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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Jan 17. 2021

3-1. 잔다르크는 왜 마녀가 되었을까

사람들은 ‘잔다르크’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누군가는 은색 갑옷을 입고 깃발을 들고 있는 소녀를, 또 다른 누군가는 마녀로 몰려 기둥에 묶인 채 화형에 처한 모습을 떠올릴지 모른다.

잔다르크에 대한 이미지

이 각기 다른 이미지 배경 속에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이다. 무려 116년 동안 치러진 프랑스 영토 쟁탈전으로 카페 왕조의 샤를 4세(Charles IV)가 후세 없이 생을 마감하며 촉발되었다. (카페 왕조의 마지막)


크레시 전투, 1346 (좌)와 샤를 4세 초상화 (우)

프랑스 왕권은 부계로 승계되는 살리카 법을 따르고 있어 샤를 4세의 사촌이었던 발루아 가의 필립 6세 Philipe VI(= 샤를 4세 숙부의 아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발루아 왕조의 시작)

 하지만 필립 6세가 샤를 4세의 조카였던 영국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 샤를 4세 누나의 아들) 영향 아래 있는 영토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Guyenne’을 빼앗아가자 에드워드 3세는 1337년 10월 7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프랑스 왕위 반대 성명을 발표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1337년을 백년전쟁의 시작으로 본다.)


필립 6세의 초상화 (좌)와 에드워드 3세의 초상화 (우)

그리고 결국 1340년 6월 24일 첫 전투가 시작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어원이며 조각가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 역시 이 백년전쟁 중에 나온 에드워드 3세와 관련된 이야기다. 사실 백년전쟁은 영국이 거의 기세를 잡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역사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패전 중 하나인 아쟁쿠르 전투(Bataille de Azincourt)는 프랑스 군을 더 침체되게 만들었다.

칼레의 시민들 by 로댕 (좌)와 아쟁쿠르 전투 (우)

 당시 프랑스는 광인 왕 샤를 6세(Charles VI)의 통치하에 있어 중앙권력이 귀족들에게 분산되어 있었다. 그중 장 1세 부르고뉴 Jean sans peur (샤를 6세의 사촌)와 루이 1세 오를레앙 Louis 1er d'Orléans (샤를 6세의 남동생)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서로 더 많은 영토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대치하였다.

 그러던 중 장 1세 부르고뉴가 루이 1세 오를레앙을 암살하며 결국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 1세 부르고뉴는 파리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던 장 1세 부르고뉴에게 파리 시민들은 지쳐갔고 결국 샤를 1세 오를레앙 Charels 1er d'Orléans (루이 1세 오를레앙의 아들)을 선두로 그를 지지하는 알마냑 당파(les armagnacs)는 파리 시민들과 함께 부르고뉴 당파(les bourgognes)에 맞서 싸워 다시 파리를 되찾는다.


 물론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장 1세 부르고뉴가 아니었다. 프랑스 영토에 대한 예전 권리를 되찾기 원했던 영국 헨리 5세(Henry V)와 연합하여 프랑스를 차지할 욕심을 내보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 귀족들이 뭉쳤고 이들은 1415년 10월 15일 프랑스 북부 아쟁쿠르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결과는 프랑스의 대패였다. (프랑스 병력 2만 명 vs 영국 병력 6천 명) 가볍고 멀리 가는 활로 무장한 영국군 앞에 무거운 갑옷과 긴 창의 프랑스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프랑스군은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며 망연자실하였으며 샤를 1세 오를레앙은 런던 타워에 25년 동안 갇혀있어야 했다. 더불어 파리에서는 부르고뉴 당파의 알마냑 당파 대학살이 감행되었다.

샤를 6세의 초상화(좌)와 헨리 5세의 초상화(우)

 뿐만 아니라 아쟁쿠르 전투 패배로 트루아 조약 traité de Troyes (1420년 5월)이 체결되며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느와 혼인하여 정식으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으며 이에 따라 영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샤를 6세의 세자, 미래 샤를 7세는 프랑스 중부 le berry 지역으로 도피) 잠시 평화가 찾아온 듯 보였지만 머지않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모두 사망하며 어린 헨리 6세 Henry VI (헨리 5세와 카트린느의 아들)가 프랑스와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 헨리 6세와 프랑스 세자가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잔다르크다.


(3-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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