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2

14. 덜 왔어

by 조유상

지난주 집에 도착한 다음 날 오전 11시부터 2시까지 의료사협 바자회가 열렸다. 남편은 같이 가자고 몇 번이나 말하는 게 아닌가. 제주에 내려온 이후 어쩌다 홍동에 오면 아주 가까운 몇몇 지인들만 살짝 만나고 갔던 나. 아직 제주에서 몽땅 짐 싸서 올라온 게 아닌 까닭에 사람들 만나러 가기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는 게 우선 부담이었다.

결혼 초 7, 8년간은 어디든 같이 다니는 게 자연스러웠는데 10여 년 지나고 보니 결혼식이고 어디고 같이 가자고 잘 안 하기에 이젠 왜 같이 가자고 안 하냐니까, 결혼식 부조금 그거 조금 하면서 둘이 다니기는 좀... 하는 게 명목이 좋은 핑계였겠지만 살다 보면 둘이 꼭 붙어 다니던 시절이 지나면 심드렁해지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잖은가. “사랑이 식었남?” 하고 물었지만, 물으나 마나 뜨겁던 사랑은 나나 그이나 식은 게 맞고 사랑보단 일상의 밥 같은 믿음과 동지애로 살 때가 된 거였겠지.


그렇게 적당히 밍근해진 사랑으로도 우린 참 잘도 살아간다. 뜨겁진 않아도 싸우고 삐지고 알콩 달콩도 했다. 그러다 일 년 넘게 제주살이를 하다 보니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언니(혹은 관계에 따른 명칭과 이름으로) 언제 와요?”라고 묻는다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올 거니까 커밍아웃하자는 거였겠지. 물음에 종지부를 찍을 나를 아예 실물로 보여주는 게 백문이 불여일견일 테니까. 그래, 어차피 마주칠 사람들 마주치자 싶어 가기로 했다.

망설임을 접게 한 또 다른 이유도 물론 있다. 우리 동네에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의료생협이 있다. 의료생협은 내가 3년간 여농센터 대표일을 맡고 있을 때부터 지역에 보건의로 와 있던 젊은 의사 선생님이 와서 의료생협 만들기를 의논하곤 했었다. 벌써 15년쯤 전 일이었다. 그러다가 2015년부터 많은 이의 후원과 지지로 개원을 한 뒤 다정한 진료가 시작되었다. 지금 그 뜻깊은 일을 하던 의사가 아파 수술을 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길게 입원하고 있다. 좋은 뜻을 가진 의사가 여럿, 아니 둘이라도 됐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 명이 많은 환자를 커버하기엔 어려운 노릇이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문이 닫힌 의료생협을 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마을에서 돌봄을 받던 수동적인 대상에서 이제는 그 의사를 돌보는 데 눈을 돌리고 마음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돌봄이 선순환되고 있으니 아름다운 병원 아니겠는가.


우리가 아끼던 젊은 의사의 병원비를 1,2차에 걸쳐 3주 만에 순식간에 총 303명이 참여해 십시일반 6천4백여만 원을 모았다고 한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이다. 역시 한다 하면 하는 마을 사람들. 뜻이 세워지면 마음을 모으고, 마음이 모이면 기껍고 다정한 일들을 자랑 없이 차근히 만들어 간다. 이후로도 의료사협을 살리기 위한 101가지 활동이란 명목으로 기부 혹은 일부 기부를 해 준 물품과 음식들 등, 수 없는 손길과 마음이 길을 만들어 달리고 있고 그 달리기는 숨차지 않다. 서로 즐겁게 다독이며 나아가는 중이고 경쟁하지 않고 격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밥그릇에서 한 술씩 덜어 한 그릇을 만든 그런 바자회였던 까닭에 내 쑥스러움보다 의미와 참여가 먼저이기도 했다. 그래서 살그머니 동참한 것이다.


울 며느리가 결혼하기 전 한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인싸’란다. 2,30대 언저리에 학교고 어디서고 늘 아웃사이더를 자처했고 사실이 그러했기에 며느리 표현이 무척이나 생소했다. 마을에서 조용히 농사짓고 살다가 여성농민들과 지역여성들과 으쌰으쌰 하던 일을 3년 맡았던 까닭에 그러했겠지만, 그 이후로 남들이 뭘 하라고 권해도 다 마다하고 조용히 농사짓기로 돌아왔다. 숨 돌리며 꽃밭 가꾸고 농사를 지으며 하고 싶은 일을 했던 50대 중후반 이후 일을 벌이지 않았다. 잠시 열심히 몸담고 했던 슬로푸드 매니저 활동도 멈추고 정농회 일도 멈추었다. 슬로푸드 매니저보다 슬로라이프를, 정농회일 보다 바른 먹거리 농사를 짓는 일이 즐겁고 편안했다. 관계 사슬에 얽매어 복잡해지기보다 단순한 삶이 절실했다.

조용히 산다는 기쁨을 아는가. 늘 무언가를 하고 관계를 맺지만 소수일 때 편안하고 가장 나다운 걸 아는 나. 그런 암띠고 숫기 없는 나 자신의 다른 얼굴로도 이미 살아봤기에 지금의 나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친한 소수를 아끼고 사랑하며, 다수와 헐렁한 관계를 갖는다. 그들과는 웃으며 가벼운 말을 주고받으며 지나칠 수 있을만큼의 따뜻한 온기 머무는 정도로 족하다.

이번 바자회에 가서 그런 따스함을 만나고 돌아왔다. 어떤 이와는 격한 포옹을, 많은 분들과 따뜻한 포옹으로, 때론 더불어 손을 잡고 방방 뛰기도 하고, 나를 안고 뱅그르르 굴리기도 했다. 어떤 이와는 눈인사와 손잡기, 혹은 목례로... 돌이켜 봐도 그 바자회 자체만으로도 이미 따뜻해서였겠지만 사람 냄새나는 살만한 동네임을 훈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 제주에 와서도 몇몇과는 살갑고 따뜻한 친구의 연을 맺을 수 있었다. 사람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아, 마음속에 가진 공감 주머니를 꺼내 놓으며 햇살에 속살거린다. 여기 제주에서도, 내 집이 있는 홍동 땅에서도 나눔과 주고받음이 일상이고 기꺼이 자기를 내어놓는 훈훈함, 그게 있다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제주 괸당 문화, 사실 별로 두렵지 않다. 이미 시골에서 살아봤으니까.


물론 내가 살던 터전, 홍동 마을이 갖는 장점이 있다. 마을 한 사람 한 사람이 맞이하는 환대가 눈부시다. 뭉클하게 그리움이 가슴에 콱 박힐 때면 나도 모르게 바다를 보면서도 멍해지곤 했다. 윤슬처럼 빛나던 그리움은 멋진 자연풍광을 가끔 이겨먹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빛나는 존재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에게 언제 (아주) 오냐고 묻는다.

“이제 완전히 온 겨?”

“아직 덜 왔어. 금방 올 겨.”

대답하는 내 속에 이미 가만히 초록이 움트고 있다.


제주의 아름다움은 나를 여전히 붙잡아 매어 두고 싶어 한다. 아니지, 내가 스스로 매여 있고 싶어 하는 격하게 아름다운 코드로 무장하고 있다. 아니, 매번 자연은 나를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숲이 아름다웠던 남원읍에서 6개월 다정했고, 죽을 만큼 힘든 일을 겪고 나서 조천읍으로 이사했다. 시원한 언덕배기 가정집에서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구름과 저녁노을 미술관을 관람하며 조용한 마을에서 6개월 정겨웠고 충분히-아니, 좀 부족하긴 해- 고독했다. 어디서든 바다는 멀지 않았다. 이제는 제주 시내 한복판으로 와 보일러 소리 빼고는 적막하고 고요해 고독사해도 모르겠다 싶은 조용한 집에서 주차난을 겪으며 한 달 남짓 시간이 흘렀다. 일 년 남짓 제주 살면서 내 인생 내내 이사한 만큼 옮기며 지냈다. 삶의 터전만큼 다양했고 다른 빛들을 만나며 살았구나. 어우러진 무지갯빛 속에 어느 순간에도 영롱했다.


깔때기를 꼽고 시간을 주르륵 흘려보내 한 병에 담아두듯 제주에서 내가 보낸 시간이 보듬어졌고 끝나간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아스팔트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도시로 온 까닭에 내가 다시 살던 터전으로 발을 돌리기가 더 쉬워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창을 열면 바로 툭 터진 자연을 고파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다. 내가 자연이지만, 창을 열어 이웃집 이층 벽이 보이는 공간 안에서 나의 상상력은 벽을 만나 가난해지는 느낌이다.

설맞이해 홍동 집에 들어서며 너른 빈 마당, 그 빈터가 반가웠다. 우묵우묵 서 있는 잎 떨군 나무들이 그리웠고 내가 가꾸었던 식물들이 낮게 엎드려 숨 쉬는 그곳, 크리스마스 로즈가 살짝 얼먹은 얼굴로 초록초록하고 수선화가 감나무 아래, 목련 그늘 아래 뾰조록히 얼굴 내밀고 있는 우리 집 마당. 냥이들이 뛰어다니는 뜰이 몹시 그리웠나 보다. 이런 내 마음의 움직임이 나도 놀라웠다. 이번에 집에 가서는 돌아올 걸 염두에 두고 부엌살림도 일부 정리하고 바깥에 어질더분하던 것도 버릴 거 버리고 정리하는 나를 보며, 아, 돌아올 때가 되었구나 싶어졌다. 언젠가 다시 제주로 내려와 오래 머물 때도 있겠지만, 당장은 갈 때가 되었다는 걸 몸으로 느꼈던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올라갔을 때, 홍동 집에도 완연한 봄날이었다. 한동안 몹시 추웠다던데. “내가 제주에서 봄기운을 업고 안고 왔네!” 하며 흥분된 생색도 내 보았다.


남편은 내가 재작년쯤 슬쩍 말했던 걸 기억하고 덜꿩나무를 강전정해 반쯤 캐놓고 옮기자고 나를 불렀다. 나무를 학교 앞쪽 뜰로 옮겨 심고는 삐죽 나온 작은 가지 두 개를 포기 나눔 해 근처에 심었다. 두어 조루 물을 담아 흠뻑 먹여 주고 꼭꼭 밟아주었다. 담벼락 가까이 붙어 무성히 뻗었던 삼색버들도 내 부탁에 그가 시원하게 가지치기를 해 주었다. 남편이 같이해 주니 번개같이 일이 수월하고 신이 났다. 내가 올 거라고 선심 썼는가, 여하튼 고마운 일이다.

반가움이 사는 터전이고 힘이다. 돌아갈 집이 있고 돌아가면 반겨줄 식구가 있다는 정겨움이 일의 무거움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나는 아직 집에 덜 갔는데, 마음 1/3은 여기 제주에 툭 떼어 묻어두고 갈 텐데...


다가오는 봄, 다시 시간을 쪼개어 살게 되겠구나. 아직 나는 젊은가?! 일에 치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용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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