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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Apr 23. 2021

6. 루이 14세는 왜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을까

 

베르사유 궁전의 모습 ®CNN

베르사유 궁전. 낮에는 미로 같은 정원에서 피크닉과 술래잡기를 하느라 웃음이 끊이지 않으며 밤마다 열리는 무도회에서는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위한 산해진미가 넘쳐났을 그곳.

 화려함과 웅장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베르사유 궁전은 지금도 매해 그곳을 방문하는 2백만 명의 전 세계 여행자들을 압도한다. 프랑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 방문해보고 싶은 베르사유 궁전. 이름처럼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베르사유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하였는데 루이 14세는 왜 파리가 아닌 베르사유에 궁전을 지었을까?

리슐리유 추기경의 초상화

그 스토리는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에서 시작한다.

루이 13세는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를 추방하고 재상 리슐리유 추기경과 함께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진행한다. (절대 왕권의 초석) 이때 엔진이 되었던 전쟁이 바로 30년 전쟁(1618-1648)으로 독일 프로테스탄트(신교도)들이 새로운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페르나도 3세(가톨릭)를 인정하지 않자 같은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필립 4세가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이 그 시작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상공업의 중심지로 강대국의 핫이슈)


덴마크, 영국까지 합세하여 구교도 국가에 대항하여 싸우지만 합스부르크 가로 승기가 기울며 그들의 세력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자 이때 루이 13세와 리슐리유 추기경이 스웨덴과 함께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며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결국 오랜 전쟁으로 전 국민의 1/3이 목숨을 잃을 만큼 황폐화된 독일은 평화 조약을 받아들였고 30년 전쟁은 이때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Les traités de Westphalie 끝으로 막을 내렸다. (신성로마제국은 350개의 공국으로 나누어져 각 자치권을 행사하게 되며 국가가 종교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이때 알자스 지방 획득)


안 도트리슈의 초상화(좌) /  마자랑의 초상화(우)


반면 프랑스 내부에서는 합스부르크 가와 스페인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지속적으로 세금을 걷어가자 귀족, 부르주아의 불만이 쌓여만 갔다. 그러던 중 루이 13세가 세상을 뜨고 (1643년 5월 14일) 어린 루이 14세(당시 5세)가 왕위에 올라 어머니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랑 추기경이 함께 섭정을 시작한다. 마자랑 역시 선임 리슐리유와 마찬가지로 절대 왕권을 위한 일환으로 경찰청을 설치하여 운영하는데 이를 위해 또다시 새로운 세금이 추가로 부과되자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터져 귀족들이 두 차례 난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프롱드 난'이다. (1648년 5월 13일 - 1649년 3월 11일)


첫 번째 프롱드 난은 파리 의회가 증세 조항에 반대하며 파리 시민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킨 것으로 루이 14세(당시 9세), 안 도트리슈, 마자랑 모두 파리 근교 생 제르망 앙레로 도피하여 귀족들의 요구를 다시 받아들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콩데 왕자의 초상화(좌) / 프롱드 난을 진압하여 제우스의 모습을 한 루이 14세 (우)

두 번째는 부르봉 왕조와 카페 왕조의 차남 라인, 콩데 가를 중심으로 각 지방의 영주들과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왕족의 권위와 맞먹는 마자랑을 쫓아내기 위해 일으킨 왕자들의 난이다. 초기에는 마자랑을 독일로 추방하며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성년이 된 루이 14세가 진두지휘하여 이끈 왕실 군대에 패하며 결국 프롱드 난은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 왕족과 의회가 모두 왕권에 종속된다. (절대 왕권의 시작)


어려서부터 왕족, 귀족들의 뜨거운 맛을 경험한 루이 14세는 결국 파리 루브르 궁전을 떠나 그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근교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겨 아버지 루이 13세의 사냥 별장을 재건축하기 시작한다.

보르비꽁뜨 성

베르사유 궁전은 당시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재상 니콜라 푸케의 보르비꽁뜨 성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거기에 화가 르브랑, 건축가 르보와 망사르, 정원사 르노트르 등 당시 최고 전문가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 작품으로 이후 루이 15세, 루이 16세, 나폴레옹, 루이 필립 등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의 전경

약 1만 9천 평에 달하는 성 안에는 지금도 2,300개의 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공원은 무려 800헥타르(242만 평= 대략 축구장 1,000개)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로 손꼽히는 공간은 바로 '거울의 방'으로 357개의 반짝이는 거울과 화려한 금빛 조각, 여울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아름다운 그림들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으며 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눈부신 빛은 '태양왕'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루이 14세는 자신을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태양신 아폴론과 비유하였는데 신과 같은 절대 권력을 표현하는 동시에 시와 음악을 권장하는 예술의 신으로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덕분에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에는 그와 닮은 모습의 아폴론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개인적으로 베르사유 궁전의 백미는 공원이 아닐까 싶다. 베르사유 궁전 안에 레스토랑이 있지만 이곳을 방문할 때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샐러드와 돗자리를 챙겨가는 것을 추천드린다.

 특히 작은 베니스라고 불리는 운하는 루이 14세가 보트를 타며 여유를 즐겼던 곳으로 실제로 베니스에서 루이 14세에게 2개의 곤돌라를 선물하기도 하는데 운하를 바라보며 물멍도 하고 피크닉을 즐기다 보면 마치 내가 당시로 시간 여행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숲 속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운하 표면의 반짝임, 엄마 오리를 따라 수영하는 아기 오리들의 귀여움은 베르사유를 둘러보며 지친 나에게 주는 여행 중 휴식으로 충분하다.


베르사유 정원

더불어 정원 끝에 위치한 왕들의 밀회 장소였던 트리아농 성 역시 베르사유 방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로 베르사유 궁전과는 또 다른 아기자기한 매력을 갖추고 있다. 특히 트리아농 정원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촌락을 찾아볼 수 있는데 작은 시골 마을처럼 꾸며 놓아 산책에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트리아농을 나오면 코코샤넬과 프루스트가 좋아했던 핫초코를 판매하는 안젤리나 부티크를 만나 볼 수 있는데 산책을 하며 떨어진 당 보충을 하기에 딱이다. (밤 함량이 높은 찐한 몽블랑 케이크도 빼놓을 수 없는 디저트!)


어서 빨리 다시 베르사유를 방문하여 더 많은 분들께 직접 안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왕비의 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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