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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십리 Nov 26. 2024

터널

02. 연(鳶)

02. () 

    

1년 전, 어느 여름날. 

자신만 빼고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제 위치에서 행복하게 잘 있는 듯했다. 영선의 커피 컵은 바닥을 보였고 아직 녹지 않은 어름만 쪽쪽 빨며 초점 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 속으로 띄워진 연, 

태워준 바람에 의지하며 그 황홀감에 취하여, 

그러나 연이 아닌 바람에 줄이 끊긴 연은, 

바람에 뒤집혀 날아가 허공을 헤맨다. 

구해달라고 몸부림 처도 모두 쳐다만 보고. 

결국, 날아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연은, 

대롱대롱 바람에 따라 억지 춤을 춘다, 

비바람 맞으며 년을 보낸 연, 

오늘은 앙상한 뼈를 흔들며 외치고 있다. 

잊지 말라고.’  

    

오늘 정 준호전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대충 예측은 하고 있지만 어떤 상처를 또 받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영선 씨! 이렇게 나와줘서 고맙고, 이런 일로 만남을 갖게 되어 유감으로 생각해요.” 늦게 도착한 준호는 우선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영선 씨가 처음 입사 면접 볼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 나는 미인대회에나 나갈 사람이 왜 여기를 왔나 싶었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비로써 엷은 미소를 보이며 준호를 바라봤다. 마주친 그녀의 깊은 눈빛은 그간 일어난 많은 사연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였다. 그는 어떻게 부드러운 본론을 꺼낼지 고심했다.

“차 한잔 더 마실래요?”

“아닙니다, 전무님.” 그녀는 오늘 이야기 내용이 무엇이냐 듯 다시 준호를 쳐다보았다.

“지금 회사 분위기를 영선 씨도 알고 있을 거야. 그간 사장님이 영선 씨를 아끼고 좋아한 것 나도 잘 알고 있으나 지금 두 사람 모두 그로 인해 큰 곤경에 처해있어서 부득이 이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어요.” 그는 잠기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고 큼큼거렸다.

“그래서 사장님이 영선 씨에게 도저히 사정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나를 보낸 것이니 이해해 주길 바랄게요.” 고개를 숙인 채 손톱만 만지작거리는 그녀 목덜미의 솜털이 햇빛에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아이가 정현이를 정말로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나이 차이가 무려 15년이나 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야? 왜?’ 흔한 사장과 여비서와의 단순한 스캔들로만 여겼던 그는 묘한 질투심마저 들었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앞날이 구만리 같은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쩌면 내가 사람으로서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정현이에 대한 실망과 한심한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지었다. 이렇게 무책임한 일을 저질러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방적인 정리를 강요한다는 것은 준호의 관념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비어버린 커피잔을 들었다 놓으면서 그는 영선을 바라봤다.

영선 씨 입장을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고 내가 영선 씨를 위해 할 일이 있으면 말해줘요. 내가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정리라고 말씀하셨죠? 저를 정리하는 데 최선을 다하시겠다는 것이지요?” 실소를 머금는 그녀의 표정에 준호는 처음부터 말머리를 잘못 꺼냈다고 생각해 당황했다. 

“미안해요, 오해하지 말아요, 영선 씨를 정리한다는 말이 아니고, 두 사람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정리하자는 뜻이었는데, 정리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 같아 사과할게요.” 

“그럼 제가 회사를 떠나야 하나요?” 그는 순간 난감했다. “아니, 영선 씨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 회사에 계속 근무를 할 수가 있을까?”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며 다시 침묵하는 것이 회사에 대한 미련을 아직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긴다고 해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사장님하고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면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까?”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사장님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그런데 전무님도 제가 많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장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은 저도 잘못이라고 하지만, 가만히 있는 저의 마음을 빼앗아 훌쩍 가버리면 빼앗긴 제 마음은 어떻게 합니까, 사장님은 아무렇지 않은데 왜 저만 이렇게 비난받고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젊음도 체면도 직장도 제게 남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지나가는 종업원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연신 힐끗거린다. 영선의 입장 듣는 그는 애써 참으려 하는 정현이에 대한 원망이 다시 흘러나왔다.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꼭 이렇게밖에 해결할 길이 없었나?’     

느즈막에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정현이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해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회사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정현이의 아내까지 알게 되어 큰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현이는 한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이혼한다, 대표이사가 바뀐다’ 등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화살이 준호에게로 날아왔다. 곁에서 친구의 비리를 말리지 않고 방치한 죄를 뒤집어쓴 준호는 뒤늦은 수습작업을 떠맡게 되면서 이렇게 생살을 잘라 손에 피 묻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영선 씨! 이왕 일이 벌어진 지금 자신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정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영선 씨 마음의 상처도 하루빨리 치유되도록 내가 도와줄게요. 원하면 직장은 내가 더 좋은 곳으로 알아봐 줄 수도 있어요, 지금 사는 곳 지장 없도록 그 아파트 전세금을 포함해서 성의 있는 회사 위로금과 퇴직금을 약속할 터이니 나를 믿고 지금 이 힘든 상황을 같이 해결해 보도록 합시다.” 그는 그녀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이 난관을 쉽게 벗어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는 영선이의 새로운 직장과 집을 마련하기 위해 한동안 동분서주하였다. 우선 그는 그녀의 이력서를 들고 친한 선배가 대표이사로 있는 부흥실업을 방문했다.

“자네가 추천한 사람이야 내가 볼 필요도 없네,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마침 우리 후배 조창훈이 알지? 그 친구가 인사담당이야, 내가 전화해 놓을 테니 만나서 상의해 보도록 하게.” 대표이사실을 나서면서 그는 영선에게 전화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킨 후 인사부를 찾아갔다. 

“아니! 선배님에게 이런 여동생 있었어요?” 작은 키에 배도 나오고 머리까지 벗어진 노총각 조 이사는 영선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촌 동생이라니까, 성씨가 틀리잖아, 용모 단정하고 성실하며 학교도 일류는 아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야, 내가 이곳이 믿을만한 회사라 일부러 데리고 온 것이니 조 이사가 신경 좀 써 줘요.” 

“선배님, 염려 놓으시라니까요, 하하하, 그럼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나요?” 조 이사는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영선이 이렇게 이전보다 여건이 더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준호의 탁월한 인간관계가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그 회사 근처에 그녀가 기거할 아파트도 구하여 서둘러 이사도 끝내게 하였다.

“지난번에 살던 곳에 비해 좀 작지만, 여기는 새 아파트에 교통도 편리해서 살기에는 더 좋은 곳이야.” 

“전무님이 직접 이렇게 수고를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상황이 이러해서 직원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워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는걸, 하하하!”

“죄송합니다. 은혜 잊지 않을게요.” 그녀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은혜랄 것은 없어요, 나는 회사 업무를 본 것이고 또 내가 하는 것이 영선 씨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했을 뿐이야,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리고 회사에서 약속한 돈은 어제 입금했어요,”

“전무님! 고맙습니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이니 어제 일들은 다 잊고 오늘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도록 합시다! 영선 씨 정도의 미모와 능력 그리고 그 젊음으로 어디를 가든지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으니 용기를 가지고 살도록 해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회사 잘 다니고, 그리고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도록 해요.” 그는 며칠 전 조 이사에게 둘러댔던 말대로 그녀에게서 정말 여동생과 같은 애틋함을 느꼈다. 

“예, 가끔 안부 전화 드려도 되죠.” 그녀가 눈시울을 붉히자 그는 측은지심에 가슴이 먹먹해 옴을 느꼈다.

“그럼! 나도 궁금하니 서로 가끔 연락이나 하며 지내도록 해요, 건강 조심하도록 해요.”

‘이제 큰일 하나 끝냈구나’ 싶었지만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는, 백미러에 비친 그녀를 보고 돌아오는 준호의 마음은 편안하지가 않았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뒤숭숭하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영선은 옛 상사에 대한 예의와 자신을 도와준 고마움에 대한 단순한 표현인데 내가 너무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복잡한 속내를 가다듬었다.

창밖 길가에 어지럽게 흔들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지금이 가을이라는 것을 비로써 느꼈다.     


그 후 영선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거의 한 달이 지난 때 즈음이었다. 반가움은 준호도 내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반증이기도 했다.

“아! 영선 씨! 잘 있었어?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하하하! 정말이세요, 제가 궁금하셨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밝아졌다.”

“그럼 당연히 궁금했었지, 이렇게 전화 줘서 정말 반가워, 회사 근무하기는 괜찮아?”

“네! 전무님 덕분에 잘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자리가 잡히는 것 같아요. 벌써 그곳에서 근무하던 때가 꿈같아요.”

“아, 정말 다행이네, 그렇다고 여기 사람들 잊으면 안 돼, 하하하.”

“잊다니요, 전무님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 정신 차리고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어 뒤늦게 고맙다는 인사드리려 전화했어요.” 

“뭘, 나도 그때 영선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래도 영선 씨가 잘 이해하고 따라줘서 내가 더 고마웠지. 아무튼,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너무 좋네, 그때 경황이 없어 식사도 같이 못 했는데 언제 시간 날 때 식사 한번 합시다, 내가 맛있는 것 대접할게.”     

지나는 말로 했던 식사 약속을 잊지 않고 그녀가 전화하는 바람에 준호는 퇴근 후 약속장소로 향했다. 

준호는 놀랐다. 목소리뿐 아니라 영선의 표정이 몰라보게 환해졌기 때문이다.

“아니 회사를 옮기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나, 얼굴이 보기 좋은 것이 남 보기에 오해하겠어, 우리 회사에서 엄청 구박이나 받은 것처럼.” 목에 두른 옥색 스카프가 그녀의 하얀 표정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여기 회사에서도 잘해주지만, 그 회사 분들도 가끔 생각나기도 해요, 참 좋은 분들이었죠.”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그나마 좋게 생각해 줘서 다행이네.”

“사장님도 안녕하시죠? 제 자리에는 새로 누가 왔어요?”

“아직 사장 비서실은 공석인데, 채용하더라도 남자직원을 뽑을 계획이야, 이제 여비서는 배치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녀의 붉어진 얼굴에는 아직도 회한과 아쉬움의 표정이 스치는 듯했다.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원망도 많았을 텐데 영선 씨도 정이 많은가 봐! 곧 모든 것 잊히겠지,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자고.”

“어떻게 쉽게 잊히겠어요? 더구나 사장님과 전무님이 계시는데.” 

“그래! 나까지 잊으라는 것이 아니고 가끔 필요할 때는 생각하라는 것이지, 사장님은 몰라도 나까지 잊어버리면 나도 섭섭하지. 하하하,” 준호는 오늘의 대화에서 그녀의 상처가 많이 나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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