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발라드 Nov 10. 2020

1. 파리는 왜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을까?

예술과 낭만의 도시 Paris
프랑스 파리만큼 강렬한 설렘을 주는 도시가 또 있을까.
오늘은 이런 파리가 어떻게, 왜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켈트족의 한 부족인 골족이 정착한 프랑스

파리의 어원은 현재 노트르담 대성당이 위치한 시테섬에 기원전 6세기경 정착하여 살던 파리지(parisii)라고 불리던 골족에서 시작한다. 이후 통일국가로 메로빙거 왕조(5세기 - 8세기), 카롤링거 왕조(8세기 - 10세기)가 차례로 설립되었는데 당시 수도는 각각  Tournai, Aix-la-chapelle로 프랑스 대륙보다 북부에 위치했다. 파리가 수도가 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한 요소는 바로 센강이다.  센강은 무역에 유리한 물길을 열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1차 방어에도 유용하게 활동되었다. 이전 수도보다 노르만 침입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도 한 요인이다.


이런 파리가 프랑스 수도가 된 것은 카페 왕조(10세기 - 14세기)의 필립 오귀스트 Philippe Auguste (a.k.a 필립 2세) 왕 때 일이다. 당시는 영토 확장, 십자군 원정, 외적의 침입 방어 등과 같이 인적, 물적 자본이  많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하여 중앙 집권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중세시대는 봉건제도 하에 각 지방의 영주들이 기사, 군대를 소유하고 있어 왕의 리더십이 강하게 발휘되지 못하였는데 이 판도를 바꾼 사람이 바로 필립 오귀스트다.

필립 오귀스트는 지방으로 대법관을 파견하여 영주들을 견제하도록 하였으며 거물급 영주들을 의회에서 제외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필립 오귀스트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부빈 전투(1214년 7월 27일)를 이야기할 수 있다. 프랑스 왕실과 혼인 관계로 얽혀있는 영국은 대륙 진출, 무역 교차로 역할을 해줄 프랑스 영토 획득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는데 부빈 전투는 이 둘이 충돌하여 발발된 전투다.

카페 왕조의 문장(좌)과 필립 오귀스트의 초상화(우)

부빈전투는 영국 왕 John lackland가 사촌인 독일 황제 Otto 4세, 필립 오귀스트에 반하는 프랑스 영주들과 연합하여 프랑스 왕에게 도전할 동맹을 체결하며 시작된다. 처음 영국은 호기롭게 프랑스 라 호셀(la rochelle)에 상륙하였다. 하지만 아직 왕권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영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여러 공작들이 John lackland에 반하여 일어나며 제대로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체결된 것이 근대 국가 헌법의 근간이 되는 영국의 대헌장이다.)


부빈 전투 묘사(좌)와 독일 황제 오토 3세의 초상화(우)

영국이 한발 물러났지만 여전히 8만 명의 대군을 대적하기에 2만 5천 명의 프랑스 군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설사가상으로 필립 오귀스트의 퇴각 계획이 독일 황제에게까지 알려지면서 1214년 7월 27일 일요일, 연합군의 선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필립 오귀스트가 일부러 퇴각 계획을 노출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일요일, 주일에 전쟁은 금기되었다. 즉, 기사들의 전투력을 떨어트리려고 했던 것이 그의 전략이다.)


부빈 전투 지도

전투 대열은 세 파트로 나누어졌으며 중앙에 필립 오귀스트가 있었다. 그를 기준으로 오른쪽 전열대가 먼저 전진했고 그다음으로  중앙 전열대가 움직였다. 전투는 3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피와 시체로 가득 채워졌다. 짧고도 긴 이 시간 동안 더 많은 사상자를 내는 곳이 승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기사 수는 월등히 적었지만 프랑스 군은 왕실의 상징인 백합기를 앞에 들고 기사들과 민병대가 처음으로 힘을 합쳐 그들의 주군 프랑스 왕을 위해 그들의 조국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그때 기적이 펼쳐졌다. 연합군이 열세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승리의 여신은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었고 프랑스 군은 승전보를 울리며 백합기를 펄럭였다.


부빈 전투는 프랑스 역사상 치른 첫 번째 큰 전투로 그 승리는 아래와 같은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1. 부빈 전투의 승리는 주일의 승리, 신의 영광과 같은 상징성을 띄며 필립 오귀스트 왕권에 신성함을 부여하였다.

2. 최초로 프랑스라는 국가 개념을 더욱 뚜렷하게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주변국들의 간섭, 프랑스 왕권에 반하는 영주들의 힘을 잠재웠다. (프랑스 봉건제 최상위 = 프랑스 왕)

국가의 탄생, Horace Vernet, 1850


이 부빈 전투 승리를 축하했던 곳이 바로 그 유명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뿐만 아니라 파리에서는 필립 오귀스트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물을 만나볼 수 있는데 루브르 박물관과 프랑스 대법원이 그것이다.

프랑스 대법원 (palais de justice)

프랑스 대법원은 불어로 Palais de justice로 직역하면 palais = 영어 Palace와 같은 의미로 왕궁이었던 과거를 이야기한다. 다들 중세 배경 영화 속에서 참모진을 옆에 두고 왕좌에 앉아 백성들의 고충을 듣기도 하고 다툼이 있으면 판결을 내려주던 왕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중세의 프랑스 왕 역시 한 나라의 최고 대법관이자 최고 집행관이었다.


필립 오귀스트는 시테섬을 거처 삼아 왕궁을 건축하였는데 지금은 그 기능이 분리되어 대법원으로만 쓰이며 palais de justice 가 되었다. 이 프랑스 대법원에 예수 면류관(가시 왕관)을 보관하던 생샤펠(sainte chapelle) 성당이 이어져있는데(상단 이미지의 왼쪽) 다음 시간에는 왜 프랑스가 예수 면류관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