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엄마 좀 빌려주세요!
2023년 7월 30일 기록
큰아들이 어느 날 집에 와서 우릴 모아놓고 말한다.
자기네 부부가 지리산 여행을 10일간 가는데 그동안 나더러 집을 좀 봐달란다. 것도, 와서 살면서. 지리산 종주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거고 마침 며느리가 돌아가신 어머니 유골을 가지고 살다가 유언대로 지리산에 드디어 뿌려드리기로 했다면서. 저희들끼리 산행하고 마지막 3일은 자기 아빠랑 만나 같이 유골을 뿌려드릴 예정이란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둘 다 얼굴을 마주 보며 잠시 뻘쭘해졌다. 근데 집이 먼 것도 아니고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거린데 굳이 가서 잘 필요까지 있을까? 그냥 가끔 선풍기나 에어컨, 제습기 정도만 틀어주고 제습기 물만 버려주면 안... 될...까? 하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자기네 집이 좀 습하고 이상해서 사람이 사는 것과 안 사는 게 차이가 나 여름에 며칠 여행 다녀오고 나면 확 나빠지는 게 느껴진단다. 이건 뭐지... 하며 마음속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치며 시간을 벌고 있는데, 아들이 불쑥 "아빠, 엄마 좀 열흘간 빌려줘~(아, 모야, 내가 물건이야? 빌리는 값은 누구한테 주는겨?), 엄만 열흘간 휴가 간다 치고."
'휴가?'라는 말에 살짝 흥분되고 거기 발라진 달콤함을 쪽 빨아들인다. "응, 알았어~. 대신 집 지저분하게 하고 엄마 일거리 남겨놓고 가면 안 갈 거다." 으름장 거래를 했더니, 흔쾌히 알았다, 걱정 말란다.
며느리의 남편인 아들네라 생각하고 애들 동거할 때는 물론, 결혼 전후로 초대하지 않으면 단 한 번도 불쑥!은 삼갔었는데.
머릿속에 빈 공간 하나가 신선하게 자리 잡는다.
공간이동에 부식 잔뜩 싸놓고 돈까지 준다고 하니 엄청 달달한 부탁이었다. 돈은 됐고 집만 잘 치우고 가면 돼. 텔레비전, 컴, 넷플 모두 실컷 볼 수 있고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있으란다. 친구들 불러 놀기도 하라니 말 한마디가 주는 자유가 고맙다.
보통 며느리들은 자기 시어머니한테 집 봐 달라고 절대 안 할 텐데, 우리 며느리는 “어머니가 와서 계신다니 너무 좋아요~”한다. 이쁜 녀석. 옷 사이즈도 자기랑 같으니 자기 거 편하게 입어도 된다 하고. 그 모든 말이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안 그랬음 조심조심 살얼음 느낌이었으련만, 좌우간 나는 2인용 밥솥 산 거랑 반찬 한두 가지 들고 책이랑 첼로도 들고 눈누난나 아들네로 휴가를 갔다. 밥은 딱 두 번만 해 먹었다. 아침 생략이므로 혼자 한 번 해서 이틀 걸쳐 먹고. 한 번은 친구들과 휴대폰 가방 뜨개질할 때 해 먹었다. 저희가 놓고 간 5만 원으로는 친구들과 밥도 사 먹고 현관문 앞 말벌집을 발견하고 무서워 에프킬라도 샀다. 화장실 실내화 하나가 닳아 미끄럽기에 다이소 슬리퍼도 하나 샀으니 다 썼네.
밥에서의 해방, 일에서의 해방을 아들이 선물로 주고 싶었나 보다. 고맙다.
아들은 코골이가 심해 서로 침대를 따로 쓰고 있다. 나도 이젠 좀 그러고 싶은데 아직도 그걸 실천 못하고 넘 오래 붙어 산 거 아냐? 심하게 코 고는 남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잔 세월이 빠른 필름으로 돌아가며 살짝 욱하네. 애들이 나더러 아무 방에서나 자란다.
사실 첫날과 이튿날은 잠을 설쳤다. 낯섦은 두려움도 몰고 와 현관문을 잠그고 잤다. 우리 집에는 대문도 없고 외출할 때도 오래 외출할 때 빼고는 문을 잠그지 않고 살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그냥 시골 사람인 거다.
여긴 화장실 구조도 다르고 해서 잠결에 넘어질까 봐 화장실 나가는 곳엔 10일 내내 불을 켜놓고 잤다. 첫날과 이튿날은 며느리 방 넓은 침대서 자다 설쳐 아들 방 싱글침대로 왔다 갔다를 두어 번 했더니 몽롱했다. 익숙함과 편안함이 동전의 앞뒤구나 하며 내 집이 살짝 그립기도 했다.
셋째 날은 막둥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온다고 아빠를 나한테 유배^^ 보냈다. 해서 저녁은 큰아들이 만들어 두었던 짜장에 내가 해 놨던 찬밥을 넣고 끓여 먹었다.
저녁 먹고 나서 심심한지, 아니면 내게 잘 보이고 싶었는지 롯데마트나 갈까 하길래 선선히 따라나섰다. 늦은 저녁 마트 데이트, 나쁘지 않았다. 롯데마트 가기 전, 새로 생긴 주공 앞 엔마트 가서 과일과 불량식품 몇 개 사들고 돌아왔다. 나만의 비밀공간에 들어온 남편과 모처럼 찐한 밤을 보내고 담날은 아침 생각 없다기에 안 먹고 점심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고 그를 집에 태워다 주니, “안 들어가?” 한다. 응, 바바이~ 칼큼 냉정하게 웃으며 들여보내고 목마른 식물들 물만 주고 내 휴가처로 돌아섰다.
내내 휴가였으면 좋으련만 중간에 꾸러미가 걸려 월화수 내내 꾸러미 일하느라 집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게, 뭔가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통 트여 신바람 나게 일하고 돌아오곤 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아들네서 일도 했네. 아들이 집 설명을 하며 세탁기랑 세제 얘기하는데 딱 보니 빨래가 두 보따리나 뭉쳐져 있었다. 안 해도 된다지만 이 습한 날씨에? 하며 애들 보내고 들어오자마자 해서 다 빨아 널었다. 후~ 시원하다. 얘들이 부탁했던 식물도 정리하고 분갈이도 두어 개 했다. 집 앞 지저분한 쓰레기도 눈앞에서 말끔히 치워버렸다.
오던 뒷날 바로 애들 집 텃밭(시들비들한 토마토랑 무성한 부추만 있지만) 풀이 더 많아 집에서 들고 온 톱호미랑 낫으로 풀을 시원하게 처리했다. 나한텐 손바닥만 한 텃밭이지만 농사에 관심 없는 큰아들한텐 큰가 보다.
사실 저 건너편 기다란 비닐하우스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건물 바로 앞이 우리 집이니 엎어지면 코 닿기...엔 쫌 먼가?ㅎㅎ 고만큼 가깝다.
‘고지가 바로 저기다’ 하며 거진 다 풀을 진압해 들어가는데 장갑 안 끼고 하다 왼손 검지를 샥 베여 피가 뚝뚝 흐른다. 에이, 이제 그만하라는가 보다 하고는 남겨둔 거 저희들 보고 하라지 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들 며느리 방 이불을 썼으니 그런 건 당연히 빨아놓고, 집안청소 정도만 하고 최소한의 일만 하고 놀았다.
책 보고 영화 보고 유튜브 보고 첼로하고 음악 듣고 춤도 추고. 뜨개질 좋아하는 삼인방 모여 휴대폰 가방도 뜨고 밥도 해 먹고 맘껏 놀았다.
아들 며느리야, 고맙다. 엄마 맘과 몸에 쉼표 하나 똑 찍고 갈 수 있게 해 주어.
잘 다녀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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