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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May 19. 2021

7-2. 마리 앙투와네트는 왜 비운의 왕비가 되었을까

혁명이라니! 역사상 이례 없는 경험에 놀란 프랑스 왕실은 아마 혼비백산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루이 16세가 특권 포기 및 인권 선언을 발표하고 군중들의 요구에 따라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 튈르리 궁전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입헌 군주제가 어느 정도 자리 잡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파리를 떠나 절대왕정 회귀를 원하는 세력들(프로이센, 오스트리아)과 룩셈부르크 부근에서 합세하여 파리를 탈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파리로 돌아오는 왕족, 1791년 6월 25일

 다음 날 아침, 파리 국민군 라파예트 사령관 명령에 따라 도주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잡기 위하여 전국으로 경보가 울린다. 결국 그들은 목적지였던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몽메디(룩셈부르크 근처)를 앞에 두고 근처 바렌에서 붙잡혀 왕실 마차는 다시 파리로 끌려온다.(바렌 사건, 1791년 6월 10일)

 

 이 사건으로 프랑스혁명 정부와 루이 16세 사이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으며 국회는 그의 모든 권한을 중지시키고 왕과 그의 가족들을 템플 감옥에 수감시킨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혁명 전쟁(1792-1802)이 발발한다. 프랑스혁명 기운이 서서히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다른 유럽 왕정 국가에서도 긴장감이 고조되던 찰나 프랑스 공화정 정부가 먼저 지속적으로 정치 간섭을 해오던 오스트리아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1792년 4월 20일)


 전쟁이 시작되자 루이 16세 재판이 프랑스 정치계의 이슈로 떠오르며 혁명 온건파(지롱당)와 혁명 급진파(자코뱅)의 대치가 뜨거워졌다. 그러던 와중 왕의 비밀 고문이었던 미라보(온건파 정치인)와 주고받은 밀서가 드러나며 루이 16세는 외국 세력과 도모하여 국가를 배신한 반역죄, 국민 분열을 조장한 죄로 기소되었고 718명의 국회의원 중 707명이 시민 루이 카페(루이 16세)의 유죄에 찬성,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 형을 선고받는다. (루이 16세 처형, 1793년 1월 21일)

루이 카페의 처형,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 처형 후 급진파 자코뱅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고 이를 권고히하기 위하여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공포정치를 자행하며 상대파 지롱당을 숙청, 마리 앙투와네트에게도 그 칼날이 향한다.


 1793년 8월 2일 늦은 밤, 마리 앙투와네트는 곧바로 아이들과 마담 엘리자베스(루이 16세 여동생)와 떨어져 템플 감옥에서 콩시에르주리로 이송되어 독방에 수감된다. 그녀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쇠어 본래의 나이(38살) 보다 훨씬 더 들어 보였다.

그리고 10월 14일, 마리 앙투와네트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죄목은 국세 낭비, 적국과 내통하여 프랑스를 배신한 혐의였다. 사실 그녀는 해당 죄목에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은 여인으로써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남편의 결정을 따랐을 뿐이라고 능숙하게 항변했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난 죄목은 8살 배기 아들(루이 17세)과의 근친상간이었다.


화가 난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던 재판장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힘없는 메아리와 같았다. 20시간이 넘는 긴 토론 끝에 그녀 역시 남편과 동일한 단두대 형을 판결받는다.

마리 앙투와네트의 재판, 1792년 10월 15일

 재판이 끝나고 독방으로 돌아온 마리 앙투와네트는 마지막을 기다리며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쓴다. 마담 엘리자베스 또한 단두대 형으로 처형당하여 이 편지를 끝까지 받지 못하였지만 후세에 밝혀진 그 편지 속에는 두려움 또는 미움 대신 시누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10월 16일, 혁명 광장(오늘날 콩코드 광장)은 군중들의 야유와 고함으로 가득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까지 왕비의 품위를 잃지 않았고 12시 15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6년의 혁명 기간 동안 단두대가 설치된 혁명 광장에서는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당하였는데 19세기 초반부터 '콩코드 광장'으로 불리며 공포 정치와 이후 혼란스러웠던 18-19세기 정치 격변기에서 벗어나 조화롭게 화합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프랑스인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특히 콩코드 광장 중앙에는 금빛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자태를 뽐내며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원래 이집트 룩소 신전에 있던 이 오벨리스크는 1831년 프랑스 학자가 이집트 상형문자를 처음으로 해석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집트 부통령 모하메드 알리로부터 선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

더불어 콩코드 광장에 서서 바라보는 탁 트인 샹젤리제 거리와 그 끝에 위치한 개선문을 보는 것 또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겨울 시즌에는 콩코드 광장 뒤로 큰 관람차를 설치하여 운영하는데 그 위에서 바라보는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가득한 반짝이는 파리도 참 매력적이다. 루브르 박물관 또는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을 방문하실 계획이 있다면 튈르리 공원과 콩코드 광장을 꼭 함께 방문하시길 추천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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