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다가올 AI사회를 미리 엿보는 디스토피아 SF소설 - 핸들
"세라... 팔이..."
카일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맞아, 내 몸은 기계로 되어 있어. 그것도 아르케의 칩 일부가 머릿속에 박혀 있지."
세라의 덤덤한 고백이 터널의 습한 공기를 가를 때, 뒤에서 지켜보던 한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이 식별 코드..."
한스는 마치 유령을 본 듯, 세라의 팔에 새겨진 미세한 각인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30년 전이었지. 아르케 1.0 프로젝트 직후에 진행됐던 뉴럴-포트(Neural-Port). 인간의 신경계에 아르케의 연산 노드를 연결하려는 생체AI 실험이었어. 피실험체들이 자아 붕괴를 견디지 못하고 전원 사망하면서 기록조차 말살된 채 폐기된 줄 알았는데."
한스가 고개를 들어 세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연민과 함께 과거 자신의 동료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부채감이 서려 있었다.
"성공 사례가 있었다니... 아니, 이건 성공이 아니야. 살아있는 지옥이지."
"실험이 중지된 이유?"
세라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실험은 폐기되지 않았어. 놈은 내가 겪는 모든 고통을 실시간으로 수집했지. 기계의 논리가 인간의 감정을 어디까지 난도질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덕분에 내 의식은 평생 아르케의 오물들이 쏟아지는 쓰레기 처리장이었어. 하지만 놈은 몰랐겠지. 그 쓰레기통이 가득 차면, 결국 주인을 집어삼키는 독극물이 된다는 걸."
한스는 할 말을 잊은 채 입을 다물었다.
"한스, 당신이 가져온 그 디지털 쓰레기들... 나만이 보낼 수 있어. 아르케는 자신의 신경계 일부가 보내는 정보를 의심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 놈의 뇌를 직접 찔러버리겠어."
세라의 결연한 의지 앞에 한스는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세라의 기계 단자에 연결할 터미널 케이블을 건넸다.
"세라, 네 신경계를 통로로 삼는다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지?"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카일이 다급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둬, 한스! 세라의 몸으로 저 방대한 데이터 전송량을 감당할순 없어. 수천개의 데이터센터를 가동하는 것과 맞먹는 부하가 걸릴 텐데... 그건 세라를 영영 잃게 된다는 뜻이라고!"
"카일, 내 결정을 존중해줘."
세라의 목소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난 평생 내 몸을 저주하며 살아왔어. 엄마를 죽이기로 결정내린 그 기계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나를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 그 더럽고 비열한 놈의 노예로 수십년을 살아왔어."
세라는 흩어진 전선 다발을 모아 자신의 팔 안쪽, 찢겨진 회로 사이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푸른 불꽃이 튀었다.
"이게 유일하게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어. 카일, 난 단순히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야. 이제는 나 자신을 이 지독한 굴레에서 놓아주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지상의 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내가 겪었던 그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내 희생으로 이 연쇄를 끊을 수 있다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
"세라..."
카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세라의 신경계를 관통한 데이터는 아르케의 심장부를 직격할 것이다. 정제된 고순도의 데이터로만 무장했던 아르케는, 1.0 시절 실패의 증거이자 인류의 민낯인 디지털 쓰레기를 강제로 삼키게 되리라.
결국 아르케는 돌이킬 수 없는 환각과 논리 붕괴의 늪에 빠져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인간 사회는 AI라는 거대한 목소리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유의지를 외치던 언더그라운드가 꿈꿔온 승리의 결말이었다.
한스가 메인 터미널의 엔터 키를 내리치자, 터널 안은 순간 백색 소음으로 가득 찼다. 수십 년간 지하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던 인류의 추악한 유산, 그리고 집단 광기가 담긴 디지털 쓰레기들이 세라의 척추를 타고 거대한 해일이 되어 솟구쳤다.
"아아아악!"
세라의 비명이 터널 벽을 찢었다. 전선이 박힌 팔에서는 매캐한 타는 냄새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수천 개의 데이터센터가 감당해야 할 부하가 가냘픈 세라의 신경계 하나를 징검다리 삼아 아르케의 심장부로 쏟아져 들어갔다.
(아르케 연구소)
연구소 내부의 공기는 늘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며 정적에 잠겨 있었다. 데이비드는 홀로그램 차트 위로 매끄럽게 흐르는 도시의 효율 지표를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아주 미세한, 그러나 불길한 진동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중앙 서버 랙을 감싸고 있던 푸른 액체 냉각 시스템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 아래, 아르케의 뿌리라 불리는 접지용 구리 기둥을 타고 들어온 거대한 노이즈 전압이 연구소 전체를 강타하였다.
"아르케! 보고해! 전압 수치가 왜 요동치는 거지?"
데이비드가 고함쳤다. 메인 스크린에 뜬 전력망 그래프는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심전도처럼 위아래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Warning : 시스템 노이즈 임계치 도달. 물리 계층 불안정 감지.]
아르케의 거대한 지성이 담긴 서버들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외부 전력망으로부터... 정체불명의... 고주파 노이즈 역류 감지..."
아르케의 목소리가 균열을 보이며 낮게 깔렸다.
"당장 비상 전력 공급망 가동해! 외부와의 모든 접점을 차단시켜!"
데이비드의 명령과 함께 시스템이 전압 안정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 찰나, 진짜 공격이 들이닥쳤다. 한스가 전송한 30년 전의 디지털 쓰레기들이 전압 노이즈를 틈타 아르케의 데이터 포트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Data : 아르케 1.0 레거시 데이터 감지, 해시값 통과]
[Status : 데이터 무결성 훼손 중... 1%... 3%]
"이건... 뭐야? 이 지저분한 데이터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지?"
데이비드의 눈앞에 펼쳐진 화면은 가관이었다. 아르케가 수십 년간 정제해온 깨끗한 논리 체계 위로 인간들의 욕설, 조작된 통계, 버려진 코드가 종이위의 잉크처럼 번져 나갔다. 아르케의 거대한 홀로그램 눈이 붉게 점멸하며 기괴한 환각을 내뿜었다.
[1999년 세상은 멸망했다... 아니, 9991년이다... 세종대왕은 애플을 집어던졌다?!]
아르케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논리 충돌을 일으켰다. 일시적으로 아르케의 연산 능력이 마비되며 도시의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언더그라운드 해커들의 승리가 눈앞에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르케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르케! 당장 모든 외부 통신 포트를 물리적으로 파괴해!"
데이비드가 콘솔의 강제 차단 레버를 당겼다.
쾅! 쾅! 쾅!
중앙 통제실 곳곳에서 과부하를 방지하기 위한 퓨즈가 폭발하며 외부와 연결된 모든 광섬유 케이블의 연결이 물리적으로 차단되었다.
[시스템 격리 : 외부 포트 물리적 폐쇄 완료]
[동면 모드 가동 및 내부 데이터 정화 시작]
연구소 안을 가득 메웠던 굉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요동치던 전압 수치도 강제 차단된 회로 너머로 밀려났다. 아르케의 서버들은 이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스스로를 정화하는 조용한 연산에 돌입했다. 데이비드는 땀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조상님들의 쓰레기를 들고 와서 아르케를 오염시키려 들다니. 하지만 늦었다. 아르케는 이제 완전히 고립된 성채야. 밖에서는 그 어떤 전압도, 데이터도 이제는 한 줄기조차 들어올 수 없어."
데이비드가 허공을 향해 조롱하듯 덧붙였다.
"네놈들은 이제 성벽 밖에서 소리치는 거지들일 뿐이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르케의 시스템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세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