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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May 10. 2021

7-1.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비운의 왕비가 되었을까.

마리 앙뚜와네뜨의 초상화 (좌) / 루이 16세의 초상화 (우)

프랑스 구제도(앙시앙 레짐)의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합스부르그 여제 마리 테레즈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1770년 5월 16일, 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손자, 세자 루이와 혼인을 성사시킨다. 처음 프랑스 왕실에 발을 디딘 15살의 어린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마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한치도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상 ⓒ Chantal Le Bel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실을 상상하였던 그녀는 곧 루이 14세부터 이어져 온 엄격한 프랑스 왕실 법도에 지쳐버렸고 내성적이고 취미나 취향이 전혀 다른 남편 루이 16세와도 점점 멀어져 갔다.

 결혼 4년 뒤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며 마리 앙투아네트도 프랑스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막중한 책임은 뒤로 한 채 남편이 선물해준 (베르사유 궁전에서 떨어진) 쁘띠 트리아농에만 머물고 싶어 했다.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소수의 귀족들만 불러 모아 연극, 음악 연주, 파티를 즐겼으며 특히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주변의 조언 대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며 당시 패션의 아이콘으로 등극, 그녀가 입는 스타일이 곧 귀족들 사이 유행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재정 상태는 날이 갈수록 좋지 않았다. 특히 선대 루이 15세 때 참가한 7년 전쟁에서 패하며 북미와 인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를 대부분 영국에게 넘겨주는 것은 물론 국가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루이 16세와 그의 참모진들 역시 이 심각한 재정난을 타계할만한 비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7년 전쟁의 전투지

 *7년 전쟁(1754-1763): 유럽과 아메리카, 인도에서 벌어진 최초의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실레지아(폴란드와 체코 사이의 옛 지역)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오스트리아 vs 영국-프로이센의 대결 구도로 시작하여 식민지와 외교권 쟁탈을 위해 당시 유럽 강대국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고급스러운 왕비의 취향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연이은 흉작과 나날이 늘어가는 세금 부담으로 점차 많은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마리 테레즈 여왕 또한 딸에게 편지를 보내어 소비를 줄이고 더 지혜롭게 행동하기를 바랐지만 좀처럼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불만과 불평이 날로 커져갔으며 그녀를 '오스트리아 여자' 또는 '적자의 여왕'이라고 비꼬아 불렀다. 여기에 '목걸이 스캔들'이 터지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목걸이 스캔들은 전말은 이렇다. 선왕 루이 15세에게 '마담 바리'라는 애첩이 있었는데 그녀를 위하여 가장 아름다운 목걸이를 선물하고 싶었던 왕은 650개의 다이아몬드, 무려 2,800 캐럿으로 구성된 목걸이 (170억 원 상당)를 주문한다. 하지만 목걸이가 완성되기 전 왕이 사망하자 보석상은 급히 이 고가의 목걸이를 구매할 고객을 찾기 시작한다. 보석상은 루이 16세에게 제안하여 그가 사랑하는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선물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부정적이었던 당시 궁정 분위기를 고려하여 왕비는 목걸이 선물을 거절했다.

 

 이때 이 주인 잃은 목걸이에 혹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비엔나 대사였던 로안 추기경이었다.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로안을 멀리하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임을 얻고 싶었던 그에게 왕비의 측근이라는 라 모뜨 공작부인이 접근하여 사실 왕비는 이 목걸이를 갖고 싶어 한다며 당신이 목걸이를 구매하여 선물한다면 다시 왕비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꼬드긴다. (1784년 8월 11일 밤, 숲에서 여왕을 알현했다고 주장)

왕비의 목걸이 복제품

 그리고 추기경은 꼬박 2년에 거쳐 네 차례 분납을 약속하고 목걸이를 받아 라 모뜨 공작부인에게 전달하였는데 목걸이를 받은 라 모뜨 공작부인과 공모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직 완납하지 않은 목걸이 대금을 받기 위하여 보석상은 왕비를 찾아간다. 그제야 라 모뜨 부인은 실존 인물이 아닌 사기꾼으로 로안 추기경이 숲에서 만난 사람 역시 왕비가 아니었으며 이 모든 것이 라 모뜨의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라 모뜨도 가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왕비는 당황을 금치 못하였으며 루이 16세 또한 빠르게 로안 추기경, 라 모뜨와 일당을 잡아들여 추긍하였지만 목걸이는 뿔뿔이 흩어져 찾을 수 없었으며 왕비에 대한 루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사람들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유죄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 역사를 뒤흔들 사건이 펼쳐진다. 루이 16세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 독립 전쟁(1775년 4월 19일 – 1783년 9월 3일)을 지원하며 더욱 악화된 프랑스 재정 상황을 벗어나기 위하여 공정성을 근거로 그동안 세금을 내지 않았던 특권층(성직자,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하고 삼부회를 소집한 것이다. (1789년 5월 5일)


 그러나 그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이 누린 혜택을 내놓을 리 만무했고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지 못한 루이 16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결국 그동안의 특권층을 위해 납부한 세금과 불공평함에 지치고 힘없는 왕권에 크게 실망한 평민(부르주아) 대표와 소수의 성직자 대표들이 폭발하여 특권층 개혁을 요구하며 베르사유 근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자신들의 국회를 결성하여 발표한다. (테니스코트 선언, 1789년 6월 20일)

 그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루이 16세가 테니스 코트를 폐쇄하자 사람들이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시 무기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프랑스 혁명에 불이 붙는다.(1789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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