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2

12. 잠버릇

by 조유상

잠이 드는 순간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

눈뜨고 있던 내가

내가 아닌 나로 빠져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되고 피터 팬도 되고 괴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곁에서 자는 이의 증언 없이 저절로, 잠과 현실의 경계에 서성이던 영혼이 가리켜준 나침반으로 꿈에서 깨어나기도 하지만, 곁에서 자는 이의 증언 덕에 꿈꾸던 내가 3D로 생생하게 입체화되기도 한다.


어렸을 적부터 내 잠버릇은 유명했다. 낮에 신나게 뛰어놀던 나는 밤에도 여전히 활발했다. 초등학교 때부터는 은행 다니던 언니랑 건넌방에서 자기 시작했는데 자다 보면 ‘별표 전축’ 다리 밑이거나 벽 끄트머리를 열심히 머리로 밀고 있곤 했다. 이부자리 탈출은 흔한 일이었고 언니 가슴팍이고 얼굴이며 하체에 다리를 척척 걸치는 바람에 언니를 숨통 막히게 하는 건 예사였다. 마음도 몸도 자유분방형.


게다가 이빨도 뿌득 뿌득 갈아댔고 잠꼬대까지, 아주 고루 작작 삼박자를 다 갖춘 망나니였다. 물론 매일은 아니었어도 잠꼬대가 다반사라 엄마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연애도 열심히 했던 나인지라 엄마 왈, ‘너는 결혼하면 비밀이 없어야 할 거다’(꿈에 뭔 요상한 남자 이름이라도 부를까봐^^)라고 하셨다.


36, 39 나이에 결혼하기 전, 나는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자랐으니 연애 경력 화려했음도 신랑에게 다 커밍아웃했다. 아, 물론 진짜 서글픈 사랑 얘기 한 둘쯤은 나도 비밀 주머니에 꽁꽁 숨겨뒀지만, 그게 혹여 자다가 방귀 새듯 피시식 새어 나온다 한들 결혼 30 년 차에 뭔 상관이겠는가? 결혼 한 이후로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살았으면 됐지, 뭐 하고 배짱 좋게 생각한다. 그도 그렇게 말했다. 아무려면 어때? 지금 나랑 사는데! 캬아, 나는 신랑의 그런 자뻑에 뻑갔다. 뭐지, 이 남자? 키도 나랑 똑같으면서 자존감만은 전봇대만큼 길고만.


그런 그랑 사는데 내 잠꼬대가 별문제가 되진 않았다. 왜냐? 그는 누우면 똑 딱 똑 딱.. 거의 삼십 초 안에 바로 벌크 업된 코 골기 삼매경에 들어서니까. 휴, 이런 걸 천생연분이라 해야 하나? 나는 그의 코골이 덕에 삼십 년을 꼬박 곁에서 잠을 설쳤다. 떨어져 자면 되는데 우린 그걸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쉽게 잠이 드는 사람이 못 되었고 그걸 자장가 삼기에 내 귀는 참으로 예민해 귀마개로도 소용이 없었는데도 나의 수행력 레벨이 참 높구먼. 그렇다고 돌아누울 때 걸리적거리니 헤드폰을 끼고 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간신히 잠이 들어서는 다른 세상으로 뿅~ 넘어가는 거다. 물론 깜빡깜빡하는 사이 그가 나의 잠꼬대를 듣긴 한다만 자고 나면 잠꼬대한 사실만 남고 내용은 이미 기억 상실증에 걸린 연후라 나는 바로 무결해진다. 요런 깜찍한 완전범죄 스릴러물을 밤이면 더러 찍는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부터 자면서 방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버릇은 멈추었고 다행히 세상에 이빨 갈 일도 줄어들었는지 그 버릇도 사라졌다. ‘이제 그만 방황하시죠?’라고 한 그의 프러포즈 덕분이었으려나? 마음속 으등그러졌던 일들이 한없이 넓은- 간혹 밴댕이 변신을 하긴 한다만- 남편 품을 만나 그럴 일이 없어졌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물론 매일은 아니지만 잠꼬대만은 포기가 안 되나 보다. 게다가 나이 들면서 심하진 않지만 코골이마저 생겼다. 전에 엄마한테 코를 곤다고 알려주면 펄쩍 뛰며 누굴 살해한 추궁이라도 받는 양 시치미를 떼며 녹음까지 증거자료로 요구하던 엄마를 떠올리는 나는, 시크하게 금방 인정해 버렸다. 나도 어쩔 수가 없군, 나이 인정, 항복.


내 잠꼬대를 엄마가 걱정한 이유가 있다. 절대 웅얼거리지 않고 평소와 너무나도 똑같은 어조로 또박또박 실감 나게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험 삼아 엄마가 잠꼬대하는 내 이야기를 받아주면 비몽사몽간에 우리는 꿈속 소통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잘도 주고받다 어느 틈에 물론 뿌연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와 깨서는 서로 빙긋 웃곤 했다. 뭔 꿈을 그리 찰지게 꾸냐며...


벼락 맞을 확률이지만 노래를 한 적도 있다. 춤은 안 췄나 모르겠다. ‘라라랜드’를 보고 나서도 아직까지 이런 증언은 다행히 없었고 몽유병도 나타나진 않았다. 휴, 몸가짐은 제법 조신한 상태군.



지난달 45년, 아니 이제 46년 된 절친이 왔을 때도, 얼마 전 조천 친구 집에 눈 많이 온 날 치킨 사 들고 가서 잔 날도 어김없이 잠꼬대 퍼레이드였단다. 희한하게 전에는 내 잠꼬대에 스르륵 눈이 떠지면서 잠꼬대하는 나를 또 다른 내가 흔들어깨우는 통에 자각할 수 있었는데 요새는 거의 꿈 기억상실증에 걸렸나 보다. 오직 곁에 자던 사람의 증언만이 진실이다. 내 절친은 ‘유상이는 어쩜 꿈에서도 그렇게 생생히 현실처럼 말하냐며 깔깔대고 재밌어했다. 조천 친구는 가뜩이나 잠을 설치는 친구라 잘 때면 휴대폰으로 살짝 뭘 틀고 있어야 한다는데 내가 그날도 어김없이 잠꼬대를 해서 너무 무서웠단다. 신기한 건 친구가 틀어 놓은 휴대폰의 작은 소리는 나도 다 듣고 잤다는 사실! 우리가 베트남도 열흘간 여행한 사이고 더블베드에서 낮은 코골이도 주고받았건만 그땐 많이 걸어 다녔는데도 내 유명한 잠꼬대 맛을 안 봬줬나 보다.


그날의 잠꼬대는 책 읽기였단다. 아주 선명한 목소리로 한참 책을 읽고 있어서 혼자 바들바들 떨며 깨우지도 못하고 있었는가 보다. 뭐, 납량특집이라도 읽었어?그럴 땐 그냥 흔들어깨우면 되는데, 쩝.


아마도 그날 친구네서 정여민이라는, 영재발굴단에 발탁된 천재적인 시를 쓴 아이, (그렇게 수줍던 산골 아이가 현재는 188센티 늘씬한 키에 멋지게 모델을 꿈꾸고 연습 중이다) 이야기를 TV로 보고 시를 들으며 감동받고 감탄하다 막 잠이 들어서 그 잔상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엉뚱하게 꿈속 책 읽기라니... 기발하다.


나의 꿈, 나의 잠꼬대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가. 나는 자다가 남을 재미있게도 하고 무섭게도 하는, 신기하고 나도 모르던 재주가 있구나.




말 나온 김에 정여민이 쓴 시집 제목이기도 한 에세이 한 편을 소개한다.



<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여름의 끝자락에서 바람도 밀어내지 못하는 구름이 있다.

그 구름은 높은 산을 넘기 힘들어 파란 가을 하늘 끝에서 숨을 쉬며 바람이 전하는 가을을 듣는다.

저 산 너머 가을은 이미 나뭇잎 끝에 매달려 있다고 바람은 속삭인다.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집에는 유난히 가을을 좋아하고 가을을 많이 닮은 엄마가 계신다.

가을만 되면 산과 들을 다니느라 바쁘시고 가을을 보낼 때가 되면 ‘짚신나물도 보내야 되나 보다’ 하시며 아쉬워하셨다.

그러시던 엄마가 2년 전 가을, 잦은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해보라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 가족들은 정말 별일 아닐 거라는 생각에 오랜만에 서울구경이나 해보자며 서울 길에 올랐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암 3기’라는 판정이 나왔다. 꿈을 꾸고 있다면 지금 깨어나야 되는 순간이라 생각이 들 때, 아빠가 힘겹게 입을 여셨다. 혹시 오진일 가능성은 없나요? 평소 기침 외에는 특별한 통증도 없었는데요.

무언가를 골똘히 보던 그때의 선생님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소를 보이셨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빛이 차단되는 것 같은 병원을 우리는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도 우리의 시간은 멈추고만 있는 것 같았다. 집에 오는 내내 엄마는 말을 걸지도, 하지도 않으며 침묵을 지켰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토할 것 같은 울음을 저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내었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나 안타까워 나도 소리 내어 울었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겨야만 하는 것일까?

엄마는 한동안 밥도 먹지 않고 밖에도 나가시지도 않고 세상과 하나둘씩 담을 쌓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엄마는 어느 날, 우리를 떠나서 혼자 살고 싶다 하셨다. 엄마가 우리에게 짐이 될 것 같다고 떠나신다고 하셨다. 나는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엄마는 그러면 여태껏 우리가 짐이었어?

가족은 힘들어도 헤어지면 안 되는 거잖아.

그게 가족이잖아.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내 눈물을 보던 엄마가 꼭 안아주었다. 지금도 그때 왜 엄마가 우리를 떠나려 했는지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

마음속 온도는 몇 도일까요?

너무 뜨거워서 다른 사람이 부담스러워하지도 않고, 너무 차가워서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도 않는 온도는 ‘따뜻함’이라는 온도라 생각이 든다.





시 한 편도 같이 소개한다.



소리가 있는 겨울


내 마음속에 소리가 있는 겨울이 앉는다.

아궁이의 시뻘건 장작불 속에

고구마를 안겨주고 군고구마를 기다리는 소리


하얀 눈이 소리 없이

우리 집 마당을 찾아올 때

추억이 만들어지는 소리



지붕 처마 끝에 달린 뾰족뾰족 고드름이

겨울 햇살을 만나는 소리


얼음물 내려오는 개울가에

버들강아지가 봄 냄새를 맡는 소리


내 마음속에 소리가 있는

겨울이 있어 행복하다





어떠신가요? 혹시 울고 계신 건 아니신지.

책 읽기를 잠꼬대로 할만했겠쥬...?



#잠꼬대 #잠버릇 #코골이 #잠꼬대 소통 #정여민 #정여민 시 #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https://youtu.be/IpYkFE6fNCE?si=9bY9dhruHzo2TF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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