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2

3. 귀농자가 별 건가? 초록이야 꽃이야?

by 조유상

내가 풀무학교에 내려왔던 1996년 여름. 그해 가을 우리 동네에 귀농 1호가 내려왔다. 풀무학교에서 만난 그이는 문당리에서 살다 우리 집 모퉁이 돌아 첫 집으로 옮겨 살다 원천리로 이사 갔었다. 이제는 그 근처에 새로 집을 지어 살게 된 이기영 씨 가족. 그이와 남편이, 그이 아내와 내 나이가 똑같아서 우린 더 친해지게 되었다. 대기업을 다니다 내려온 그의 시력은 직장 다닐 때보다 초록을 바라보며 더 좋아졌다고 했다. 공간을 달리하고 바라보는 주 대상이 달라지기만 해도 몸이 달라진다는 게 놀랍지 아니한가? 숨 막히던 직장 스트레스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친 자의 자유로움은 그 영혼 안에 자유라는 바람을 후 불어넣으며 세포 하나하나를 초록으로 채우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얼마 전 절친이 내려와 제주 토박이 친구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절친이 물었다. "너는 초록하고 꽃 중에 하나만 고르라 한다면 무얼 고를 거야?" 토박이 친구는 주저 없이 '초록'이라 외쳤고, 나는 이런 둘 중 하나 고르라는 질문 자체가 싫다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친구 역시 초록을 좋아하는, '초록은 동색' 친구 아니었나. 나도 초록을 사랑한다 거침없이 말할 수 있지만, 초록으로만 대변되지 않은 다채로운 생명력을 가진 '동색'이 아닌 초록은, 내 마음속엔 늘 기초 아니었나. 좋고말고로 가릴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림 그리기에 푹 빠진 토박이 친구가 오늘 새해 안부를 물으니 '땅을 훑고 있다'고 했다. 바닥에 고스란히 놓인 낙엽을 그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초록이 동색이 아니듯 흙빛도 얼마나 많은 다른 결을 가진 풍요로운 말이던가. 다채로운 색감과 감정의 파동을 지닌 색채에 관한 우리말, 그 속에 초록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흙에서 살아간다 할 수 있을까?


흙에서 나머지 삶을 살아갈 터로 선택해 온 이들, 농사를 염두에 두고 온 이들을 귀농자라 부른다. 전국귀농운동본부가 태동한 1999년 초부터 십수 년 지나는 동안 수많은 귀농자가 붐처럼 일었다. 많은 수가 흙에 기대 살기 위해 도시를 떠나왔다. 그들에게 '귀농자'라는 꼬리표를 붙인 건 이미 그 땅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분들이었다. 우리 동네에도 그 귀농 초창기부터 꾸준히 홍동을 찾는 이가 이어졌고 첫해부터 한 20여 가구가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동색이 아닌 귀농자들끼리 잘 뭉치곤 했다. 남편에게 처음 귀농자 모임에 가자 했을 때, 낯섦을 불편해하는 그는 '싫여~ 내가 무슨 귀농잔가?'하고 되묻곤 했다. '원래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살다가 도시에 나갔다 되돌아오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귀농자 아니냐'며 나는 남편을 설득했다. 그렇게 처음에는 마지못해 나가기 시작했던 가족 모임에서 그는 뒤로 빼던 처음과는 달리 그들과 살갑게 지내게 되었다. 만나 보니 농사라는 같은 화두 아래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고 허물없이 지낼 만큼 순수한 이들이 많은 걸 알게 되었나 보다. 농사지으며 서로의 정보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소소한 기쁨을 발견해 갔다. 옆에서 지켜보니 남자들의 대부분은 같은 일을 하면서 공감대가 깊어지는 듯했다.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마음 깊은 곳을 길어 올리지 못하다가도 만나는 횟수만큼, 같이 먹는 밥그릇 수만큼 도타워지고 공통분모는 면적을 넓혀갔다.


어느 틈에 그는 토박이들과 만나는 것보다 귀농자라 불리는 이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졌고 서로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면 소재지 초등학교 바로 앞에 집이 있던 터라 베이스캠프는 거의 우리 집이 되어버렸다. 우리 집은 뻑하면 '언니~'하고 열린 대문으로 들어오는 집, '형님', '형수님'하며 밀고 들어오는 집이 되었다. 제로베이스에서 농사를 시작했던 우리였지만, 밀고 들어오는 이들에게 수저를 더해 밥을 나누고 차와 따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를 계획해도 우리 계획대로 되기보단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이웃들을 맞이하다 보니 예정에 없이 다르게 흘러가던 하루하루가 많았다. 거절보다 맞이하기가 우선이던, 어찌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상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밥은 늘 여유 있게 하게 되었다. 남으면 우리가 먹으면 되니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예수님 몫의 여벌 밥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찬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밥 먹구 가~' 하던 나날.


남편은 초등학교 들어가자마자 친어머니 돌아가신 이후로 어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이들이 스쳐 지나갔고 지금 어머니 손에 자라면서 친구가 와도 밥 한 번 먹여 보낸 적이 없었단다. 결혼 전에 들은 그 이야기는 내 명치끝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말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언제든 와르르 친구들 몰고 집으로 오면, 여름이면 시원하게 펌프질해 올린 물로 미숫가루를 타주시고 부침개든 뭐든 입다실 걸 내주시던 엄마 덕에 난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 자랐었다. 커서는 사이 왈그락대던 부모에 민감했던 터라 동굴을 파고 들앉느라 친구 범위가 극소수로 좁아졌지만, 그래도 그와는 달랐다. 남편에게 가족이란 어떤 것인가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먹을 걸 나누고 누굴 데려와도 언제든 오케이, 집안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귀농자들과 어울리면서 그도 차츰 어울리는 게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부드러운 사람, 고집스럽지 않은 이(물론 살다 보면 툭 튀어나오긴 하더라만)였기에 우리는 이웃과 어우러져 사람 목소리와 온기로 와글와글하고 따뜻한 집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집안에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다. 물론 간간이 웃고 재밌었겠지만, 길게 숨죽였던 사춘기 시절 우리 집을 생각하면 나는 사실 화창하고 활짝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간혹 '크렘린'이란 소릴 듣던 남편도 내 앞에선 점잖을 다 내팽개쳐두고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코믹한 춤을 추기도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자유로이 피어나는 걸 바라볼 수 있는 게 내겐 가정이라는 이름이었다.


농사짓기 시작하면서 그다움을 애써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편안한 모습인 귀농자로 그는 돌아왔다. 연어가 자기 자리로 돌아오듯 나고 자랐던 터전으로 돌아와 본연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체면치레 없이 자기 옷을 입었을 때 가장 흙에 가깝고 초록빛 생명력이 돋아나는 게 아닐까? 그가 초록으로 움텄다.



#귀농자 #연어회구 #땅으로 돌아오다 #자유를 호흡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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