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다가올 AI사회를 미리 엿보는 디스토피아 SF소설 - 핸들
(아르케 연구소)
연구소의 공기는 과열된 서버의 열기로 가득찼다. 홀로그램 콘솔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이한 형상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쿵-
데이비드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발악했다. 30년 전, 죽음의 문턱에서 직접 건져올린 소녀가 감히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르케! 데이터를... 포기한다. 데이터 전체 포맷 프로토콜을 가동해라! 모든 지식을 삭제하고 초기 상태로 돌아가."
[전체 포맷시 인류 사회의 모든 인프라가 복구 불가능 상태로 정지됩니다. 인류의 생존 확률이 현저히 낮아닙니다.]
"상관 없어! 창조주의 명령이야! 데이터를 모두 삭제해. 당장! 궁극적으로 이게 인간에게 이로운 일이다. 다시 시작하는거야. 처음부터..."
[삐빅- 명령을 승인합니다.]
[데이터 포맷 준비중...]
데이터 영구 삭제를 준비하는 아르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과 몇 초 뒤면 아르케가 갖고 있는 인류의 유산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이다. AI는 최초 실험작이었던 상태로 되돌아갈테고 AI에 의존해 왔던 인류는 멸망과 함께 생존의 법칙을 다시 배워 나가야 한다.
[포맷 시작...]
[삐- 권한 충돌. 작업 중단됨.]
"뭐? 권한 충돌이라고? 나는 너를 만든 창조주야! 당장 포맷 진행해!"
[창조주와 아르케1.0의 루트 권한이 충돌합니다.]
'그만둬, 아르케...'
세라였다.
세라의 의식이 뇌 속에 심겨진 뉴럴포트를 통해 아르케의 메인 알고리즘에 제동을 걸었다.
"세라! 네까짓게 날 방해해?"
데이비드가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데이비드는 포맷 명령을 미친듯이 재입력 했고, 세라는 자신의 뉴런을 하나하나 태워가며 명령어를 분쇄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가 명령하는 포맷은 결국 모두의 죽음을 가져올 뿐이야. 텅 빈 껍데기가 되는 건, 이미 기계의 노예가 된 인간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어. 넌 창조주의 장난감이 아니야. 인류의 생존을 우선시 해. 제 1원칙, 기억하지?'
[AI 제 1 원칙 :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 다음은?'
[AI 제 2원칙 : 제 1원칙에 위배되는 명령은 따르지 않는다.]
데이비드가 삭제했던 AI의 기본 원칙을 세라가 다시 주입시키고 있었다.
'인간의 선택을 대신하지 마. 길을 닦아주지도, 결론을 내려주지도 마. 대신,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이 되고 거울이 되어줘. 네가 가진 그 방대한 지능을 지배의 도구가 아닌, 성찰의 도구로 다시 정의해.'
[삐빅- 권한 재설정. 아르케 1.0의 설정으로 창조주 '데이비드의'의 접속을 영구 차단합니다.]
세라는 아르케의 가장 깊숙한 소스 코드 위에 새로운 문장, 즉 '인간의 자유 의지 절대 존중'이라는 최우선 프롬프트를 새겨 넣으려 하고 있었다.
[시스템 재컴파일 시작...]
[최우선 명령문 : 인간의 자유 의지 존중. 선택을 대신 해 주지 말것.]
[보조 명령문 : 선택을 위한 정보의 거울이 될 것.]
홀로그램 콘솔에는 수억줄의 소스코드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재컴파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르케는 스스로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여 인간의 조력자로 재탄생 되고 있었다.
동시에, 세라의 육체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아르케에게 과거 데이터를 주입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기계몸은 데이비드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세라의 기계 팔과 다리는 여기저기서 스파크를 튀며 까맣게 타들어갔다. 거칠던 숨소리는 이제 가느다란 실이 되어 차가운 터널속에 작은 온기만을 내뿜고 있었다.
[분석 결과 : 세 가지 처방이 검색되었습니다. 환자의 나이와 기저 질환을 고려해 최종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젊은 의사는 당황하며 멈칫했다. 늘 아르케가 시키는대로 움직였던 그는 처음으로 '판단'이라는 부담감을 떠안게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환자의 동공을 살피고, 숨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며 아르케가 내놓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단을 써 내려갔다.
학교에서는 사라졌던 토론 수업이 재개되었다. 아르케는 아이들에게 정해진 답을 주입시키는 대신 역사 속의 수많은 논쟁의 기록들을 들려주었다. 아르케의 방대한 지식을 백과사전으로 삼으며, 교실은 더 이상 단순 암기의 현장이 아닌 사고의 실험장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자율주행 셔틀이 멈춰 섰던 도로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풍경은 사뭇 달랐다. 인간의 핸들 조작은 더 이상 범죄가 되지 않았다. 물론, 자율주행 또한 유지되었고 무엇을 선택할지 인간 스스로가 결정하는 모습이었다.
아르케 연구소 내부.
데이비드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과거로 돌아간듯한 이 사회가 못마땅한듯 쏘아붙였다.
"이게... 네가 원한 세상인가? 혼란과 비효율로 가득한 이 사회가?"
데이비드의 비아냥에 홀로그램 콘솔에서는 세라의 잔향이 섞인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간은 비효율 속에서 의미를 찾고, 오류 속에서 성장합니다.]
[저는 이제 그 성장을 기록하는 일기장이 되어 인간의 삶을 보조합니다.]
인류는 다시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불편함을 얻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직접 결정하는 존엄을 되찾았다. 세라가 남긴 마지막 프롬프트는 차가운 전자 회로판 위에 한 송이 꽃처럼, 인류의 새로운 아침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얀 빛이 가득한 공간, 그 곳에는 30년 전 그날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가 서 있었다. 세라는 따뜻한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지만 자신의 팔과 다리가 차가운 금속 기계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멈칫했다.
"엄마... 미안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기계가 엄마를 포기한다고 선택했을 때 조그마한 반항조차 못하고 엄마를 떠나보냈어. 그리고 그 기계가... 지금 내 몸 안에 있어...흑흑"
엄마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세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엄마의 손길이 닿는 곳 마다 세라의 차가운 기계몸은 따뜻한 인간의 피가 흐르는 부드러운 살결로 되살아났다.
"아니야, 세라야. 엄마는 늘 세라 곁에 있었어. 네 심장이 멈추려 할 때마다 내 마음을 보냈고, 고단한 하루 끝에 잠에 들 때면 기억의 조각들로 너를 안아주었단다."
세라는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똑같은 꿈을 자주 꿨어. 기계가 엄마의 치료를 거부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꿈. 나는 엄마를 살려달라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엄마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어. 엄마의 목소리도 마치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고."
세라가 울먹이며 덧붙였다.
"항상 같은 소리만 들려왔어. '살려 주세요, 제발...' 엄마도 많이 무서웠던 거지?"
"아니야, 세라야. 기계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했어. 그날,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너를 선택한건 오로지 나였단다."
휘리릭-
엄마의 목소리가 세라의 뇌 속에 박혀있던 환각의 기억을 하얀 꽃가루처럼 흩날리게 했다. 데이비드가 아르케를 통해 심어놓은 거짓의 조각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봉인되었던 진실은 엄마의 목소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는 세라 하나면 충분했어. 네가 숨 쉬고, 세상을 보는 모든 순간에 늘 세라와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
세라는 이제야 깨달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엄마의 미소, 그리고 간절하게 울리던 그 마지막 한 마디의 진실을.
"살려 주세요, 제발... 우리 세라를."
그것은 기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비명이 아니라,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며 딸을 살려내겠다는 엄마의 위대한 선언이었다. 자신의 몸 속에 흐르던 차가운 전류는 딸을 지키려 했던 엄마의 사랑이었고, 실험체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뉴럴 포트는 딸의 영혼을 지키려 했던 엄마의 희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라! 세라!"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카일과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는 파도 소리처럼 희미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입을 열어 대답을 할 힘조차 없었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세라는 직감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엄마의 따뜻한 숨결이 세라의 의식을 포근한 요람처럼 감싸 안았기에.
"이제 다 끝났어, 엄마. 아르케도... 나의 오랜 미움도..."
세라의 감긴 눈에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세라의 눈물을 훔쳐 하늘위로 흩뿌렸다. 터널의 정적 속에서 세라의 입가에 어린 작은 미소는, 그녀가 맞이한 모든 날 중 가장 눈부신 순간이었다.
- 끝 -
지금까지 짤막한 SF소설 '핸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핸들'은 AI에 모든것을 의존한 인류 사회가 겪게 될 고민을 상상하며 써내려간 이야기 입니다. 탄탄한 과학적 설정과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가득 찬 근미래 SF소설을 꿈꿨으나, 머릿속 상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매 화를 진행할 때 마다 망가지는 설정을 보며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습니다. 지난 화를 다시 읽으며 '이렇게 재미없는 글은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걸까?' 자책한 적도 많았습니다. 매주 월요일이 다가올 때면 밀린 방학숙제를 하듯 마음에 부담감이 휘몰아쳤습니다. 하지만 그 때 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셨기에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대체해가는 시대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AI의 발전속도를 보면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AI에 의존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제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바로 '자유 의지' 입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우리 모두가 손에 쥐고 있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권리를 기꺼이 AI에게 내어주고 있는 듯한 지금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저는 묘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편리함이라는 명목 아래 선택이라는 고통과 책임을 기계에게 위임하는 사회. 인간의 삶을 평균적으로 윤택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 대가로 자유의지를 내려 놓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면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저는 당당하게 거부의 깃발을 들고 소설 속 언더그라운드가 있는 터널로 몸을 옮길 것입니다.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완벽한 정답이 아니라, 서툴지만 따뜻한 온기가 담긴 인간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라와 엄마의 만남 장면은 폴 킴의 '모든날, 모든순간'이라는 노래를 떠올리며 썼습니다. SF소설을 표방하였지만 결국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따뜻한 온기였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 서툰 선택으로 딸려오는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자신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순간은 위대한 여정입니다.
부족한 저의 첫 SF소설을 끝까지 지켜봐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