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소매치기를 보내고 플랫폼에 서서 울고 있으니 역무원 아저씨가 다시 오셨다. 다친 곳은 없는지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지금도 아저씨의 무덤덤함이 기억난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진정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파리 지하철에서는 소매치기가 자주 발생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가져다주신 냉수 한잔, 숙소에 돌아갈 지하철 티켓을 물어보는 모습에서 무심한 프렌치 시크 속 따뜻함이 느껴졌다.
분실 신고서를 작성하고 역을 나와 근처 경찰서로 향했다. 하지만 웬걸, 경찰서에서는 나의 상황에 관심 있는 사람이 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한 경찰관은 앞에 있던 어느 여인을 바라보는데 푹 빠져있었다. 그중 친절한 경찰관은 경찰 리포트를 제출할 한국 대사관 주소를 열심히 찾아주었는데 막상 가보니 그곳이 프랑스 한국 문화원이었던 것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다.
그나마 대사관에서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하며 위로해주셔서 소매치기가 별일이 되었다. 대사관 측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했지만 이미 이런 비슷한 상황의 여러 한국인들을 도와주며 돌려받지 못한 금액이 600만 원이나 된다고 하셨다. 그래도 여권은 그대로 있어 재발급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해외 긴급 송금 서비스라는 것을 알게 되며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진맥진한 채 호스텔에 돌아오니 새로운 룸메이트가 와있었다. 액세서리 디자이너였던 미쉘 아주머니는 아파트 리모델링 동안 머물 임시 거처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늘 벌어졌던 사건을 또 한바탕 쏟아내었다. 아주머니는 얘기를 듣자마자 밥은 먹었냐며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나를 맥도날드로 데려갔다. 첫 프랑스 맥도날드였다. 당시에는 맥주와 와인도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어 더 신기했는데 이 와중에 가방에서 미리 챙겨 온 와인을 꺼내 드시는 미쉘 아주머니를 보며 진짜 프랑스인은 다르다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데 아주머니께서 내일 먹을거리를 고르라며 근처 마트에서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심지어 호스텔 직원에게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다른 한국인 투숙객까지 확인하여 혹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셨다. 일면 부지의 외국인을 이렇게까지 도와주다니. 처음엔 또 다른 함정은 아닌지 의심하고 나중엔 낯선 친절함에 어리둥절했다. 악마와 천사를 하루에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알고 보니 아주머니에게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내 또래 아들이 한 명 있는데 나를 보니 아들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하셨다.
다음 날 이태리로 떠나는 바람에 제대로 보답도 못하고 고작 백팩에 챙겨 온 마스크팩을 선물로 드린 것이 지금까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귀국 후 이전 주소로 편지를 드렸는데 아직까지 답장을 받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파리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는 맛있는 식사를 제대로 대접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