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2

10. 배추 두 포기

by 조유상

토박이 농사꾼들은 대개 무조건 좋은 건 팔고 남는 걸 먹는다. 대장간 집에 식칼 없다는 식이다. 언제부터 그리되었을까. 때깔 좋고 잘 생긴 건 우선 팔 거라고 옆으로 골라둔다.


귀농 1호인 친구 덕에 배운 게 있다. 자기네가 방앗간에 참깨 농사지은 걸 들고 가서 기름 짜달라고 하면 먹을 거냐 팔 거냐 묻는단다. ‘저희가 집에서 먹을 건데요’ 하면 아니, 참기름은 팔고 들기름을 먹어야지 하며 의아해하신단다. 참기름은 들기름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다.


참깨는 들깨보다 농사 기간이 짧다. 장마 때를 잘 피해야 하는데 보통 5월 중하순에 심어 8월 중순, 늦어도 9월 중순 이전에 수확하게 된다. 자칫하면 장마에 수확시기가 맞물려 하우스가 없는 상태에서 말리다 비라도 쫄딱 맞히면 싹 나는 건 순식간이다. 성질이 급한 놈이다. 씨를 뿌리고 비닐 씌워놓고 보면 보통 2,3일이면 뾰족뾰족 싹 나오는 게 보인다. 그럼 바로 뚫어줘야 한다. (요샌 아예 비닐에 씨앗을 두세 알씩 붙여서 팔기도 한다만 우린 그렇게는 안 해 봤다.) 애기 땐 다 그렇긴 하지만 뿌리도 새순도 유독 여리다. 그런 참깨는 옆으로 가지치기해서 버는 게 적다 보니 수확도 적고 자칫하면 쭉정이도 많다. 수확량이 들깨에 비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나? 아니면 고소함의 차이 때문일까?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참기름 들기름 다 농사지어 먹었지만, 들깨가 더 몸에 좋다고 들어와서 고소함의 차이를 느꼈을 뿐 참기름이 우월하다 느낀 적은 없다.


새 나물에는 보통 참기름을, 묵은 나물에는 들기름을 쓰는 게 더 어울리긴 한다. 이렇듯 쓰임새가 다르지만 보통 기호에 따라 참기름 파와 들기름 파로 갈리기도 한다. 어차피 입맛은 어릴 때부터 먹어온 습관에 따라 제각각이니까.


친구가 그렇게 방앗간에서 갓 짜온 참기름을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을까? 가을 겨울 작물로 김장거리를 심는다. 무와 배추 등은 8월 중순부터 파종하고 쪽파는 일찍 먹을 것과 나중 먹을 거로 나눠 심는다.(먹다 남으면 통통한 놈을 골라 이듬해 5월 경 씨로 남긴다.) 농사지어 팔고 남는 걸로 김장하는 게 수순이었다. 그해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남편이 꽉 찬 게 별로 많지 않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밭에 가보니 거의 매년 그랬듯이 포기가 실팍하진 않았다. 미리 주문받은 것도 있어서 얼추 헤아려 보고 나서 잠시 망설였다. 그날은 뭔 배짱인지 보기에 실한 놈으로 두 포기를 뚝 잘라 가슴에 뻐근히 안고 돌아왔다. 남편이 의아하게 쳐다보기에 “우리가 좋은 놈으로 먼저 먹어보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 튼실한 놈들 두 개를 뻐개 절여 김장 전에 지레김치를 담갔다. 그리고선 “이제 다 팔아도 괜찮아!” 말이 그렇지 다 팔리지도 않으니 우리 먹을 거야 헐한 놈으로 수두룩이 남게 마련이다. 늘 농사지어 파는 데 급급하다 보니 정작 식구들한테는 소홀한 기분이었는데 배추 두 포기로 담근 김치 덕에 그간의 갈급증이 몽땅 다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속이 다 시원하고 흐뭇했다.


쌈채며 아스파라거스, 옥수수도 그랬다. 농사지으며 가장 신선한 걸 먹을 수 있는 자유와 선택권, 특히 옥수수를 따자마자 바로 소금간만 조금 해서 쪄 먹을 때의 그 고숩고 달짝지근하고 찰진 맛은 정말 최고다. 하루만 지나도 껍질 안 습도가 달라지는 걸 느낀다. 그런 특권이야말로 농사짓는 맛 아니겠는가. 포기할 수 없는 맛은 바로 밭에서 직접이다! 이 맛을 느끼고자 한다면 농사를 지으시라! 아니면 근처에 농사짓는 지인을 두시든가. 화학비료 먹여 퉁퉁하게 살찐 거? 쿠팡의 당일 직배송? 노노! ㅎㅎ



기분 문제였다. 언제나 농사짓는다고 우리 자신을 뒷전에 놓고 생각하는 거. 그걸 당연시하고 묻지도 않고 따라 하다가 더는 하기 싫었던 거였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고혈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50대 중반? 아직 젊다고 생각했을 때인데 어느 날 무슨 약을 입에 털어 넣는 걸 보게 되었다. 무슨 약을 먹어요? 했더니 고혈압약이란다. 왜일까, 이 남자, 아내에게 도통 그런 얘기를 안 한다. 아니, 얼마나 높다고 지금부터 고혈압약을 먹어요? 하면서 나는 그 약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 땀 흘리고 짭짤하게 먹고 물 자주 마시고 하면 되지. 그랬는데 어느 해 겨울부터 자고 일어나면 뒷목이 뻣뻣하고 힘들단다. 아차 싶었다. 이러다 쓰러지면 안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고혈압약을 다시 먹게 했고 농사지은 양파로는 무조건 팔 거 생각하지 말고 일 년 동안 먹을 만치 양파즙을 짜 먹으라 했다. 당신이 우선이지 파는 건 그다음에 남으면 생각하자고.


몸의 건강을 잃고 나면 삶의 질은 말할 수 없이 떨어지는데, 건강만 이럴까, 우리만 이럴까. 몸 살피는 데에도, 감정 살핌에도 내 감정이 우선인데 남의 사정 보아주다가, 남의 감정 보살피다 정작 나를 놓치고야 마는 일상이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고 해서 모든 걸 다 그렇게 깔끔하게 끊어내진 못하지만). 일단 가장 이기적으로 생각하자, 그렇지 못하고 산 세월은 이미 지나갔으니 붙잡아 세울 수도 울어도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 달라져 보자고.



참, 그 배추가 뭐라고. 하고 보면 별것도 아니건만 왜 그동안 그리 전전긍긍했을까. 먹을 것뿐 아니라 집에 손님이 불시에 언제고 오는 집이라 거의 손님 우선으로 산 것 같다. 그러다 비폭력대화를 배우고 배운 걸 실천하며 가장 이기적으로 생각하기가 조금씩 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식구는 늘 뒷전이 아니라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느끼는 것을 먼저 알아주고 돌보고 나서도 이웃과 충분히 따뜻하고 다정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