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발라드 Jun 20. 2021

8-1. 나폴레옹은 왜 추방되었을까

다비드의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거친 눈보라, 험준한 산맥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장착하고 힘찬 말위에 올라 손을 높이 들고 군대를 이끄는 나폴레옹(1769-1821). 그의 이런 위풍당당한 모습은 그림을 뚫고 '나를 따르라' 외치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많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며 한때 프랑스의 영웅이자 황제였던 그가 왜 프랑스에서 떨어진 엘바섬으로 추방되었으며 왜 다시 헬레나 섬으로 쫓겨나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프랑스 변방의 섬, 코르시카 출신의 장교였던 그는 프랑스혁명 전쟁 동안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에서 승승장구하며 공화당을 비롯한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쿠데타를 통하여(1799년 11월 9일) 정권을 장악하고 제1 통령 그리고 곧 스스로 황제의 자리(1804년 12월 2일)까지 오르는데 이런 그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쳤으니 그것이 바로 러시아 원정이다.(1812년 6월 24일 - 12월 30일)

앵그르의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좌) -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우)

유럽 제패에 걸림돌이었던 영국을 대륙 봉쇄령을 통하여 고립시키고자 하였던 나폴레옹 반하여 (산업혁명 영향으로) 영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았던 러시아가 영국과의 교역을 진행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812년 6월 24일 동맹국(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 터키)들의 자발적인(?) 지원에 힘입어 65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한 것이다.


뛰어난 전술로 유명한 나폴레옹이었지만 러시아 군대는 계속 대륙 동쪽으로 후퇴하며 그의 전략을 시도해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더불어 이동할 때마다 마을들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자 나폴레옹 군대의 현지 물자 조달이 어려워지며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중간중간 몇 차례 전투를 치르기는 하였지만 승리가 결정되지 않아 사실상 심리전에서는 러시아의 승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지만 그들을 반기는 것은 역시나 불에 타는 텅 빈 수도였다(1812년 9월 15일).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군대 내 전염병(장티푸스와 이질)과 영양실조까지 겹쳐 러시아 황제 차르 알렉산더 1세와 협상단을 기다리다 지친 나폴레옹은 결국 후퇴를 결정한다. (1812년 11월 25일) 65만 군사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약 15%로 러시아 원정의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라이프치히의 나폴레옹과 포니아토프스키(폴란드 장군)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자 곧 러시아, 프로이센의 추격이 시작됐다. 나폴레옹 역시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직 전투 경험이 적은) 젊은 군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소집한다. 

 나폴레옹 군대는 오스트리아, 영국, 스웨덴까지 합세한 연합군과 독일에서 맞닥뜨리는데 이 전투가 바로 그의 가장 큰 패전 중 하나인 '라이프치히 전투'다. (1813년 10월 16일 - 1813년 10월 19일) 특히 당시 연방 국가였던 독일의 각 도시들이 서로 대치하여 총을 겨누었던 전투로 (ex. 프로이센 vs 작센) 이후 독일의 국가 개념이 더욱 뚜렷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이번에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연합국의 역공이 시작된다. (프랑스 원정, 1814년 1월 25일-1814년 3월 31일초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군대를 각각 마주쳤을 때에는 나폴레옹의 승리였다. 하지만 50만 연합군의 진격 앞에 7만 나폴레옹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게 된다. 

장 루이 어니스트의 프랑스 원정

 그리고 곧 프랑스 정권의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상원의원에서는 나폴레옹이 선서를 어기고 과도한 과세 부담으로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며 동시에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왕정주의자들이 왕정복고를 위해 모여들었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장군들 조차도 그에게 아들과 왕비의 안위를 위하여 퇴위하기를 조언하였고 결국 1814년 4월 6일 파리 근교 퐁텐블루 성에서 자신의 퇴위에 서명한 그는 엘바섬에 대한 주권과 황제의 지위, 연금도 유지하는 조건을 얻었지만 암담한 현실에 독약을 마셔 자살시도까지 감행한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생명을 부지하였지만 나폴레옹은 결국 프랑스에서 떨어진 엘바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유럽 왕실을 떠돌며 생활하던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다시 왕의 자리로 올라 프랑스는 왕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퇴위에 서명하는 나폴레옹


작가의 이전글 파리 발라드 2. 퐁데자르 (예술의 다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