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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십리 Nov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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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향기와 교통사고

03. 향기와 교통사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을 열어보니 겨울이 먼저 들어왔다. 요즘 날씨만큼이나 준호의 마음이 썰렁하고 심란하였다. 회사 일도 그렇고 집 분위기도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특히 영선이의 사건 이후로 힘들고 골치 아픈 일은 아예 관여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의지하려는 정현이 때문에 하루도 어깨가 무겁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아내의 무기력한 표정도 심상치 않다. 원래 성격상 문제도 있지만, 특히 경제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할 때 일상에 대한 피로감이 겹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동안 단순히 아내가 좀 과소비를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아내도 자신에 원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릴 때가 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간 수차 고사한 자신의 보수에 대한 현실화를 정현이와 상의해야 할 때라고 마음먹게 되었다. ‘마침 내일 구미 갈 때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요즘 그는 재미있는 일이 없어 힘들기만 했다. 어제 영선이한테서 걸려온 전화도 계속 마음이 쓰인다.


“전무님, 혹시 제집 전세계약서 갖고 계시나요? 이곳에 전입신고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필요해서요.”

“이런! 이삿날 잊고 전해주지 못했네, 가만히 있자! 내일 우편으로 보내줄까?”

“아니요, 제가 퇴근 후 댁 근처로 찾으러 가면 안 될까요?”

“ 아니, 우리 집은 너무 멀고, 내일 여기 경리부에 맡겨놓으면 잠깐 들러 찾아갈 수 있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린다.

“회사는 제가 좀 불편해서요, 댁으로 찾아가는 것 어렵지 않으니 성수동으로 갈게요.” 

“아! 그런가? 그런데 내일 사장님하고 구미에 다녀와야 하는데 몇 시에 돌아올지 몰라서 그러는데.”

“그럼 모래에 퇴근하고 갈까요?”

“가만있자.” 이번에는 준호가 머뭇거렸다.

“아! 전무님 그냥 내일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불편하게 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는 영선이가 불편할까 봐 배려한다고 했는데 그녀는 준호가 자신을 귀찮아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분위기였다. 준호는 언뜻 그녀가 자신이 와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너무 모른 척한 것 아니지 마음이 걸렸다.     

정현이는 정 전무 책상에 놓인 낯익은 글씨의 소포를 발견하고 못 볼 것을 본 듯 화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영선이의 이름을 보고 잠시 당황한 그는 먹먹한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영선이는 지금도 연락은 하나 봐,” 정현이는 보고도 모르는 체하기가 더 부자연스러울 것 같아 말을 꺼냈다.

“그래, 지난달에도 통화했지, 그래도 꼭 사장님 안부는 챙기더라고.” 준호는 계면쩍었고 처지가 바뀐 정현이는 씁쓸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 내 생일 때는 아무 소식도 없었는데 자네만 챙기는 것 보니 애가 자네를 더 좋아했던 것 아닌지 모르겠네, 하하하.” 

“아니! 이 사람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네가 뭐 예쁘다고 생일까지 챙기겠어.” 몰래 생일선물을 받은 것을 들키기라도 한 듯, 무안한 준호는 부러 큰소리를 쳤다.

“그 아이가 이렇게 연락하고 있는 것 보면 모르나! 우리 회사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아무튼, 누구는 좋겠어, 생일날 젊은 아가씨로부터 선물도 받고!” 정현이는 엄지를 치켜세우고 삐죽거리며 나갔다.

정현이가 나간 뒤 풀어본 선물은 지갑과 벨트 세트이었다.  

   

‘전무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철없는 영선 드림’     


오랜만에 받아본 여성 손 글씨체가 새롭게 느껴진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준호는 한동안 보지 못한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 고맙다는 인사 겸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뜻밖에 그녀의 목소리는 감기라도 걸린 듯 잔뜩 잠겨있었다.

“어! 영선이 어디 아픈 거야?”

“예, 제가 어젯밤에 몸이 안 좋아 응급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뜻밖의 상황에 놀랐다.

“지금 병원이라고? 어떻게 아파서 응급실까지 간 거야?”

“갑자기 춥고 몸이 떨리면서 열이 너무 높아 부랴부랴 입원하게 되었어요.”

“왜? 병원에서 병명이 뭐라고 해?”

“열이 떨어지지 않아 검사 중인데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 지금 수액만 맞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열로 들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럼 아무도 없이 혼자 그러고 있나?”

“예~”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지금 할 일이 있는데…’

“그럼 내가 지금 갈까?” 내심 고사하리라 생각하고 했던 말인데 그녀는 사양하지 않았다. 

“정말요! 바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며 반기는 바람에 그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섰지만, 곧 후회했다. ‘전화로도 충분히 따뜻한 위로를 전할 수 있는데 괜히 병원까지 찾아가겠다고 이야기를 했구나, 나도 이제 순간 판단력이 많이 떨어졌어. 정현이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나.’ 그는 사장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노크를 했다.

“지금 특별한 일 없으면 나 좀 나갔다 오겠네.”

“그래! 다녀와요, 점심은 같이할 수 있지?” 다행히 정현이는 외출 이유를 묻지 않았고 그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건물도 오래되어 칙칙하고 사람들도 많지 않은 이런 곳에 병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썰렁한 병실에 덜렁 혼자 누워있는 그녀를 보고 그는 와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열로 벌겋게 부은 얼굴로 어렵게 웃음 지으며 반기는 그녀 곁에 다가서 자연스럽게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직도 열은 높아 보였다.

“아직도 열이 있네, 왜 혼자 이러고 있는 거야?”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준호는 지금 그 방에 아니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어쩌면 정현이와의 관계 또한 그녀가 벌리고 있는 외로움과 싸움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세상이 지금까지 어린 그녀를 너무 외롭게 하지 않았나 짠한 마음이 들었다.

침대 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자 그의 눈앞에 드리운 그녀의 관능적인 전신 실루엣을 의식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헐렁한 환자복 가슴을 여미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황급히 눈길을 돌려야 했다.

“전무님 죄송해요, 바쁘신데.” 그가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동안 환경의 변화로 적응하느라 무리했나 봐, 내가 미리 건강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간호사는 무표정하게 주사액을 갈고 열을 재면서도 계속 그를 힐끔거리며 나갔다.

“참 그리고 생일선물 고마워! 그 와중에 나까지 챙기느라 고생했어요.”

“뭘 좋아하시는지를 몰라서 너무 평범한 것을 골랐어요, 약소하지만 맘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아! 내게 지금 꼭 필요한 선물이야, 그렇지 않아도 혁대가 오래돼 자꾸 느슨해지는 것이 불편했었는데, 잘됐어.”

“다행이네요, 제가 개인적으로 전무님께 선물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걱정도 됐었어요.”

“병원에 이틀은 더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회사에는 이야기했나?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까?”

“예! 어제 병가는 신청했어요.”

“식사는 잘 나오나? 그는 벽시계를 쳐다보며 식사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예!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들어가 보셔야지요.” 시계를 보는 준호를 보고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젊은 사람에게 감기는 병도 아니야, 열만 내리면 바로 퇴원할 수 있을 거야, 그 안에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빨리 기운 차려야지.” 엉덩이 무겁게 일어서는 그가 이불 밖으로 비친 그녀의 하얀 손을 잡았다. 무의식적이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처럼. 그러자 가냘프고 열로 따끈한 그녀의 작은 손이 힘을 주며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자신을 그 끝 모를 외로움에 혼자 남겨두지 말라는 부탁 같았다. 돌아오는 준호의 가슴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복잡하기만 했다.    

 

정현이는 길거리가 눈에 익어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여기가 어디야? 전농동 아닌가? 왜 이 길로 가나?

그는 골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갈 때와는 달리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차가 답답하여 김 기사에게 물었다.

“예! 전농동 맞습니다, 사장님! 이 시간에 청량리 쪽이 차가 막힐 것 같아서요.”

주위를 둘러본 정현은 갑자기 옛날 생각을 떠올렸다. 운전이 서툴렀던 그는 영선과 비밀 데이트를 위해 양 기사 몰래 차를 직접 운전하여 이 근처를 지날 때가 있었는데 길이 좁아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참 무모했었지, 물불을 못 가렸으니, 그 애는 지금은 잘 지내고는 있으려나.’ 그는 문득 요즘도 그녀와 연락하고 지내는 준호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둘이 정드는 것은 아닐까?’ 그는 머리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데 나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런 실수할 친구가 아니지.’ 그러나 영선이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그도 남자인데, 남녀관계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는 그들이 마주 껴안는 모습을 상상하며 또다시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아냐! 그 친구를 의심하는 것은 지금 악마가 우리를 이간질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자.’ 그는 친구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이때! 차가 급제동을 하며 멈추는 바람에 정현이 몸이 앞 등받이에 부딪혔다.

“이 사람! 왜 그래? 그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뭐가 갑자기 튀어나와서요.” 당황한 김 기사가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가 두리번거리면서 차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인가?” 한참을 차 안에서 영문을 모르고 기다리던 그는 창밖으로 소리쳤다. 이때 뒤에서 밀려드는 차들이 빵빵거리는 바람에 김 기사는 차를 앞으로 움직여 여유 있는 곳에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왜 그래, 차에 이상이 있나?” 그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닙니다, 사장님! 차가 지나가는데 어떤 꼬마가 골목에서 튀어나와 우리 차 옆문을 살짝 부딪치고 뒤로 넘어지는 것 같아 나가보니 벌써 일어나 사라지고 없네요.”

“아니, 뭐? 나는 부딪히는 소리 못 들었는데, 그러니 좁은 길에서는 항상 천천히 다니라고 했잖아!”

“천천히 갔었지요, 그런데 차 옆으로 뛰어드는 것은 해볼 도리가 없잖아요. 우리 잘못은 없어요.”

“그럼, 그 애는 괜찮은 거야?”

“아마 자기가 잘못한 것 알고 혼날까 봐 나왔던 골목길로 도망간 것 같아요. 다치거나 아프지 않으니까 뛰어갔겠지요. 차도 약간 스친 자국뿐인 것이 아이가 크게 충격을 받거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골목을 따라 아이를 더 찾아보도록 해.” 김 기사는 정현이의 말대로 골목을 따라 올라가 보았으나 아이가 보이지 않자 현장 근처로 돌아와 가게 주인에게도 물어보았지만, 그 장면을 보지 못해 그 아이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럼, 그냥 가도 되나?”

“살짝 부딪쳤는데 아이는 괜찮을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시계를 보니 이러다가는 저녁 약속이 늦어질까, 짜증도 났지만, 상황이 김 기사만을 책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삼 일째 눈이 오고 있다. 회색빛 창밖 모습은 마치 세상을 안과 밖을 공간상으로 구분해 놓은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른 아주 먼 곳의 세상. 

떨어지는 눈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준호는 며칠 전부터 준비한 영선이의 생일선물을 두고 어떻게 전해줘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배달을 시킬까 생각했다가 자신을 보면 좋아할 그녀를 생각하면서 결국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이왕 생일인데 기쁘게 해 주자.’ 

그는 이미 그녀에 대한 마음이 자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연민인지 단순한 동정심인지 그는 그 정체를 굳이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를 보고 그도 기분이 상기되었다.

“전무님 제가 이 향수 쓰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무안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회사에 있을 때 내가 물어봤었잖아! 기억 안 나? 사장실에 들어갔는데 향이 좋아 무슨 향수를 쓰냐고 물어보니까 영선이가 말해 준거잖아!”

“아니 그것을 다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감동했어요, 감사합니다. 생일선물 받는 의미를 처음 알았어요, 내 생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녀의 기쁨 뒤 표정에서 세상 무정함에 대한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영선 씨의 선물은 회사 공금으로 준비한 거야, 사장님의 마음도 같이하는 것이고 또 잊지 않고 계시니까 허전하게 생각하지 마, 자, 생일인데 맛있는 것이나 먹으러 가자.” 준호는 자신이 이렇게 선물을 한 것이 다른 특별한 뜻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아침에 질척거리던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며 쌓이고 있었다. 눈을 보고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도 덩달아 설레고 있었다. 그는 눈길에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매달려 눈 속을 걸었다. ‘나와 이 아이는 앞으로 무사히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는 한때 그녀가 정현이와 이런 모습으로 길을 걸었을 생각이 들자 가슴에 찬바람이 들어왔다.     

길 건너편에 친구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한 아이는 반가움에 갑자기 골목을 뛰어나갔다. 마치 지나던 차를 발견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결국 차 측면에 부딪히고 뒤로 넘어졌다. 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고 창피했으나 그 차가 멈추는 것을 보고 혼날 것이 두려워 골목으로 뛰어들어가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딘가 아프기는 하지만 어딘지를 모르겠다. 온몸을 만져보고 엉덩이와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거울에 비쳐 보니 머리에 피멍이 보였다. 그는 겁이 나자 약상자를 꺼내 뒤지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들어오는 바람에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양 깜짝 놀랐다.

“너 뭐 하는 거냐? 왜, 어디 아파?”

“넘어져 다쳤어.” 아이는 망설이다 울먹이듯 말했다.

“어디를 다쳤어?” 어디 봐. 아니, 멍이 들었잖아? 아프지 않아?. 어쩌다가! 어디에서 어떻게 넘어진 거야? 엄마는 아이의 머릿속을 뒤져 상처를 확인한 후 이유를 캐물었다.

“달려가다 차하고 부딪혔어!” 아이의 말에 엄마는 깜짝 놀랐다.

“뭐? 차하고? 차랑 어떻게 부딪힌 거야? 그 차는 어디 갔어?”

“무서워서 나는 그냥 도망 왔어.”

“뭐야!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그냥 오면 어떻게 해!” 치료도 하지 않고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현장에는 이미 차도 없고 상황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아이에게 설명을 들어보니 큰 사고는 아니고 아들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냥 가버린 차가 못내 야속했다.

“어디 다른 데 아픈 곳은 없어?” 상처가 심하지 않고 달리 이상이 없어 보이자 엄마는 약을 발라주며 찻길에서 절대로 뛰거나 무단횡단하지 말 것을 단단히 일렀다. 

    

영수는 며칠 동안 세차장 영업을 하지 못해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우물이 무너져 어쩌면 다시 파야 하는데 비용이 오백만 원 이상 들어야 할 판이다. 게다가 땅 주인은 곧 이곳에 건물을 짓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임대료를 또 인상할 태세다. 속상함에 사무실에 혼자 늦게까지 앉아 술로 저녁을 때우고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다.

“여보! 여보! 일어나 봐요!”

“왜? 왜? 무슨 일인데.” 다급한 아내의 목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얘가 이상해요. 화장실 가다가 얘 코 고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니, 이불 위에 구토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이상해!”

영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아들한테 달려갔는데 사태가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의식이 없는 아들의 눈을 뒤집자 눈동자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는 바로 아들을 들쳐 매고 응급실로 향했다. 아들이 검사를 받는 동안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그는 크게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당장 병원으로 데려갔어야지 뭘 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놈이 누구인지 그때 찾았어야지!”

잘생기고 똑똑한 아이는 그의 삶의 의미이고 희망이었다. 하필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일어난 자식의 사고로 그는 망연자실했다.

“넘어질 때 머리에 충격으로 뇌출혈이 발생해 당장 응급 수술을 해야 합니다.” 의사의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수술만 받으면 괜찮을까요?” 부부는 사색이 되어 애걸하다시피 의사에게 매달렸다.

“예, 빨리해야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이 서둘러 들어갔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한 아이가 중환자실에서 이게 무슨 꼴인가 싶어 눈물이 났다. 수술은 잘 끝났고 위험한 상황은 없으리라 했지만 앞으로 후유증에 대한 재활치료를 잘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답답한 병실을 나와 벤치에 앉았다. 제대 후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어쩌면 삶이 이렇게도 꼬이나, 착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도대체 날 보러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는 치미는 분노를 누구에게 돌려야 할지 몰랐다. 병원에서는 교통사고 보험 처리해야 하니 부부에게 빨리 가해자 신원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경찰서로 달려가 사고접수와 동시에 사고 차를 뺑소니로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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