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숲을 걷다
오늘도 걸었다. 햇살 목욕하며.
좌청룡 우백호 아니고, 좌세미 우한라
운 좋게 까마귀 군무와 너울 구름춤을 보며 걷는다.
숲의 숱이 퍽이나 줄어버렸다.
숲이 비어가자 수북수북 이불 덮은 낙엽들
소리소문 없이 사그라드는 향기로 가득하다.
여름 향기는 열정으로 가득하더니
늦가을, 겨울 향기는 이우는 향기로 메워진다.
후각을 자극하며 성글어가는 나무 행간에 햇살이 모둠으로 쏟아져 내린다.
한때 찬란했던 우듬지를 맘껏 드러내 앙상하다.
잠시 누웠다가도 곧추 일어서는 삼나무, 본성을 잃지 않겠노라는 굳은 의지려나?
벌거벗은 나무들이 서름서름한 얼굴로 시선을 비끼고
팔꿈치 잘린 나무도 아무 일 없던 양 의연하다.
잎은 다 사그라들고 탐스런 빨간 열매만 오랭이조랭이 매단 천남성,
유혹하지만 치명적이다. 새들도 먹어봐서 알고 죽어봐서 알겠지. 고스란히 독을 품고 여물어간다.
걷다가 몇 번이나 마주친 이는 빠른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으며 몸을 지키고,
나는 천천히 걸으며 숲에 마음을 열고 묻는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냐고.
두 팔을 가슴께까지 올려 힘차게 걷는 그미가 두 바퀴 도는 나와 네 번이나
마주치며 잇몸 활짝 열고 환하게 마주 웃는다. 웃음으로 공기는 덥혀지고 만다.
숲은 각기 다른 결로 고즈넉하다.
여름 숲길 나무들은 진한 햇볕 막아주더니
겨울 숲길 그들은 바람을 온화하게 다스려준다.
탑이 되어가는 돌무더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돌멩이 위에 다른 돌을 살그머니 얹는 그 손길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어느덧 하나둘 늘어가는 그 아슬한 소망들은 언제쯤 이루어지려나. 커다란 소망 위에 걸터앉은
작은 소망 무더기로 나려 앉는 한숨을 본다. 겹겹이 쌓인 소망을 지나치며
두 손 모아 공손히 님들의 소원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낯 모를 새들과 까마귀 통신으로 소소히 채워지는 숲길에
마음을 스르륵 낙엽인양 떨군다.
초록을 떨구는 시간,
초록을 붙드는 시간이 공존하는 제주 숲에
내가 붙드는 초록은 무엇이고
내가 내려놓는 초록은 무엇이려나
숲은 점점이 벗어내고
사람은 겹겹이 껴입는 겨울
무거운 짐 진 자 숲으로 오라
더딤도 빠름도 분별없는 숲에서
스스로 묵묵해 보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