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버지의 추락
아버지 모시는 게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는 줄 알았다.
20대부터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남은 분은 내가 모시고 살겠다고 다짐 아닌 다짐을 큰소리가 아닌 보통 목소리로 그냥 해 댔었다. 어떤 엄청난 결심이나 작심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우리 어린 시절을 부모의 품 안에서 자라왔듯이 늙어가는 부모를 모신다기보다 함께 산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 아닐까 싶었을 뿐이다.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지내던 날 중, 작은 오빠한테 연락이 왔었다. 아버지가 한강에서 떨어져 내리셨다고. 그런 아버지에게 달려가 중환자실에서 만나고 놀란 오빠와 작은올케를 달래고 남편이 옆에 있는데 동의도 없이 아버지 퇴원하시면 바로 모시고 홍성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작은올케는 자신이 부모님을 모신 게 잘못된 거 아닌가 했지만, 그럴 리가요.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IMF로 오빠들 동업했던 건재상 사업은 실패했고, 막내딸 집에 내려온 뒤로 아버지는 자주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테고 초기에 그런 말씀을 하곤 했다. 그건 마치 더 이상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 아니었을까. 딸보다 사위 눈치를 보셨겠지만, 그 사위는 눈치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기사 눈치를 줘서 받기도 하지만, 본인이 자격지심에 알아서 받는 게 또 눈치 아닐까.
큰오빠 보증서는 데 찍어 준 아버지의 도장 하나는 엄마 가슴엔 대못이 되었고 두 분 울화증에 제대로 원인 제공한 셈이었다. 자식들을 위해 평생 사신 부모님에게 살 터전을 잃게 만들고 집안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건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자초한 좌초였다. 방향키를 잘못 잡고 길을 나섰구나. 결과를 놓고 뒤늦게 되짚어보니 그랬다. 내게는 애초부터 예고편이 그려졌던 그림이었다. 너무나 다른 스타일의 두 오빠가 사업으로 동업한 것 자체가 실수치고는 엄청난 불행의 시작이었다.
엄마가 우리 집에 와 계신 틈을 타 수없이 망설이셨을 생의 마감을 한강에서 꿈꾸시다니. 행불행은 모르겠지만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살아나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게 되면서 초기에는 아버지를 달래 드려야 하는 시간이 잦았다. 괴로워하며 한숨짓는 아버지를 모시고 바로 옆 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데서 말을 하기는 어려웠으니까. 아버지랑 우리 집 밭이 내려다보이는 학교 앞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앉아 낮은 촉수 가로등에 서로의 실루엣을 느끼던 날들. 나와 아버지는 단순히 부녀간이 아니라 운명 같은 존재, 나를 있게 해서 오래 괴로웠으나 길에서 흘린 눈물만큼 녹아내리고 뒤섞여버린 존재였다. 막내딸인 나는 그 중환자실에 있던 아버지를 웃게 하고 농담했던 만큼 이미 허물없어졌었다. 그래도 간간이 아버지를 학교 운동장 앞으로 모시고 나가 달래고 또 달래야 했다. 막내딸은 자식이 아니냐? 딸자식이 모시는 거랑 오빠가 모시는 거랑 뭐가 다른 데? 다 같은 자식이잖아요? 하지만 오랜 믿음대로 사신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이 기대 살만큼 해준 게 없다 느낀 거였다.
어쩌다 아버지 옷장을 꺼내 정리하다 보면 복권이 여러 장 나오곤 했다. 틈날 때마다 홍성에 버스 타고 나갔다 오시곤 했는데 아마 복권을 사러 다니셨나 보다. 나는 이미 망해버린 오빠네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으신가 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한 번은 호기심에 여쭤봤다. "아버지, 복권은 왜 자꾸 사시는 거예요? 거 되지도 않는 걸." 하니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며 말씀하셨다. “느희들 집이라도 사주고 싶어서...” 쿵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우리가 그 땅을 빚지고 사서 갚느라 전전긍긍하는 걸 아시고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으셨구나... “아버지, 걱정 마셔. 우리가 젊은데 다 알아서 갚어. 그 돈 있으면 아버지, 콧바람도 쐬고 맛있는 거나 장에서 사 드시고 오셔요.” 그렇게 말로 아버지 마음 가볍게 들어 올려드려도 아버지는 가벼워지지 못하셨나 보다. 돌아가신 뒤에도 여전히 복을 부르지도 못한 복권 몇 장은 서랍장 안에 남아 있었으니, 딸을 향한 희망은 그렇게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된 채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버렸다.
아버지는 함께 사는 4년 동안 홍성을 자전거로도 다니셨으나 다리 힘이 점차 약해지자 버스로 다니셨다. 나중엔 여러 차례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 어기적거리며 다녀오시기도 했다. 홍성을 가시고 싶으시면 말씀을 미리 하시라고 해서 모셔다 드리기도 했지만, 농사일이 바쁜 우리에게 부탁하기가 미안쩍으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점차 쇠약해져 갔다.
우리 집에 이사 오면서부터 나도 탐을 냈던 우람한 은행나무엔 해걸이를 해도 많은 열매를 맺곤 했다. 아버지는 매해 올라가지 말라고 해도 사다리를 놓고 은행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흔들어 익은 열매를 털어내셨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떨어지련만. 한 해는 아버지가 가지를 헛디뎌 미끄러지셨다. 내가 못 본 사이에 또 올라가셨다가 얼굴을 찢기고야 말았고 안타까움은 아버지한테 친절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 또 은행나무에 올라가시면 내가 은행나무 다 잘라버릴 테다'라고 윽박지르는 소리를 내질렀다. 얼굴에서 피를 보고 나서 더는 은행나무에 올라가지 않으셨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추락이었다. 자식을 도와주고픈 마음이 더 이상 닿지 않는 소용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오래 노인성 아토피로 고생하셨던 아버지 침대 주변으로는 늘 효도손에 긁힌 살비듬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매일 쓸어대도 어디서 그리 나오는지. 하루는 아침에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아침 드시게 나오시라 했더니 가렵다고 벅벅 긁고 계시다가 느희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아이구, 당신 그렇게 가려워요? 잠 못 잘 정도로? 하고 물어봤을 텐데... 하셨다. 내가 안 물었겠는가? 아버지는 당신 가려움증을 빗대 먼저 간 엄마를 따라가고 싶었고 그리 잦았던 말싸움에도 자식보다는 역시 배우자가 편해서 그리웠나 보다. 내게는 아버지였지만, 한 여자의 지아비 아니었던가.
아버지 귀가 어두워지셨던 만년에 보청기를 해드리겠다면 굳이 마다하셨지만, 제발 나를 위해 끼셨으면 좋겠다고 간청했다. 목소리가 작고 낮은 편인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리려면 늘 군 힘이 들었다. 농사일과 식구들 치다꺼리에 늘 종종거리고 살던 내게 체력은 국력 미달이었다. 보청기를 해드리고 안심했는데 웬걸, 종종 귀에 꽂혀 있질 않았다. 아버지 왜 안 끼셨어요? 하고 물으면 ‘늙은이가 젊은이들 말하는 걸 일일이 알아듣고 참견하는 건 안 좋은 거 같다.’고 하셨다. 사실 그때만 해도 보청기가 백만 원이나 하는 거금이었어도 기술적으로 좋지 않았는지 가끔 삐 소리도 나고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던 걸 조금은 알고 있어도 내 귀에 꽂는 게 아니라 보청기라는 낯선 물건이 귀에 들어가 어떤지를 잘 몰랐다. 아버지는 식탁에서 나누던 대화에서 점차 물러나셨고 대충 알아듣는 걸로 만족하셨다. 물론 엉뚱한 지점에서 잘 알아듣는 통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날로 어둡고 마르고 저물어갔다. 그 강건하던 아버지가 삭정이처럼 삭아가던 시간을 함께하는 건 단순히 숟가락 하나 얹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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