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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키우며

6. 떡잎부터 다르다? #2 작은 아들 떡잎

by 조유상

큰아들이 '호기심 천국 행동파'였다면 막내아들은 관찰형이다. 행동하기 전 일단 관찰한다.


큰아들이 살림살이를 무조건 꺼내놓고 보는 아이라면 막내는 지켜보는 아이였다. 큰아들 때는 잘 때만 살금살금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막내는 (이사 온 집 역시 시골집이라 분합문 밖) 세탁기가 있던 화장실에서 빨래를 비비고 있으면 자다 깨서도 막 울고 보채는 법이 거의 없었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보고 있다가 눈 마주치면 방긋 웃어주던 아이.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도 일하다 들어와 보면 혼자 사부작사부작 돌아다니긴 해도 위험한 짓을 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은 아는 동네 형이 나를 찾아왔다가 '하영엄마 집에 있어?'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어 방문을 열어보니 막내가 방 한 구석에 누워 있더란다. 마침 소리에 깼는지 미리 깨어 있었는지 형을 마주쳐다 보더란다. 형도 아무 말 없이 마주 바라보았는데 한 5분은 그렇게 서로 꼼짝도 않고 기싸움, 아니 눈싸움만 했단다. 한참을 그러고 나더니 고개를 살짝 움직이더라고. 참, 희한한 녀석이라며 웃었던 형도 희한한 사람이긴 했다, 내가 보기엔. 막상막하 관찰자 둘이 공기를 뚫고 시선을 마주하며 눈도 깜빡 않고 있던 그 정적을 견뎌낸 할아버지와 아기 두 사나이.


지금은 아니지만 막내의 목소리가 우리 집에서 듣보잡으로 하이톤이었다. 우리 식구들 목소리는 대개 낮은음이고 조용조용한 편인데 막내가 세게 울 때면 우리 모두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엄마를 닮았나 역시 울보였다. 하도 쏠톤으로 울어대니 이거 뭐 <양철북> 주인공도 아니고 유리창 와장창 나가는 거 아니야? 싶었다. 그러더니 일고여덟 살 넘어가니 점차 목소리 톤이 낮게 안정되어 가서 신기했다. 역시 우리 식구 맞긴 맞았네.


동네 이웃이 놀러 오면 낯을 가려 내 다리 사이에 숨던 막내. 내게는 조용조용 말하기도 했지만 낯선 이 앞에서는 도통 눈알만 굴리며 입에 자크를 채우곤 했다. 하도 말이 없으니까 이웃 언니가 왔다가 얘 말하는 소리 좀 들어봤으면 좋겠다 할 정도였다. 집에서 말할 때 목소리는 작아도 6살 때부터는 집 바로 앞 초등학교 유치원을 다닐 때부턴가 노래할 때 목소리가 제법 컸었다. 7살 졸업식 때는 선생님이 애국가 지휘를 시켜 고 조막만 한 손으로 지휘를 하며 제법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노랠해서 우릴 놀래켰다.


큰아이는 집에서 자전거로 5분 여 타고 가야 하는 텃밭에 데리고 갔다 하면 영 적응을 못하고 엄마엄마하며 고랑과 이랑 사이를 넘어다니다 넘어져 울고 해서 일하기가 어려웠지만 막내는 달랐다. 근처 어린이집에 보낼까 했는데 남편이 그냥 데리고 다니자 하여 우린 간식을 챙겨 아이를 트럭에 태우고 다니며 농사를 짓곤 했다. 막내는 그다지 보채지 않고 우리가 일하고 있으면 밭가장자리에 앉아 놀다가 심심하면 우리가 있는 밭 안으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오기도 했다. 졸려 자울자울하면 업어 재웠다가 트럭에 눕혀두곤 했다. 그렇게 막내는 우리와 밭에서 식물과 함께 자라났다.


어느 여름날, 양파를 캐서 말려 두었던 걸 밭에서 이파릴 잘라 두었고 그걸 망에 1킬로씩 넣어 묶어 생협에 낼 때였다. 우리 집 양 옆밭에서 했는데 이쪽 밭에서 하다가 저 건너편 밭으로 건너가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쩌다 마당을 바라보니 막내가 우리 일하는 걸 눈여겨봤는지 저도 빨간 양파망에 양파를 몇 개씩 담아 끈을 잡아당겨(묶지는 못할 때니까) 놓고 또 망에 넣고 끈을 당기곤 해서 차곡차곡 컨테이너에 담고 있는 게 아닌가? 본 건 있으니 망에 빡빡히 넣을 순 없어도 깜냥껏 열심히 하는 중이었다. 이마와 콧등에 땀을 송골송골 단 채로. 깜짝 놀라서 남편보고 어머어머, 쟤 좀 봐봐요!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는 여전히 그러고 있었다. 양파와 마늘, 감자는 모두 여름에 수확하는 작물 아닌가. 뜨거운 날 그 땡볕 아래 그러고 있던 막내가 경이로웠다. 겨우 네 살 정도였는데.


그러던 녀석이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2학년 때, 지역에 유명한 유기농 벼 전도사인 주형로 씨가 학교 문화시간에 강의를 왔었나 보다. 그때 그는 다른 농업학교에 가서 졸업 후에 농사지을 사람 손들어 보라 하자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을 했단다. 그러면서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막내를 포함해 네댓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한다. 그 말을 집에 와서 했을 때 나는 내심 기뻤지만 겉으로 반색을 하진 않았다. '아, 그래? 그랬구나, 잘했네' 그 정도 가볍게 하고 지나갔다. 진심 반가워하고 환호하는 마음을 보이면 아들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은근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그 말을 한 지 불과 두어 달 후 집에 와서 어느 날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만약에... 농사를 안 짓는다고 하면 엄마는 어떨 거 같애?'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농사가 이 세상에서 제일 하늘에 가깝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해. 당당하고 멋진 직업이지, 하지만 억지로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해서 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네가 만약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최고 좋아. 엄마는 네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좋으니까. 네가 아직 어리니까 생각은 수십 번 바뀔 수 있고 다 괜찮아. 네가 정말 좋아하는 걸 했으면 좋겠어!라고 대답하자 안심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러던 아들이 졸업을 앞두고 종업식 때였나? 친구들과 친구 부모들 잔뜩 우리 집에 떼로 몰려와 놀다 간 어느 날 저녁, 갑자기 호들갑스레 말했다. '엄마, 나 큰일 났어.' '왜?' '나, 특별전형만 넣어놓고 수능시험 본다는 걸 접수 안 해 놨어.' 한다. 지금 하면 되지, 했더니 '아니 오늘 6시까지야' 한다. 6시가 되기 몇 분 전이다. 아... 할 수 없지, 지금 돌이킬 순 없잖아. 기다려 보자. 그때 가서 방법을 찾아보면 돼잖겠어? 했다.


얼마 뒤 막내가 학교에서 왔다. 학비며 기숙사비까지 다 무료인 농수산대학 발표가 나는 날이었다. 어떻게 됐어? 물어보니 떨어졌단다. 응, 그래? 기분이 어때? 물어보니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응, 그럼 됐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했더니 자기 무시하지 마란다, 자기 아빠를 이어 농사지을 거라며, 이래 봬도 농업인 대표 2세란다. ㅋㅋㅋ 누가 물어봤슈? 마치 누가 들으면 재벌 2세라도 되는 듯.


너 이리 와 봐라, 아들 손을 잡고 마당의 하우스 앞으로 갔다. 너 떨어진 기념으로 엄마가 너 좋아하는 계수나무 사다 심었다. 으음, 좋은데!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작 떨어질 줄은 몰랐다. 전에 아들한테 만약에 나무를 심는다면 너는 무슨 나무 심고 싶니? 하고 전에 물었을 때 풀무학교에 계수나무가 큰 게 두 그루 있는데 향기가 참 좋고 이파리가 이쁘다며 그 나무를 심고 싶다는 말 을 기억하고 심어놨던 거였다. 떨어진 기념이야 아니었지만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린 참에 그냥 꿰어 맞추듯 말해 버린 거였다. 막상 말해 놓고 보니 괜찮았다. 굳이 합격만 기념할 일이냐고요, 떨어진 것도 기념할 만한 거 아니겠는가. 연애도 하다 보면 헤어질 때 있듯이 시험도 붙기 아님 떨어지기 아닌가.


그리하여 그 계수나무는 해를 거듭할수록 우쭐우쭐 커서 지금은 하우스 지붕을 넘어 키와 부피가 자라났다. 24살 우리 후계농 아들만큼이나 든든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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