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
허기를 느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먹는 것뿐이었다.
사과를 먹었다.
집 안에 불은 항상 켜져 있다.
그러다 보니 밤인지 낮인지 잘 구별도 되지 않고,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식탁에는 사과 뼈만이 굴러다녔다.
벌레가 꼬일 테지만 치워야겠다는 생각도 치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아내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번 추석 명절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전처럼 명절 음식 준비로 부산스러운 풍경은 없어진 지 오래다.
음식을 준비할 만한 사람이 없다.
늙고 병들어 운신이 편치 않다 보니 외식을 하는 게 간편했다.
명절이다 보니 식사나 함께 하자는 연락을 주고받기는 하는 때이다.
전화를 건 동생은 형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치매 중기 정도인 형이긴 해도 의사표현은 하는 편이었는데, 뭔가 말을 어버버 하는 것이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형의 아들에게 연락을 하고 같이 집으로 가보았다.
119로 신고를 해서 대원들이 왔으나 형수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본인들은 할 일이 없다 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라 했다.
고인은 적어도 사망한 지 이틀이상 된 것 같다했다.
명절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발견이 늦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형의 큰아들은 외국으로 이민 가서 산지 20년이 넘었고, 작은 아들은 거쳐는 근처지만 근무지가 지방이라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오고 부모님 댁을 자주 찾지는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어머니 사망에 작은 아들은 당황스럽고 경황도 없었다.
어머니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들은 낯설었고, 누구에게 연락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명절연휴라도 장례는 치러야 하는 지라 장례식장을 잡고, 어머니 연락처에 있는 번호로 일괄 부고장을 띄웠다.
새삼 어머니의 사생활에 너무 관심이 없었음에 현타가 왔다.
가까운 분들에겐 직접 전화를 드리고 싶었지만 그분들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형은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구하겠다고 했으나 14시간은 걸리는 거리라 빨라야 모레나 도착할 거란다.
형 내외는 공항에서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입관실로 향했다.
원래는 장례식장에 고인을 모시면 입관 먼저 하는데, 해외에서 입국하는 자식편의를 봐준다고 하루 늦게 진행됐다.
오랜 시간 비행에 시차 적응도 안된 상태에서 무슨 정신으로 어머니를 뵌 건지!
현실감이 없었다.
앉아서 돌아가신 지 이틀을 됐다고 들었는데,
고인이 편안히 돌아가신 것 같다고,
몸을 바르게 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했다.
아내는 오열했다.
아버님은 편찮으시니 신경을 썼어도 어머니를 신경 쓰지 못했음을 죄스러워했다.
먼 외국에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게 왠 갑작스러운 부고 인지.
이민 20여 년이 지나 지난달 처음으로 한국에 왔었다.
이민 초기 애들을 맡길 때가 없어 부모님과 처가 부모님이 번갈아 오셨었다.
아이들이 큰 후에 보고 싶어는 하셨으나 여건이 안되니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한 달 전 아이들 휴가를 맞춰서 일주일 다녀 갔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노인들은 밤새 안녕이라더니, 지난달 뵀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단 생각도 들었다.
장시간 비행, 시차, 부고, 최악의 상황에 눈빛은 흐리멍텅했다.
밥이 국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몇 술 뜨고, 옆자리를 보니 20 년 만 보는 이종사촌 동생들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는지 묻더니, 치매 환자가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는 게 낯선 환경이란다.
앞으로 아버지를 어떻게 모실건지를 묻는데, 동생과 의논해 봐야겠다.
나는 장례가 끝나면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야 할 테고, 어머니 부고로 아버지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문상객들이 더 이상 오지 않는 밤.
동생과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눴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발인
화장, 납골당에 어머니를 모셨다.
며칠 후 장례지도사의 어머니가 계신다는 요양원을 추천받아 아버지를 모셨다.
일주일 정도 적응여부를 살펴보자 했다.
일주일 후? 나는 이곳에 없다.
지금 공항으로 가야 했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