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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Nov 19. 2020

2. 예수 면류관(가시 왕관)이 왜 프랑스에 있을까?

 2019년 4월 15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 첨탑 주변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목재 골격으로 지어진 성당 상단이 먼저 불길에 휩싸였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서둘러 화재를 진압하려 했지만 첨탑은 결국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프랑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 면류관을 비롯한 여러 성물들이 큰 손상 없이 가까운 파리 시청사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 보관) 무사히 옮겨졌다는 기사들이 연이어 나와 한숨을 돌렸는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왜 프랑스가 이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크리스탈 튜브 안에 보관된 예수의 가시 면류관(좌)과 생 샤펠 내부(우)

예수 면류관은 가시나무로 만든 지름 21미터 원형의 왕관으로 성경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았을 때 이 가시 면류관을 썼으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고난, 수난을 상징할 만큼 의미가 깊은 성물이다. 4세기까지 예수살렘에서 순례자들을 맞이하였으며 이후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 콘스탄티노플로 점차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238년 라틴제국의 비잔틴 황제 Baudouin 2세가 국가 재정난으로 인해 이 가시 면류관을 프랑스 왕, St. Louis (a.k.a 루이 9세)에게 판매하였는데 구매가는 135,000 리브르로 당시 국가 예산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다음 해 St. Louis 생 루이는 이 성스러운 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특별한 교회를 짓도록 지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파리의 생 샤펠(Sainte-chapelle)이다.


그렇다면 생 루이는 왜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며 예수 면류관을 프랑스로 가지고 왔을까?

생 루이(루이 9세)의 초상화

생 루이는 지난 1편에서 언급한 카페 왕조 필립 오귀스트의 손자로 총 8차례 치러진 십자군 전쟁(1095-1492) 중 두 차례나 (7차, 8차) 출정하였으며 특히 마지막 원정의 경우, 지병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감행하여 도중 생을 마감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St. Louis의 St = saint 약자로 성인을 의미)


십자군 전쟁은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성스러운 땅, 예수의 고향 예루살렘을 강성하는 이슬람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물론 이면에는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유럽 영토 소유권을 확장하기 위한 전략도 내포되어 있다.


7차 십자군 원정(좌)과 8차 십자군 원정(우)

생 루이가 참가한 7차 십자군 원정(1248-1254)은 이집트 술탄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며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소집으로 촉발되었는데 프랑스와 동맹 영주들이 무사히 키프로스에 착륙하여 이집트 다미에트(Damiette)를 정복하며 초기에는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술탄이 있는 카이로로 진군하던 중 알제리 만수우라(Mansourah)에서 이슬람 군의 급습에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는데 그때 생 루이가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 왕을 풀어주는 협상 조건으로 십자군은 다미에트를 포기하고 400,000 리브르를 보석금으로 지불하였으며 (성전 기사단 일부 부담) 생 루이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4년 동안 머물어야 했다.


생 루이가 프랑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술탄이 교체되며(1263) 교황 우르바노 4세가 8차 십자군을 (1265-1272) 소집한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이 200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며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회의감이 가득했다. 오히려 부르주아 상인들은 더 이상 이슬람을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닌 협력해야 할 무역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 루이는 이들과 다른 시각을 고수하며 십자군 원정 길에 올랐다. 이집트를 점령하기 위하여 선택한 목적지는 튀니지였다. 그때 그들이 가장 먼저 마주한 적은 타는 듯한 더위와 탈수였다. 거기에 전염병(열병 티푸스)까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면서 결국 원정대는 속수무책으로 와해되었고 생 루이 역시 튀니지 Carthage에서 죽음을 (1270) 맞이하게 되는데 일부 학자들은 어쩌면 그가 무리하게 원정을 계획하여 순교자들의 도시 Carthage에서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 추측한다.


더불어 당시 성물은 순례자들을 유치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병의 치유 혹은 가족들의 무사 안위를 기원하기 위하여 성인들의 흔적과 그들의 유물을 찾아 순례길을 나섰다.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무역로가 개척되며 상공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도로가 재정비되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경제적 여유가 생겼으며 따라서 순례자의 수도 늘어갔다. 말과 도보로 떠나는 장거리 여행으로 경호원, 수행원, 인솔자 등등 많은 인원이 그룹으로 움직였으며 그만큼 비용도 컸다. 이런 순례자들의 여행자금은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며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기에 성물의 역할은 여러모로 다양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보관된 예수 면류관(좌)과 십자가형 당시 사용되었던 못(우)


생 샤펠에서는 가시 면류관뿐만 아니라 예수 십자가 일부 조각과 십자가형 당시 사용되었던 못, 어린 예수의 천 기저귀, 성모 마리아의 모유 등과 같은 다른 성물들도 함께 보관하였는데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많이 소실되었다. 당시 위기를 면한 면류관과 주요 성물들은 1806년 8월 10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으로 옮겨져 매해 사순절 금요일마다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지금도 성묘 기사단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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