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떡잎부터 다르다? #1 큰아들 떡잎
엄마한테 들은 말 중 이해 안 가는 말 하나, '저 두 녀석을 주물떡주물떡해서 반 딱 나눴으면 좋겠다'.
세상 재미없는 부모 편의주의 아닐까?
어머니 자궁이라는 생명의 집에서 나온 아이들이지만 둘 혹은 여섯이나 일곱이어도 같은 녀석이 하나 없다. 그 다름이 신비일 따름이다. 그걸 어찌 고무찰흙도 아니고 밀가루 반죽도 아닌데 주물떡거려 그램 수 나눠 반으로 딱, 가르나. 우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아이 키울 맛도 나지 않는다. 그냥 공장에서 틀에 탁탁 찍어내는 거지. 우주의 미립자도 달라지는 시간과 분위기, 서로 다른 영양 상태, 감정의 흔들림이 다 다른 흐름 속, 아주 미세한 유전자 하나라도 다르게 만들어져 나온 게 우리 아닐까? 또 그게 자식들이고.
엄마들이 그런 말 할 때의 심정에 가 닿을 수는 있겠다. 특히 속상할 때. 어느 자식은 멀쩡하게 잘 헤엄쳐 살아가는데 다른 자식 하나가 희한하게 빼다닥하거나 맘에 들지 않을 때 그 둘을 합쳐 조물조물하고 싶어 한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나 역시 아들 둘을 키우며 목소리 높인 적 왜 없었겠는가. 흔히 아들 둘 키우면 엄마가 조폭 마누라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비슷한 지경까지 간 적은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해도 갔다.
큰아이는 유독 호기심 천국이었다. 일하는 동안 낮잠 재우려고 시골 툇마루에 동네 친구가 애들 컸다고 물려준 흔들 그네를 두었었다. 잠시 안전벨트로 비스듬히 앉혀 놓고 단추를 누르면 자동으로 흔들어주며 노래가 나온다. 부지런히 부엌과 마당을 들낙거리며 일하다 자나 하고 슬쩍 보면 그 그네에서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노래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나 위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안 잔다, 안 자. 노랫소리는 자장가가 아니고 자명종이었다.
신혼 첫 집 부엌은 나의 초 처먹을 낭만 덕에 가마솥은 놔둔 채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남기고 어설픈 입식으로 바꾸었다. 슬쩍만 개조해 만든 셈이다. 거기서 우리가 젤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오디오. 당시로선 제법 우리 살림 중 그나마 비쌌던 인켈. 전에 사 모았던 LP판을 친정집에서 가져왔고 오디오를 놓고 듣던 음악들. 테이프도 제법 있었다. 녹음해서 듣기도 했는데, 노래가 그 테잎에서 나오는 걸 알게 된 큰아들은 테이프마다 어린 손가락을 집어넣거나 젓가락으로 돌돌 돌려 여차하면 테이프를 줄줄이 끄집어냈다. 테이프를 끌어내는 게 마치 자기의 할 일이라도 되는 양 신나했고 허리띠도 좋아했고 기다린 끈이라면 무엇이건 좋아했다. 말도 못 할 때라 주의를 줘도 소용없으니 아예 테이프 몇 개는 늘 놀잇감으로 놔두곤 했다. 줄줄이 풀려 나온 걸 아이가 안 볼 때 혼자 볼펜으로 다시 감아 두면 또 다음날 풀어두는 식이었다. 그렇게 끈이란 끈은 다 좋아했는데 정작 가방끈은 짧아 아들 둘 다 고졸이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일단 부엌에 들어오면 자기 눈높이에 맞게 싱크대 부엌 밑 장을 두 손으로 좌악 연다. 그리고는 프라이팬이며 냄비를 하나하나 다 끄집어낸다. 서랍도 열어보고 꺼내고. 이 또한 매일 반복되는 시지프스 신화의 한 장면이다. 나중엔 너무 지쳐 여는 장은 손잡이를 노끈으로 묶어두기도 했다. 호기심에 반창고가 아니라 호기심에 노끈으로 묶인 장, 아들아 미안하다. 엄마도 고달팠단다.
그뿐인가? 기어 다니며 뭐든 코딱지만 한 거라도 발견하면 일단 만져보고 입에 넣고 뱉었다가 눌러보고 요리보고 조리보고. 오감을 총 동원해 필사적으로 알아내려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저거 저거... 나 닮았다. 피가 어디 가겠어? 그렇게 애기때부터 조리도구를 탐구하더니 그래서인가, 요리해 먹는 거에 관심이 많고 며느리보다 잘 하고 많이 한다.
나도 엄마한테 들은 얘기가 있잖은가? 문풍지를 수시로 손가락 퍽 집어넣어 아래로 죽 긁어내리며 밖을 내다보던 유난한 아이. 호기심도 유전인가 보다.
그런 아들과 내가 다른 점은 나는 운동신경이 없어 자전거를 스무 살이 훨씬 넘어 배웠지만 큰아들은 걸으면서 바로 세 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집 앞과 건너편 교회 앞마당을 누비며 고 작은 발로 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신기했다. 요런 운동신경은 아빠 닮았다. 내 DNA에서 나올 수 없는 일이다.
이 아이는 말을 못 하던 10여 개월부터도 남들이 수시로 들어와 밥을 먹고 가는 우리 집에 손님이 오기만 하면, 밥 먹고 가라고 응응 응응 손짓을 하며 들어와 앉으라며 의자를 두드리고 밥 먹는 수저질 시늉을 했다. 밥시간에 온 이웃들은 미안해하다가도 아이가 하도 그러니 자연스레 들어와 합석을 하곤 했다. 그것도 엄마한테 배운 걸 따라 하는 나를 보고 닮았겠지. 우리 집은 그 덕에 열린 부엌이었다. 열린 부엌 3대째.
우리 부부는 결혼 후 신혼여행을 거의 전라남도를 아래로 훑으며 여행했다. 백양사를 갔던 기억이 좋아 거의 해마다 백양사를 가곤 했는데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살때 함께 갔던 어느 해 가을, 아이가 아마도 3,4살? 되었을 때, 입구에서 어느 만큼 가다 되돌아오는데 아이가 발걸음을 딱 멈춘 곳이 있었다. 바로 엿장수 앞. 엿장수가 신나게 품바 음악에 맞춰 가위질하며 현란하게 춤추고 있는데 거기 서서 함께 궁둥이를 씰룩거리고 어깨를 움찔거리며 리듬을 타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만 해도 36살에 결혼해 40대가 가까이 되었거나 초일 땐데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을 때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유, 쟤 좀 봐봐, 하며 남편과 아버지와 셋이 뒤에 서서 바라보는 와중에 웃음이 헤실헤실 나왔다. 아들은 한참을 올려다보며 엿장수와 놀았고 우리는 할 수 없이 엿을 샀다. 그 끼는 어디에서 왔으려나?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엄마와 나, 큰아들로 이어지는 똘끼와 춤끼였다. 물론 나는 막춤 수준이지만. 음악에 반응하는 것은 아마도 아빠 내림이 더 큰 거 같다.
큰아들은 사랑도 남달랐다. 내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으면 엄마를 찾아왔다가 방긋 웃으며 엄마~ 하며 내 허벅지를 쓰다듬고 가곤 했다. 내 앞머리에 머리칼이라도 흩날리고 있으면 가만히 다가와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려 주곤 하는 섬세한 아이였다.
한 번은 전주였던가, 동물원을 간 적이 있었다. 둘째를 낳기 전이니 4살쯤이었을 게다. 저도 애기면서 막 걸음마를 배워 허뚱대며 아장걸음을 떼는 아기에게 다가가 볼을 쓰다듬으며 자기가 가진 풍선을 그 아기에게 건네주는 게 아닌가?
동네에서도 자기보다 어린 여자아이들 보살필 때면 얼마나 자상히 손잡아 주며 돌봐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스물서너 살 되었을 때쯤, 집에 귀농자 가족이 놀러 왔을 때다. 초등학교 여학생 둘이 따라 왔는데 마침 내가 대바늘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 했지만 내가 둘을 동시에 가르치기 어려워하니까 아들이 얼른 자기가 먼저 배우고 나서 한 아이에게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거었다. 길을 잘 못 찾아들어갈 때면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애들이 잘하면, 아낌없이 그렇지 그래 잘한다, 정말 잘하네 추임새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 아이였다.
농사는 절대 안 하겠다고 진즉부터 선언했던 아이였지만 풀무전공부를 나온 아가씨와 연애를 하더니 쪼끔 바뀌었다. 여자친구 꿈은 농사였고 토마토퓌레를 좋아하니 토마토를 텃밭에 심기도 하고 결혼해서는 목화농사를 짓겠다 하니 간혹 예초기질까지도 도와준다. 하지만 근본적으론 농사보다는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며 음식 만들기도 좋아하고 사람을 다정하게 살리는 쪽에 더 관심이 많은 청년으로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