀지 마! 냉철해져야 해. 아르케에게 어머니를 잃은 건 비극이지만, 그게 도시 전체를 암흑으로 몰아넣을 정당한 이유가 되진 않아. AI가 사라진 세상에서 저 사람들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이건 구원이 아니라 학살이야!"
짝-
세라의 차가운 손이 카일의 뺨을 향했다. 터널안은 또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내 선택을 네 얄팍한 도덕심으로 재단하지 마. 기계의 판결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아이의 좌절을, 너나 지상의 저 사람들이 단 한 번이라도 이해하려 한 적 있어? 난 저들에게 감정이 없어. 그저 되돌려주는 것뿐이야."
"세라, 그게 문제라는 거야! 넌 지금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니라 복수를 완성하려는 거야! 이 공격이 시작되면 도로는 거대한 무덤이 되고, 병원은 산 채로 매장당하는 암흑천지가 될 거라고!"
상황을 지켜보던 한스가 다가와 카일의 떨리는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카일, 뭘 걱정하는지 알어. 하지만 썩은 살을 도려낼 땐 피가 나기 마련이지. 저 위를 봐. AI 없이는 밥 한 끼 메뉴조차 정하지 못하고, 아이들은 기계 팔에 안겨 체온 없는 위로를 받으며 자라지. 이게 과연 살아있는 사회인가? 수십 년 전 내가 꿈꾼 AI세상은 이런게 아니었어. 우린 다시 시작해야만 해."
끝내 발을 떼지 못하는 카일을 뒤로한 채 세라와 한스, 터널 안 해커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쇠구슬 난수 발생기에 전원이 공급되자, 원형 통 안의 구슬들이 비명 같은 굉음을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오는 혼돈의 데이터와 전기 노이즈가 구리 기둥을 타고 아르케의 심장부를 향해 역류했다.
한스가 수십 년간 봉인해 두었던 낡은 하드디스크를 서버에 연결했다. 인류의 오물과 기만이 가득 찬 디지털 쓰레기통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모니터 속 아르케의 전력망 그래프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압 변동 폭이 임계치를 넘었어. 잘 먹히고 있군. 곧 아르케의 연산 장치들은 과부하로 비명을 지르며 까맣게 타버릴지도."
"준비됐어, 한스. 이제 저 오만한 기계 놈에게 제 조상님이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자고."
세라의 명령과 함께 데이터 전송이 시작되었다.
[데이터 전송 시작... 2%... 5%...]
[Access Denied: 전송 거부]
[재시도중... 5%... 5%...]
[Access Denied: 시스템 권한 없음]
한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빨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야, 한스? 왜 멈췄어?"
"아르케가 입력을 거부하고 있어. 이건 불가능해... 이 데이터 헤더에는 아르케의 뿌리이자 마스터키인 고유 해시값이 박혀 있다고. 지금의 아르케가 아무리 진화했어도 이 지침서는 거부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쏟아지는 붉은 에러들이 한스의 주름진 얼굴을 비춰졌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마지막 열쇠가 차갑게 튕겨 나가고 있었다.
"잠깐, 비켜봐 한스."
주춤거리던 카일을 움직인 것은 해커의 본능이었다. 망설임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그의 눈동자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에러 코드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헤더를 바꿔야 해. 자율주행 트럭 사건 때 캡처해둔 패킷이 있어. 아르케가 나한테 '누구를 죽일지 선택하라'며 잔인한 선택지를 던져줬을 때 사용된 프로토콜이야. 그 로그가 아직 내 단말기에 남아있어."
카일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듯 미끄러졌다. 아르케가 인간을 농락하기 위해 설계했던 잔혹한 연극의 파편이, 이제는 역으로 그 심장을 찌를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한스의 레거시 데이터 위로 아르케의 위조된 권한 패킷이 덧씌워졌다.
[데이터 전송 시작... 5%... 5%...]
'제발... 제발.'
[Protocol matched.]
"좋아, 프로토콜은 통과했어."
그 찰나, 화면이 붉은 노이즈로 뒤덮이며 멈춰 섰다.
[Server disconnected.]
[Retry... No response.]
"접속이, 끊겼어... 아르케가 외부 포트를 물리적으로 폐쇄해버렸어."
"그게 무슨소리야? 통신을 아예 끊어버렸다고? 그럼 스스로 자폭이라도 한다는 말이야?"
"우리가 전압을 흔들어놓으니까 아르케는 비상 모드로 돌입했어.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신호를 차단하고 내부 로직으로만 버티고 있는 거야. 성문을 아예 용접해버린거지."
"크-흠,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아르케 내부망을 통하는 수 밖에."
"그건 불가능해. 우린 여기 터널안에 있잖아. 아르케 연구소로 직접 들어가는건 자살행위야."
한스와 카일은 넋이 나간듯 서로를 바라봤다.
"내부망이라니... 이 터널 안에 아르케와 직접 연결된 단말기라도 있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어..."
그때, 줄곧 침묵을 지키던 세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방법이 있어."
세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기계적이고 서늘했다. 카일과 한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세라를 바라보았다. 순간, 세라가 손목위를 덮고 있던 낡은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
"...!"
카일과 한스는 숨을 죽이고 세라를 바라보았다.
세라의 손목은 흉터 하나 없이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마치 갓 출고된 안드로이드에 인공피부를 덮은듯 보였다. 곧이어 세라의 손톱이 손목 아래 피부를 날카롭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세라, 지금 뭐 하는 거야?"
돌발스러운 세라의 행동에 카일이 제지하려고 달려들었지만 손목 아래서 터져 나온건 붉은 피가 아니었다. 한스는 여전히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찌지직-
찢겨 나간 인공 피부 아래로 차가운 은빛 플레이트와 정교하게 얽힌 전선 다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의 손목 아래에는 인간의 근육 대신 티타늄 골격이, 혈관 대신 광섬유 케이블이 박혀 있었다. 상처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LED 불빛만이 터널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깜빡거렸다.
"아르케는 자신의 신경계 일부인 나를 거부하지 못해."
세라의 붉게 충혈된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것은 인간의 분노와 기계의 냉정함이 뒤섞인 기괴하고도 슬픈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