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어원 그대로 '재탄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 Renaissnace는 미술사에서 중세 시대의 신 중심 사고방식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 영감을 받아 다시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졌던 시기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그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3대 예술가로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그리고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를 손꼽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란 이탈리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중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만 유일하게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국내가 안정화되자 점차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지중해 무역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는 당시 강대국이 모두 욕심내던 영토였다. 이때 프랑스가 건수를 잡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탈리아 전쟁(1494-1559)'다.
당시 이탈리아 나폴리를 지배하였던 스페인 페르난도 1세 Ferdinand Ier 가 교황 인노첸시오 8세 Innocent VIII에게 봉건 비용 상납을 거부하자 교황이 페르난도 1세를 파면하고 폐위시킨 것이다. 이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교황과 손잡은 프랑스 샤를 8세 Charle VIII는 스페인에게 빼앗긴 나폴리 왕위 전통성(나폴리 군주 앙주 가문 Duc d'Anjou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차남 라인)을 근거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이다. 뒤를 이어 이번에는 루이 12세 Louis XII(샤를 8세의 사촌)가 할머니(밀라노 군주의 딸 발렌티나 비스콘티 Valentina Visconti)의 밀라노 왕위 전통성을 근거로 밀라노를 차지하게 되고 그리고 드디어 프랑스 르네상스를 꽃피운 프랑수와 1세 François Ier (루이 12세의 사촌이자 사위)가 왕위에 오른다.
1494년 9월 1일 프랑스 중서부 코냑 Cognac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수와는 사실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진 발루아 왕가의 3남 라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 12세가 적자를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며 그의 유일한 자녀, 클로드 드 프랑스 Claude de France과 혼인한 프랑수와가 프랑스 왕이 된다.
프랑수와 1세 역시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는데 어려서부터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당시 절정에 이른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매료되고 만다. 그 후 많은 이탈리아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것은 물론,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하고 후원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1452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 Vinci (피렌체에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연인, 법관과 농부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었다. 그래도 법관이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피렌체의 안드레아 델 베로치오 Andrea del Verrocchio 아틀리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작업할 수 있었으며 이후 밀라노에서는 루도빅 스포르자 Ludovic Sforza 공작의 후원을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최후의 만찬' 역시 밀라노에서 작업)
우리는 다빈치를 건축가, 음악가, 발명가, 공학자, 조각가, 화가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남긴 노트 때문이다. 현재까지 약 7,000페이지가 남아있는 이 노트는 이탈리아 어로 기록되어 드로잉, 거울 글씨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빈치의 관찰과 연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밀라노에서 머물 무렵부터 기록한 것으로 예상되며 원래 각기 다른 주제로 나누어졌던 노트가 현재는 많이 분실되었지만 헬리콥터, 낙하산, 탱크와 같은 그의 발명품은 물론 해부학, 혈관의 흐름, 광학, 새들의 비행 등에 대한 그의 호기심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어 진정한 '르네상스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해준다.
밀라노를 거쳐 피렌체로 간 다빈치는 그곳에서 많은 작품들을 작업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 La Gioconda다. 1516년 프랑수와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온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시 64세) 미완성이었던 세기의 걸작, 모나리자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함께 가지고 왔는데 덕분에 지금까지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영국과의 100년 전쟁 영향으로 프랑스 왕들은 수도였던 파리 대신 프랑스 중부 루아르 Loire 지방에서 머물며 생활하였는데 프랑수와 1세의 사냥 별장이었던 샹보르 성 Château de Chambord은 다빈치가 설계한 건축물로 그 웅장함이 특히 압도적이다. (이후 루이 14세 시절 증축)
샹보르 성 중앙에는 그가 최초로 고안한 이중 계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설계하여 과학적이면서 실용성이 돋보이는 다빈치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빈치를 특히 애정 했던 프랑수와 1세는 그에게 왕실 수석 건축가, 화가, 엔지니어 타이틀은 물론 왕이 거주했던 앙부아즈 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클로 뤼세 성Château du Clos Lucé을 하사하였다. 이 클로 뤼세 성은 프랑수와 1세가 샤를 8세로부터 물려받은 성으로 프랑수와 1세가 어린 시절 예술에 대한 열정을 키우던 장소이기도 하며 왕의 누이,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집필가 마그리트 드 나바르 Marguerite de Navarre 역시 이곳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 더 의미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프랑수와 1세는 다빈치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도록 앙부아즈 성 Château d'Amboise과 클로 뤼세 성을 바로 통과하는 지하 비밀 통로를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둘 사이가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듯하다.
프랑스로 온 지 3년 뒤, 1519년 5월 2일 다빈치는 클로 뤼세 성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그의 곁에는 '나의 아버지'라고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프랑수와 1세가 있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앙부아즈 성 정원에 자리 잡은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는데 날이 좋은 날 예배당 안의 스테인글라스가 반짝이며 그의 묘석을 비추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뭉클해진다.
더불어 앙부아즈 성 정원에서 루아르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프랑수와 1세와 다빈치가 바라보았던 시선을 따라 마을과 경관을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루아르 지방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꼭 앙부아즈 성과 클로 뤼세 성을 함께 방문하시길 추천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