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함께 풍요롭게
우리 초등학교 때는 군인들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국군장병 아저씨께’라는 이름으로.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박정희시대 황당한 문화 아니 아니겠는가? 애인도 가족도 여자친구도 아닌 어린아이한테 대체 무슨 편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사회와 연결되는 아주 미세한 얇은 끈이라도 그 서툴고 어설프고 천편일률적인 편지를 통해서라도 매개해 보려는 시도였으려나? 도무지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참 궁금한 만큼 어처구니없다. 그때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왔는데 ‘형이라 불러다오’라는 말이 있었다. 이름만 보고 나를 남자아이라 생각한 거였다. 기분 상했고 당연히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곳곳에 선입견과 편견은 난무한다.
그 뒤로도 내가 이름을 말하면 조유선, 조우선, 조유성, 조우상 기타 등등, 거의 한 번도 제대로 알아듣는 이가 없었다. 내 발음은 목소리만 적을 뿐 비교적 정확한 편인데 그렇게 못 알아듣는 이유는 단지 조유상이란 이름이 남자 이름일 거라는 지레짐작 판단 덕분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발음해도 쉽사리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할 수 없이 성을 말한 뒤 여유롭다 할 때의 유(裕), 서로 상(相), 혹은 우유 할 때 유라고도 했다. 한자를 아는 세대에겐 앞선 설명으로, 모르는 세대에겐 뒤의 말로.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하나가 내 이름을 듣더니 다가와 말했다. 자기 할아버지 이름이 ‘노유상’이라고. 우리나라 연날리기, 연 만들기의 대가라면서. 내 이름을 긍정적으로 피드백해준 사람은 그 애가 처음이었다.
나는 어쩌다 이런 어려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이름은 남에게 불리기 쉽고 듣기에 아름다우면 좋을 텐데 하며 한때는 평범하지 않은 내 이름이 싫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천주교 세례명을 길에 굴러다니듯 흔한 소화 데레사로 정했었다.( 지금은 천주교라는 시스템에서 자발적 아웃 상태이지만.) 오빠들과 언니가 있는데 돌림자로 상(相) 자를 썼다. 당시에 여자들은 제사 지낼 때 절도 못하게 했는데 우리 집에서 엄마는 딸들도 함께 절하게 했고 돌림자도 똑같이 넣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에게는 아들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거나 계집 희나 기쁠 희, 덕자나 순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흔했다. 여자에겐 이름조차 쉽게 지어버리고 말던 세상에서 엄마는 그 바쁜 와중에도 옥편을 찾아가며 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뒤늦게 그 정성이 고맙고 뿌듯했다. 나의 이름 안에는 여유(餘裕)가 있다. 계곡을 옷으로 다 덮을 만한 거니 그렇지 아니한가. 나무가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또 그러하지 아니한가. 엄마는 나의 성정을 태어나기도 전에 꿈꾸었으려나? 돼지꿈을 꾸고 태어나서 그럴까? 오랫동안 블로그를 해오며 내 이름을 풀어 ‘함께 풍요롭게’로 지었다. 한동안 이 이름을 사겠다, 빌리겠다고 덤비는 이들이 제법 있었지만 모른 체하고 놔뒀더니 제풀에 사라졌다. 이름을 지어준 엄마의 혜안에 감탄한다. 여자지만 남성적인 이름을 지어줘서 중성으로 희석되어 버린 내 이름, 혹은 여성이지만 내 안에 있는 남성성을 발견하게 된 이름이다.
그간 내가 여기저기서 써온 필명 혹은 별명으로는 ‘풍경소리’, ‘포카혼타스’, ‘흔적’, ‘그린파파야’, ‘초그린썸’, ‘버금아름’, ‘ㄱㄷㄴ’ 등이 있다. 그중 ‘ㄱㄷㄴ’는 사람들이 자주 헷갈려하던 별칭이었다. 함께 짧은 10줄 글을 쓰는 친구들이었는데 대충 읽고 ‘ㄱㄴㄷ’로 오해하기 다반사였다. 그래, 남의 삶에 얼마나 관심 있겠어? 그냥 웃고 지나가기도 하고 반복되면 이야기해주기도 했지만, 이름과 별칭으로 얼마나 많은 해프닝이 있었던가. 우리가 익숙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들을 아주 조금씩만 다르게 표현해 놔도 읽는 사람이 자기가 알던 단어로 읽는다는 건 이미 실험으로도 증명된 사례 아니던가. ‘ㄱㄷㄴ’이란 별칭은 한참 고민 끝에 지어진 건데, 마지막 삶을 ‘가드너’로 살고 싶은 숨겨진 꿈이 담겼던 별칭이다. 삶을 평탄하게 보다 어긋나게 살아온 듯한 나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기에 마음속으로 제일 좋아하는 별칭이기도 하다.
익숙한 궤도에서 일탈하는 삶이 나의 것이었고 그것에 대한 후회는 1도 없다. 어렵고 아리고 힘든 기억들 너머로 뭉게뭉게 솟구치는 구름 같은 환희가 있을 뿐. 그때 누구를 안 만났더라면... 그때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굳이 하지 않는다. 어제 독일어를 잠시 들여다보다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 하는 가정법에서 쓰는 ‘selbst wenn(젤프스트 벤)’이란 말 앞에 잠시 멈추었다. 만약에 내가 홍동이라는 시골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이 남자랑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거 너무 부정적인 가정일까)이 되어버린 결정적인 그 둘 앞에서 나, 후회하고 있나? 마음이란 골짜기에 손을 얹어봐도, 역시 아니었다. 벤자민 플랭클린의 ‘시간을 거꾸로 흐른다’를 내게 대입해 혼자 내 맘대로 뒤로 돌려보아도 그곳에 따로 원하는 삶이 딱히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선택이 역시 흔들릴 수는 있지만 걸어온 발자취를 부정하지 않는 마음만 눈밭을 걸은 발자국처럼 꾹꾹 찍혀 남아 있다. 그거면 됐다.
엄마가 붙여준 이름값을 하며 충분히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30대 초에 읽었던 전우익의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책이 떠오른다. 수많은 인생 책이 있지만, 그 책도 내게 그랬다. 늙어 골지고 주름 깊은 얼굴이 무채색으로 박혀 있는 그 책은 읽다가 다시 그 표지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게 만들곤 했다. 궤적이 주름 사이사이에서 만져지고 느껴지는 책, 아니 글, 아니 삶이었다. 보톡스로 부러 통통히 만들고 안면거상으로 주름을 뒤로 당겨 펴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피부표면에 얼이 담긴 한 농부의 우주가 담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삶을 닮고 싶다. 물론 좀 더 고운 모습으로 결을 만들어 가고 싶지만.
혼자 오래 칩거했던 젊은 날이 갔고 벅시글 벅시글대며 결혼 30여 년 가까이 살아왔다. 기대수명이 늘어 이제 인생 3/5쯤 살아왔으려나? 생각만 해도 두렵다. 쉽게 죽어지지 않는 지루한 인생이 아니라, 하루치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며 곁에 있는 이들과 오늘을 다정하게 살고 싶다. 그게 엄마가 주신 선물 같은 이름값 하는 삶 아닐까. 제주에서는 주로 혼자이고 가끔 함께다. 이제는 이렇게 가끔 함께 풍요롭자. 매일은 내게 버거웠으니까. 진하고, 찰지고, 오롯하게 혼자인 시간을 누릴 수 있을 때 흠뻑 누리고 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리라. 아니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도 나의 삶은 손에 손잡고 ‘함께 풍요롭게’ 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자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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