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2

2. 땅이 물러나다

by 조유상

우리 동네에 귀농한 친구 중에 내 첫사랑의 절친이 있다.

그가 농사지으며 쓴 첫 책이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였다.



그 친구, 부산에서 공부 잘했을 테지. 그러니까 s대 국문과를 갔을 테고. 농담 반 진담 반 우리 동네엔 s대 출신이 가랑잎처럼 굴러다닌다고 했는데, 그중 하나다. 그런 그이가 하던 일을 접고 땅에 몸 붙여 살내려왔을 때 그 마음 안엔 얼마나 많은 허무와 지친 마음이 있었을까... 어렴풋이 짐작만 한다. 고집스레 벼를 탈곡해 길가에 고무래질 해 가며 말리던 그도 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물어보진 않았으나 풋풋하던 어린 시절 내 첫사랑도 그러하리라.


그나저나 땅, 땅은 우리를 받아주는 존재인가?

우리가 흙에서 나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뭇 생명이 앞서 살았던 존재의 주검을 먹고 태어나고 성장해 늙고 죽으면 우리의 주검을 다른 존재들이 조각조각 먹어치우고 새로운 생명을 움터내지 않던가. 농사를 지으며, 꽃밭을 가꾸며 맨손으로 일하다 가끔 흙 한 줌을 집어 킁킁 냄새를 맡곤 했다. 흙 한 알갱이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숨어 있는가. 까르륵 대던 웃음도, 흘린 눈물도, 먹고 싼 모든 것이 흙 없이 비롯할 수 있겠는가. 흙은 생명의 원천이자 생명의 마지막을 받아주는 품 너른 치맛자락이다.


등산 다녀가며 칙칙 고압으로 검불과 먼지를 터는 사람을 보면(진드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구나... 하면서도 뭘 저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먼지가 다 어디로 가나 싶다. 우리가 곧 먼지고 아무리 털어도 털어지지 않고 공기 중에 우리는 늘 경계 없이 죽음을 안고 호흡하고 살고 있지 않던가.


까다로운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유쾌한 사람도 우울한 사람도, 잘났던 사람도, 손가락질 받았던 사람도 예외 없이 맞이하는 죽음 앞에 평등하고 땅은 아무런 평가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사라짐을 전제하고 살고 있으니 살아갈 날 앞에 겸허하다. 땅은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언제든, 언젠가는 너를 받아주겠다. 기꺼이' 하는 너른 품을 느끼니 땅에 탁탁 털지 않는다.


너른 마당을 가진 집터와 텃밭으로 보기엔 넓은 1400 평의 땅을 가지게 되면서, 사람이 땅을 소유한다는 것의

기쁨과 어이없음을 동시에 느꼈다. 땅을 소유한 덕분에 빚도 잔뜩 걸머지긴 했지만 덕분에 우린 이미 가진 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농사가 업이 된 이상 그 터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땅을 사거나 팔지 않고 농사짓는 이에게 영구임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살다 죽는데 꼭 땅을 사느라 아득바득 매달리고 물려주느라 골머리 썩기보다 사는 동안만 잠시 빌려 쓰다 몸만 호로록 간다면 얼마나 가벼우려나. 내가 하느님이라면 이렇겐 안 둘 텐데, 쩝.


하늘을 가를 수 없는데 가르고, 땅도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름을 지어 갖게 되었을까. 자기가 먹을 만큼만 생산하고 나머지는 소유하지 않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소용없는 질문만 늘어간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디 이상으로만 살아지던가? 땅과 인연이 되면 좋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는 걸.


우리 집 왼편 800여 평은 귀농한 두 가족이 2,3년씩 농사짓다 이사 가서 우리가 뒤를 이어 빌려 농사짓고 있었다. 몇 년간 임대를 해 짓고 있는데 한 해 겨울, 난데없이 팔렸다는 통고를 받게 되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펑펑 울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유기농을 하려면 돌려짓기도 하고 휴경도 해야 한다. 겨울이면 무얼 어느 땅에 심을까 남편과 상의하며 다음 해 농사를 계획하곤 했는데 무참히 이겨진 거였다. 내가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전화를 해 따지다 눈물 흘리다 하니, 나중에 미안했던지 다시 전화가 왔다. 당분간 계속 농사를 지으라는 거였다. 사실은, 예전에 우리 앞에 농사짓던 귀농 두 가족에게 사겠느냐고 물어봤었다는데, 학교 모퉁이 허름한 집과 함께 팔겠다는 말에 다 안 산다고 해서 우리에게는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농사짓는 사람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파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엎질러진 물, 아니 건너간 땅이었다. 이번엔 그 집터는 빼고 농사짓는 터만 판 거라 그 800여 평이면 우리는 굳이 다른 곳까지 멀리 가서 농사 지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건만, 우리에게 닿는 운이 아니었던 가보다. 미리만 알았더라도 무리를 해서 그 땅을 샀을 텐데 싶으니 더 놓친 떡이 커 보였다. 만정이 떨어진 우리는 둘 다 다시 그 땅에 들어가 농사짓고 싶은 마음이 콩알만큼도 없었다.


이사와 이듬해 우리는 그 땅에 수수와 조를 심었었다. 옆밭은 논이었던 땅이어서 성질이 질었다. 남편이 꼼수를 내봤다. 모판에 모를 부었던 걸 하나씩 심어야 했는데, 모내는 이양기로 꼽아보겠다고 굳이 비가 온 뒷날을 디데이로 잡았던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웬걸, 기대완 달리 조를 이양기로 철퍼덕철퍼덕 심으면 논이었지만 논이 아닌 밭이 되어버린 땅은 모가 땅에 꼽히는 척했다가 다시 이양기에 찰싹 달라붙어 올라가는 거였다. 떨어지기 어려운 연인 사이라도 되는가. 결국은 이양기로 심은 게 삼분의 일이나 되었을까. 나머지는 다시 다 손으로 일일이 심어야 했다. 쉽게 가려다 곱절로 어려워졌다. 뭐든 한 번에 가야지, 찔뜨럭대고 두 번 세 번 손대게 되면 지치게 마련이다. 결국 헝클어진 마음으로 모 때우기 하듯 호미로 나머지를 심었는데 그해 조와 율무가 실하게 좋았다. 수수는 아래로 휘청할 정도로 통통히 영글어갔고 조는 묵직하고 기다랗게 달려 숱 많은 아가씨 땋은 머리처럼 뭉얼뭉얼 수북이 달렸었다.


제법 수확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옆밭에 가보면 참새들이 호로록 날아가네. 야, 이거 일개 소대도 분대도 아닌 거의 대대가, 아예 홍동 바닥 참새란 참새는 다 불러들였나 보다. 얘들아, 여기 맛난 거 있다아...하며. 점점 아래로 쳐지던 알곡들이 참새가 방앗간을 차리자 홀가분해져 고개를 버쩍버쩍 들어가는 게 아닌가. 너희가 다 쫘 먹으면 우린 어쩌냐, 염치도 참 좋네... 안 되겠다. 남편과 낑낑대며 요놈들 더는 못 먹게 그물망을 쳐 보았지만 그 넓은 밭에 다 친다는 것도 무리고 쳐 본들 녀석들은 꾀 약게 아래로 날아들어가 실컷 배불리 처먹고 달아나기만 하니 그야말로 먹튀. 아, 우리는 배 아프고 참새 일가족에겐 배 터지고 신나던 가을 아니었을까. 한 해 농사 참새에게 홀라당 갖다 바치고 나니 정작 우리에게 돌아온 건 벼 포대로 2 포대 남짓. 그것도 근방서 유일하게 잡곡을 쪄주는 데서 방아 쪄 온 남편 손에는 가뿐하게 1. 2킬로 가웃 들려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그것밖에 안 돼요? 그러네. 껍질 날리고 나니 이것 밖엔 안 남았네... 그도 나도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가벼워진 손과 무거운 마음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길가 밭이라 무얼 심고 있으면 안 동네 할머니들은 지나가면서 꼭 한 마디씩 하셨다. 하영이네 뭐 혀? 대답하고 나면, 그건 이러고저러고 어쩌고 저쩌고... 동네분들 말씀 다 듣다간 산으로 가게 생겼다. 아, 예예~~ 웃으며 적당히 넘기긴 했지만 유기농 하는 우리를 딱하게 여기시며 제초제 확 뿌리라는 충고는 소용없는 걸 아시면서 꼭 버무려 넣고 가셨다. 그게 다 젊은이에게 보태는 관심과 염려라는 걸 알면서도 영 부담스러운 말이었다. 아휴, 저 길가에 가림막이라도 쳐야지 안 되겠어. 그리 농담할 만큼 관심은 참 집요했고 지켜보는 눈동자가 너무 많았다.


그런 추억이 깃든 땅이었다. 그 땅은 논이었다 얕게 복토를 한 땅이라 찰기가 머무르고 습이 쉽게 빠지지 않는 땅이었으니. 하지만 앞선 귀농자들과 우리가 거의 10년 가까이 유기농으로 땅심을 돋아나게 했기에, 들인 정성만큼 울분이 컸고 잃고 나서 미운 정이 곱절이라 더 돌아보기 싫어졌던 땅이다.


그 땅은 우리와 인연이 그렇게 멀어졌으니, 땅땅거리고 살 팔자가 못 되었나 보다. 신포도 맛을 톡톡히 보았고, 그 땅은 결국 우릴 받아주지 않았다. 이미 받아들여 준 땅에 깃들여 사는 걸 감사해야 했다.


#땅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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