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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발라드 Mar 04. 2021

5-1. 프랑스는 왜 메디치 가문을 선택하였을까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을 후원하며 피렌체 경제, 정치의 중심에 있던 메디치 가문, 이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가는 역사상 2번의 혼사를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 메디치 가문에서는 2명의 여왕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은 왜 프랑스를 선택하였으며 프랑스는 왜 메디치 가문을 선택하였을까?

앙리 2세와 캬트린느 드 메디치의 초상화

그 첫 번째 혼사는 프랑수와 1세 차남 앙리 2세와 (위대한) 로렌초 드 메디치의 증손녀 캬트린느 드 메디치의 결혼(1533년 10월 28일)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주도권을 두고 크게 프랑스, 스페인, 교황권이 대치하고 있었다. 대를 이어 이미 5차례 전투가 치러진 이탈리아 전쟁 중 파비아 전투 bataille de Pavie(1525년 2월 24일)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스페인 카를 5세에게 패배한 프랑수와 1세는 포로로 붙잡혀 풀려나는 조건으로 선왕 때부터 이어져왔던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스페인에게 넘겨주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런데 1527년 5월 6일, 카를 5세의 군대가 휴전에 동의하였던 교황 클레멘스 7세(줄리오 드 메디치=로렌초 남동생의 사생아)의 보호 아래 있던 수도 로마를 침략하여 무자비하게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학살, 납치하였던 '로마의 약탈' Sac de Rome을 자행하여 교황을 모욕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후 교황은 카를 5세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수와 1세에게 지원을 약속하며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가의 첫 번째 혼사가 성사된다.

카를 5세의 초상화(좌) / 클렌멘스 7세의 초상화(우)

"이탈리아 은행가 집안과의 결혼이라니!" 유럽 왕실을 떠들썩하게 뒤흔들 세기의 결혼이었지만 잦은 전쟁으로 자금이 필요했던 프랑수와 1세에게 막대한 결혼 지참금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깊은 애정 사이 접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메디치 가문은 그에게 최고의 사돈이 아니었을까.


미식가로 알려진 캬트린느 드 메디치는 프랑스로 오며 이탈리아 셰프들과 함께 선진문물(?)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대표 디저트(마카롱, 슈 반죽, 소르베), 식문화 예절(포크 사용)등이 처음 프랑스로 들어오게 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수호자 메디치 가문답게 문화적 소양이 뛰어났던 캬트린느 드 메디치는 프랑수와 1세의 누이 마그리트 드 나바르(프랑스 르네상스 대표 집필가)와도 각별히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그녀를 아꼈던 프랑수와 1세는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한 후에도 그녀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었다.  

 

캬트린느 드 메디치의 초상화(좌) / 디안느 드 푸아티에의 초상화(우)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세자가 사망하고 1547년 프랑수와 1세 역시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차남이었던 앙리 2세가 왕좌에 오르고 캬트린느 드 메디치도 파리 생드니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다.

그들 사이에는 무려 10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때때로 정략결혼의 전제에는 사랑보다 의무가 더 큰 것일까.

사실 앙리 2세에게는 평생의 애첩 디안느 드 푸아티에가 있었다. 디안느 드 푸아티에는 앙리 2세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인이었지만 미모와 지성이 출중한 것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마드리드에서 인질 생활을 하며 쇠약해진 앙리 2세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 같은 존재였다. (캬트린느와의 결혼 생활에 조언을 준 것도 디안느였다는 카더라 통신)


디안느에 대한 앙리 2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 바로 프랑스 중부 루와르 지방에 있는 쉬농소성 château de Chenonceau으로 물 위에 떠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이 성은 수세기 동안 6명의 역사 속 여인들이 머물렀던 장소로 '여인들의 성'으로 불리며 이름에 걸맞은 우아함을 자랑한다.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 위치한 쉬농소 성

쉬농소 성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갤러리는 디안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캬트린드의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로 앙리 2세가 토너먼트 경기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자 디안느를 쉬농소 성에서 쫓아내어 원래는 다리였던 공간 위로 새로운 갤러리를 지었는데 디안느를 넘어서고 싶었던 캬트린느를 투영하는 듯하다.(갤러리 = 상단 이미지의 다리 위 건물)


건축물에 새겨진 앙리 2세의 문양 역시 흥미로운데 하단 이미지와 같이 앙리 2세의 첫 글자 H와 디안느의 첫 글자 D 혹은 캬트린느의 첫 글자 C를 교묘하게 겹쳐 만들어진 상징을 성내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앙리 2세와 디안느 혹은 캬트린느의 문양

더불어 쉬농소 성을 중앙에 두고 두 정원이 각각 디안느(프랑스 스타일)와 캬트린느(이탈리아 스타일) 정원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콘셉트로 가꾸어졌는데 꽃이 가장 화사하게 피는 4월-9월 사이 방문하여 여유 있게 즐기는 산책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쉬농소 성을 둘러보고 마을로 나오면 작은 로컬 기념품 샵 하나를 찾을 수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바로 직접 만들어 주시는 짭조름한 크레페를 맛보는 것도 관람 후 출출한 배를 채울 수 있는 딱 좋은 간식으로 추천드린다:)


꽃이 만발한 쉬농소 성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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