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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Feb 03. 2021

3-2. 잔다르크는 왜 마녀가 되었을까

3-2. 잔다르크는 왜 마녀가 되었을까

잔다르크 Jeanne d'arc (1412년 - 1431년 5월 30일)는 프랑스 북동부 동레미 Domrémy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골 농가의 평범함 소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대천사 미카엘, 성 캐서린과 성 마가렛(소녀 순교자들)이 꿈속에 나타나 점령당한 프랑스를 되찾고 프랑스 세자를 왕좌로 이끌어내라는 목소리를 전달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13살 소녀의 꿈이 어떻게 현실이 되었을까?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La vision et l'inspiration de Jeanne d'Arc, Louis Maurice Boutet de Monvel, 1900

어린 시골 소녀 잔다르크가 프랑스 군대를 이끌기까지 스토리는 이렇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점차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의 침략이 잦아지며 여러 마을들이 공격당하자 항간에는 많은 소문과 예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중 프랑스 로렌 지방(북동부)의 처녀가 프랑스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가장 공통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그때 16살의 잔다르크가 가족과 고향을 떠나 자신이 받은 신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주목받게 된다. (더불어 잔다르크가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라고 추측) 그리고 마침내 동레미 부근 요새의 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꾸 Robert de Baudricourt를 찾아가 두 차례에 걸쳐 예언을 전달하며 설득하였는데 (잔다르크 예언1. 영국군이 곧 이 마을 부근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 적중, 예언 2. 프랑스 군이 곧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다. -> 루브레 전투 Bataille de Rouvray 패배) 이 예언들이 모두 맞아떨어지며 결국 그는 잔다르크와 그녀를 호위하기 위한 기사 2명을 함께 세자 샤를이 있는 프랑스 중서부의 쉬농 Chinon으로 보낸다.


오) 당시 프랑스 영토 (파란색 - 프랑스/ 분홍색 - 영국/ 보라색 - 부르고뉴)     왼) 샤를 7세를 알현하는 잔다르크

아무리 예언이라고 하지만 영국-부르고뉴와 끊임없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의 세자 샤를 역시 잔다르크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자 샤를은 잔다르크에게 예언자로서의 시험 그리고 처녀인지 아닌지 시험 (우리가 알고 있는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잔다르크'처럼 변장한 세자 샤를 찾아내기 등등)을 치르게 하였는데 이 모든 것을 통과하자 그제야 잔다르크를 믿고 계시의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녀와 군대를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에게 둘러싸인 오를레앙으로 보낸다.

오) 샤를 7세 초상화   왼) 오를레앙 공성전 격전지(붉은 표시)

그것이 바로 백년전쟁의 판도를 바꾼 '오를레앙 공성전 Siège d'Orléans (1428년 10월 12일 - 1429년 5월 8일)'이다. 오를레앙은 프랑스 중앙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로 특히 영국에게는 오를레앙이 무너지면 프랑스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상징적인 곳이기도 했다. 잔다르크가 오를레앙에 도착할 때(1429년 4월 29일)에는 이미 북쪽에서부터 진격한 영국군-부르고뉴 연합군이 오를레앙 보급로를 차단하여 시민들과 군인들 모두 지칠 때로 치친 상태였다.


** 공성전 : 성이나 요새를 공격하는 싸움 /출처: 다음 국어사전

오) 잔다르크 초상화    왼) 전장에서의 잔다르크 묘사

이 기세를 꺾은 것이 바로 하얀색 깃발과 하얀 갑옷의 잔다르크를 앞에 세운 프랑스 군대였다. 사실 고위 참모진들은 아무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농부 출신에 심지어 어린 여자아이를 믿지 않았다. 만약 다치거나 전사하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은 달랐다.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해줄 신의 메신저, 예언자가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힘과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잔다르크는 모든 전투에 참가하여 끊임없이 그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외쳤다. 심각한 부상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전장에 나왔다. 결국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군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고 잔다르크가 이끈 군대는 전문 고위 참모진이 6개월 동안 해내지 못했던 일을 9일 만에 해내며 오를레앙을 되찾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잔다르크는 자신이 받았던 계시에 따라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세자 샤를을 설득하여 역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렀던 랭스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Reims에서 1429년 7월 17일 대관식을 진행한다. 세자 샤를이 드디어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된 것이다. (랭스는 당시 부르고뉴 영토였지만 잔다르크의 소문을 들은 각 지방 영주들이 길을 바로 열어주었다.)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샤를 7세와 그 뒤에 서있는 잔다르크

잔다르크는 프랑스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자신의 미션을 완수하기 위하여 영국군을 프랑스 영토에서 마저 밀어내기 위하여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파리로 향한다. 하지만 이때 샤를 7세는 영국 - 부르고뉴 당파와 비밀스럽게 평화 조약을 협상하며 잔다르크에 대한 지원을 멈춘다. 파리에 적은 인력으로 도착한 잔다르크는 샤를 7세의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너무 뒤늦게 도착한 탓에 잔다르크 군대는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으며 후퇴하던 중 결국 영국 - 부르고뉴 연합군에게 붙잡혀 잔다르크는 영국군에게 팔려가게 된다.


1430년 12월 10일 영국 영향력 아래 있는 프랑스 북서부 루앙(Rouen)으로 이송된 잔다르크는 영국군에 의해 감옥에 갇혀 계속 재판을 받았다. 루앙 주교 Pierre Cauchon의 감독 아래 재판관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추궁하며 잔다르크의 고향 동레미 숲 속에 있는 '요정의 나뭇가지'라고 불리는 어린아이 손에 닿을 법한 나무를 잔다르크가 마법에 사용했던 도구라고 주장했으며 남자밖에 없던 당시 군대를 이끌었던 행동, 소년같이 자른 짧은 머리와 옷차림, 갑옷을 입었던 모든 것을 이단이라고 판단했다.

사형을 피하기 위하여 잔다르크는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시인하였으나 18살의 소녀는 결국 1431년 5월 30일 루앙 시장 광장에서 산채로 화형에 처하고 만다.

샤를 7세 때 프랑스 영토 (하늘색 = 백년전쟁 중 영토/ 스프라이트 = 영국-부르고뉴 연맹으로부터 되찾은 영토)

샤를 7세가 공식적으로 대관식을 치러 프랑스 왕이 되자 점차 부르고뉴 당파도 샤를 7세를 자신들의 주군으로 인정하며 협조적이 되어갔고 영국의 프랑스 입지는 점차 좁아졌으며 마침내 샤를 7세는 루앙을 포함한 프랑스 대부분의 영토를 되찾게 된다.


샤를 7세와 랭스 대주교 Jean Juvénal des Ursins의 주장으로 결국 1456년 잔다르크에 대한 유죄 판결이 취소되며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당시 재판은 영국 그리고 영국과 동맹을 맺은 루앙 주교의 음모로 드러났다.


현재 루앙 구시장 광장, 잔다르크가 화형에 처했던 자리에서는 성 잔다르크 성당을 만나볼 수 있는데, 사실 잔다르크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9세기 초반이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지만 당시 교회의 이단으로 재판을 받았기에 공화당과 교회가 대치되던 시기에 많은 언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오를레앙 주교, 추기경 Dupanloup의 노력으로 1909년 시복 1920년 시성 되어 마침내 프랑스를 수호하는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성 잔다르크 성당 역시 1979년, 화재로 불타 사라진 예전의 성 빈센트 성당 자리에 세워지게 된다.


**시복: 교황이 신앙이나 순교로 이름 높은 사람을 복자품에 올리어 특정 지역의 교회에서 그를 공경하도록 선언함

**시성: 성스럽고 존경할 만한 천주교 신자가 죽은 후, 교황청이 그를 성인품으로 올리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경하도록 선언함 / 출처: 다음 국어사전

프랑스 루앙에 있는 성 잔다르크 성당

건축가 Louis Arretche는 이전 성 빈센트 성당 모습을 포기하고 노르망디 전통 스타일로 배를 뒤집은 모양의 성당으로 내부를 설계하였으며 외관은 바다를 연상하는 디자인을 주면서 모던함을 강조했다.


특히 성당 안에서는 성경의 이야기를 담은 현존하는 성 빈센트 성당에서 사용되었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스테인글라스를 볼 수 있어 더 흥미롭다.


지금도 루앙 구시장에서는 매일 오전 장이 서는데 신선한 노르망디 해산물과 사과주 시드르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으며 루앙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중에 하나인 Ma Boulangerie에서 크로와상을 먹어보는 것도 여행 중 별미다.


다음 편에서는 드디어 안정을 되찾은 프랑스에서 꽃 피운 르네상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왜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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