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2

11. 아버지와 끈

by 조유상

아버지 말년을 돌이켜 본다. 극심한 가려움증에 시달리셨던 아버지. 노인성 아토피 피부질환이었는데 아마도 엄마가 관절이 안 좋아 드시던 스테로이드 약 같은 종류를 꾸준히 드셨던 까닭 아닐까 싶다만, 심증만 있을 뿐. 이 약은 홍성에 오시면서 위험하다고 못 드시게 했던 기억이 난다.

거의 누워만 계실 때였다. 그때는 사람이 마르면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 아버지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살가죽이 뼈와 맞닿아 말긋말긋해진 모양으로 탄력 없이 늘어져 죽음이 가까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체수에도 한때 동네 윷놀이판을 휘어잡던 낮고 굵고 쩌렁쩌렁하던 목소리며 눈동자에서도 힘은 마지막을 향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십여 일 넘게 거의 유동식밖에 못 드시니 변 보기도 어려워 내가 일일이 손에 바셀린을 바르고 굳은 변을 파내야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아프고 민망하셨을까. 나야 아버지니까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당신은 의식이 멀쩡히 있는 상태였으니. 앙상한 골반 뼈 주변이 오목하게 파였고 기저귀를 채워도 그곳에 물이 고였다. 말로만 듣던 숙변이란 걸 처음으로 눈으로 만났다. 80여 년 아버지 몸속에 차곡차곡 쌓여 배출하지 못한 숙변은 아버지의 한처럼 시커멓고 끈적한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저렇게 깡마른 몸에 저토록 많은 똥이 남아 있다면 우리 몸속에는? 생각이 그리 미치자 아무리 지워도 다 지워지지 않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살아온 세월과 비례한 저것은 숙명 같은 거였다.



가을이었다. 고추를 따러 수시로 들락날락하고 말리고 손봐야 할 가을걷이는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계절 아닌가. 밭에서 집으로 집에서 밭으로 풀빵구리 쥐 드나들듯 하면서도 그해 늦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가려움증 때문에 하루에 두 번씩 아버지를 씻겨드려야 했다. 남편과 같이 부축해 화장실에 모시고 가서 함께 씻기기도 하고 그와 내가 번갈아가며 씻겨드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당신의 벌거벗음 앞에 마음까지 벌겨벗겨진 듯 눈동자가 흔들리곤 했지만, 나는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 씻겨드리고 아랫도리를 부채질해 말려 드리면서 ‘아버지, 태양초로 말리자’하며 농담하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빙긋 웃으시며 민망함을 에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침대에 누운 아버지는 여덟 살 난 손주 하영이를 불러 동그란 시계를 묶어 걸어두었던 시곗줄을 내려달라 하셨단다. 밭에 일하고 있는데 하영이가 새파랗게 질려 우릴 부르는 게 아닌가? 아버지가 그 줄로 목을 매어 잡아당기고 계셨던 거였다. 줄을 내려드리고 나서 조금 있다 할아버지 방에서 컥컥 이상한 소리가 들려 가보니... 할아버지 안 돼요, 안 돼요 하며 줄을 끌러 놓고는 달려온 거였다.



털썩 주저앉을 만큼 놀랐지만 일단 수습하고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엉엉 우는 큰아들을 따로 불러 안아주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나는 아버지의 아픔과 아들의 놀람이라는 교차로에서 정신이 혼미했다.

아들은 커서도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말한 적이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따뜻하고 섬세한 녀석인 데다 한창 질문하고 보실 보실 장난기 있을 나이였으니...


얼마나 가려움증이 극에 달했으면 그러셨을까.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아픔이란 이름의 파티션 앞에 가족도 문득 낯설어졌을 것이다. 아버지가 선택했던 첫 번째 죽음이 한강에서의 투신이었다면 두 번째 죽음은 목을 매는 거였다. 결국 두 번 다 실패하고 자연사하셨지만 그날은, 자연사를 친구 부르듯 할 수 있다면 진즉에 불러 아버지를 모시고 가라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늙음은, 병은, 가족과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마는 속성을 가졌나 보다. 이런 게 흙으로 돌아가는 수순이려나. 가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매일 마주해야 하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존재가 무거워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한 그 5년이 내겐 축복의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밥숟가락 하나 더 놓는다는 단순한 마음에서 시작했던 동행이었지만 차츰 언제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비상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동안 가끔 소풍은 갔지만 같이 멀리 다닐 수는 없었다. 조마조마해서 곁을 떠날 수 없는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가족이든 반려동물이든 보낼 때가 되었을 때 준비하는 과정은 끝을 알 수 없기에 막연히 길다. 지나고 보면 훌쩍이건만.



그런 아버지의 때가 오는 걸 느끼며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과 의논했다. 홍성에 내려오신 이후 내가 권해서 아버지는 세례를 받으셨고, 엄마 뒤편에 선 그늘 인생이셨기에 요셉이란 세례명을 붙여드렸었다. 동네 공소에도 홍성 성당에도 함께 다니시곤 했는데 엄마는 5년 전에 먼저 가신 뒤 절에 모셨다.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셨으니 두 분이 나중에 어느 곳에서 해후하시려나? 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영혼이 어디 절과 성당에만 묶이랴.


신부님이 오셔서 마지막 성체를 모시는 봉성체를 하고 난 뒤, 나는 아버지가 동네분들과 공소에서 친분을 쌓고 지내셨기에 여기서 돌아가시게 해도 되지 않을까 했더니, 오빠들이 살아 있는데 오빠가 있는 곳으로 모시는 게 좋겠다는 말을 꺼냈다. 오빠들의 체면도 있는 거니까 하면서. 생각해 보니 2남 2녀 4남매 중 막내인 내가 장례까지 모시겠다는 게 내 욕심일 수 있겠다 싶어 작은 오빠에게 모시러 오라 알렸다. (당시 큰오빠는 집도 작은 오빠가 구해준 월세방에 살고 있었고, 처음 사업 동업했을 때와 달리 이번엔 작은 오빠가 사장, 큰오빠가 직원으로 있을 때였다.) 작은 오빠가 저녁에 내려와 아버지를 모시고 나도 같이 오빠네로 향했다. 뒷자리에 자릴 펴고 눕혀드리며 “아버지, 오빠네로 모실 거예요. 가는 동안 편히 주무세요~” 했는데 가는 동안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버지는 한 마디도 없으셨지만 눈은 감지 않으셨다. 당신의 마지막을 짐작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밤길임을 아셨을 테니, 그 밤 내내 아버지는 뜬눈이었다. 밤에 아버지와 함께 자고 다음 날 내려오며, “아버지 금방 또 올게요.” 하자 내 손을 마주 잡으시던 손에 사그라드는 힘이 느껴졌다.


아버지께 또 올라간다고 했건만 바로 닷새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오빠네로 가신 아버지는 말씀도 못하셨고 유동식도 거의 못 드시고 물만 겨우 조금씩 삼키다가 가셨단다. 그렇게 지독히 아버지를 괴롭히던 아토피도 이미 숙변을 빼내고 텅 빈 몸 마지막 길엔 동행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게 2001년 9월, 아버지는 그 5년 뒤 2006년 9월, 엄마와 음력 날수로는 5년 5일 뒤였다. 미운 정이 고운 정 보다 더 끈끈했는지, 돌아가신 해는 달라도 그렇게 5일 상관에 따라가시다니. 엄마는 아버지를 그렇게 당신 곁으로 가까이 불렀나 보다.


내 아버지라 힘들고 지칠 때 짜증도 부렸던 나.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버지한테 가서 사과드리라며 나를 말로 밀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 미안해 짜증 부려서~’ 한 마디에 ‘아니다, 괜찮다 괜찮아’ 하시며 바로 용서해 주시며 네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다며 나를 말로 안아주셨던 분이다. 아버지의 그 쉬운 용서는 놀라운 말이었다. 내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포악한 언행은 나로 하여금 결혼을 마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던 원인이었건만, 그런 아버지는 진즉에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내 맘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눈빛은 온화하기만 하다. 젊을 적 이맛살에 내천 자(川)가 정확히 골지게 자리했었건만 나머지 삶에서 그 골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은 고삐를 쥐고 살아온 대로 마감할 수 있는 거구나... 그렇게 달라진 아버지는 내게 온몸으로 다정함을 깊이 새겨주고 가셨다. 당신을 마감하려던 끈은 그렇게 풀어졌지만 당신과 나와의 끈은 풀어질 수 없이 단단해졌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사신 당신, 이젠 한 줌 뼛가루도 이미 흙으로 돌아가셨을 당신을 기억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내 아버지였음을. 나는 뼛속까지 당신의 신명을 닮고 당신의 슬픔을 닮은 당신의 막내딸이랍니다. 오늘도 세상이란 흙 어딘가에 포근히 묻혀계실 당신을 떠올리며 봄을 기다립니다. 흙 안에는 이미, 봄이 가득합니다.



*작은 오라버니가 부모님 입석에 새긴 시를 적었다.


'신산한 한 시대를 살아내시고 털고 가시니

풀, 꽃들 그저 함께 싹트고 피고 이울 뿐이고,

뭇 새들 그냥 지저귈 뿐입니다.


이제

살아가는 후손들이

당신들의 삶을

평범하였지만 거룩한 표징으로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비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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