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영선
04. 영선
황 구현 그가 형 회사를 나와서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것은 제과점이었다. 그러나 사회 경험이 부족하고 인근에 경쟁업체가 생기면서 큰 손실을 보게 되어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다가 또다시 형의 도움으로 이곳에 건축 철물점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반년이 지날 무렵 마침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공사현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자신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한 그는 재빠르게 현장 소장을 찾아가 부지런히 로비한 결과 그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공사장에 필요한 품목은 그 가지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여, 이 모든 것을 독점으로 납품하게 된 가게의 매출도 엄청나게 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파트가 완공되면 수백 세대의 고객도 확보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돈은 이렇게 버는구나, 별거 아니네.’
그렇게 겨우 인생의 밝은 면을 보게 된 어느 날, 현장에서 하도급 일을 하던 목공반장으로부터 건설회사에 발행하는 어음의 높은 할인율에 대한 불평을 듣게 된 그는 바로 그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자금이 필요하게 된 그는 준호를 찾아갔다. 야단만 치는 형보다 항상 자신에게 호의적인 준호를 먼저 설득하기로 했다.
“형님! 그 현장 공사금액이 수천억인데 앞으로 삼 년 안에 그것이 모두 집행되는데 그중 삼분의 일반 계산해도 수억 이상은 충분히 앉아서 그냥 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그룹 회사이니 부도날 걱정 없고 현장 소장이 물량은 책임진다고 하니 이렇게 땅 디디고 헤엄치는 일이 또 있겠어요. 문제는 초기자금이 좀 필요한데 회사에서 일 년만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너무 욕심내는 것 아니야. 지금 철물점도 잘되고 있다면서 거기에 집중해야지 딴 데 한눈팔다 둘 다 놓치는 수가 있다는 것 모르는가.”
“형님 그 장사가 그렇게 이익이 많은 것이 아니고 또 잘된다 싶으면 지난번 제과점같이 근처에 금방 다른 경쟁가게가 생기는데, 이 일은 그럴 일이 전혀 없는 일로 제 일생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없다니깐요. 실패가 없는 확실한 일로 일 년 안으로 틀림없어 갚아드릴 수 있어요.”
“그것이 말같이 그렇게 쉽겠어? 그런데, 그 돈이 한꺼번에 왜 필요한 것인가? 지금 능력 되는대로 조금씩 해 나가면 안 돼?”
“예! 형님! 그런데 그렇게 소량으로 하면 금액을 맞추기도 어렵고 고객 유치하기에도 힘듭니다.”
“내가 생각하더라도 이해가 잘 가질 않은데 형님이 쉽게 수락할까? 이야기는 해보겠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없어.”
“형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저도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좀 도와주십시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점심 후 정현이는 준호 방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네 골프는 아직도 시작 안 했어? 영업상으로도 나보다도 자네가 더 필요하다니까.” 한참 골프에 재미를 붙인 정현이가 준호에게 골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중이었다.
“알았네! 그것이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성격상 쉽지가 않네, 이번 찬바람 날 때나 시작해 보도록 하지.”
때마침 준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영선이었다. 그는 정현이 앞에서 어떻게 통화를 해야 할지 순간 당황했다.
“아! 지금 손님과 대화 중이니 조금 후에 전화할게요.” 그는 정현이와 영선에게 각자를 숨기는 꼴이 되었다. ‘왜 숨겼지? 영선이라고 밝히고 자연스럽게 통화해도 되지 않았나? 하지만 영선이와 무슨 대화가 오갈지, 또 정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데 그 사람 앞에서 버젓이 그 아이와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두가 불편할 뿐이다.’ 그는 순간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해 불만스러웠지만 애써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했다.
준호는 금요일이 가까워질수록 기대와 걱정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직장문제로 상의할 것도 있고 해서 그녀가 그를 집으로 저녁 식사초대를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단순히 그에게 식사초대 한번 하고 싶다는 것 같았는데, 정중히 사양해도 될 것을 거절 못 하고 덥석 결정이 한 것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왜 이러지! 그 아이 앞에서는 왜 이리 약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자신도 요즘 영선에 대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고 그녀도 자신에게 점점 기대어 오는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생각에 걱정이 깊어졌다. 이러다가 만약 이성 문제로 발전한다면 그 모양새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것은 자명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로 그렇게 비난했던 정현이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생각 때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일은 없어야 해.’ 그러면서도 궁금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그는 금요일 오후가 되자 이발도 하고 구두도 닦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듯 영선을 만나는 날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일상이 포근해지고, 마치 낡은 기계에 윤활유를 칠하듯 온몸의 기능이 부드럽게 살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애써 그 변화를 부인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며 즐기고 있었다.
영선이 이곳에 이사하던 날 와본 이후 처음 방문하게 된 집 모습도 궁금했다.
‘단지 한번 와본 곳인데 이 친숙한 느낌은 무엇일까.’
그가 들어서자 그녀는 반가움과 어색함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녀의 옷차림은 헐렁하여 편하게 보이는 것이 수수하고 더 관능적이었다. 살림은 제법 채운다고 했지만 구석구석 남아있는 허전함은 그녀의 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전무님! 누추해서 창피하지만 이렇게 오시니까 너무 좋아요.” 그녀는 들떠 있었다. 벌써 좁은 식탁에는 준비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전무님 하고 같이 근무할 그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전무님이 사장님 실에 들어서시면 벌써 사장님 기분이 좋아지시고 덩달아 비서실 분위기도 편안해졌거든요.”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영선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 뜻밖이네, 하하하, 내가 직원한테는 좀 무심하지 않았나?”
“아니에요, 그때 전무님 하고 몇 마디 대화만 해도 온종일 기분이 좋았거든요. 저뿐 아니라 여직원들에게 전무님은 인기 최고인 것 모르셨어요.”
“그래? 영선 씨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정말 뜻밖인데! 솔직히 그때는 사장님과 영선 씨 관계로 인한 선입감 때문에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 그런데 지금도 비어 있는 영선 씨 자리를 지날 때마다 영선 씨를 생각하고 있네, 사장님이 왜 그 자리를 그대로 놓아두는지 알 수가 없어, 아마 옛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네, 하하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무안함을 떨치려는 듯 아무 말 없이 앞의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미안해, 모두 영선 씨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이니 괘념치 말아요.”
“아닙니다, 모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의 등 뒤 창밖으로 보이는 우거진 산림, 회전하는 선풍기 바람에 간간이 스치는 그녀의 향이 조화를 이루어 머릿속을 시원하게 하였다.
“그래, 회사에 무슨 문제가 있나?”
“아! 그거요, 별것 아니에요. 며칠 전 조 이사님이 제게 대표이사 비서실 근무를 추천한다고 하는데 저는 지금 부서가 편하고 좋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생각해 보겠다고 했거든요, 제가 그냥 거절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 그 조 이사가 특별히 잘해주고 있나?”
“맞아요, 그분이 저를 전무님 동생이라고 하면서 엄청 신경 써 주시는데 미안할 정도예요.”
“하하하, 그 친구가 날 보고 잘하는 것도 있지만 다 속셈이 있어요, 그 사람 아직 총각인 것은 알지?”
“어머! 그래요? 머리가 벗어지고 나이도 많아 보여 몰랐어요.”
“어쩌면 좋은 인연도 될 수 있으니 참고해요.” 조 이사는 전혀 영선이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지만 조심하라는 뜻으로 일러주었다.
“하하하, 어쩌죠, 제 스타일은 아닌데 듣고 보니 좀 걱정되기는 하네요.”
“사실 비서실 근무도 나쁘지 않은데 영선도 알겠지만 계속 긴장 상태에서 근무하기가 쉽지 않지. 영선 씨가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상관없어요. 필요하면 내가 이야기해 줄 수도 있지만, 적당한 이유를 대고 직접 이야기해도 돼!”
“아, 그래도 될까요. 혹시 전무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아무튼, 초대해 줘서 고맙고, 이렇게 모든 일이 안정된 것도 축하하고, 자 건배!”
“전무님 하고 이렇게 식사할 기회가 있어서 너무 좋은데요.”
“이 요리들은 직접 다 한 거야? 아주 맛있는데!”
“하하하! 그래요, 제가 직접 만든 것도 있고 주문한 것도 있는데 맞춰보세요,” 어떤 것이 제가 만든 것이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래? 분명히 이 중에 제일 맛있는 요놈인가?” 그는 제일 어설프게 보이는 파스타를 가리켰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로 맛있어요? 하하하.”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기분은 한 것 고조되었다. 앞에 앉아 불그레한 얼굴에 해맑은 웃음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 여자는 이제까지 본 영선이가 아니었다. 마치 학창 시절에 맘에 드는 미팅 파트너 앞에 가슴 두근거리며 앉아있는 기분과도 같았다. ‘오묘한 이 분위기는 어떻게 하나? 그냥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광경인가?’
문뜩 닫힌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뒤따르는 정현이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 늦었네, 오늘 즐거웠고 식사 정말 잘했어.” 그는 더 이상 그런 분위기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지금 커피 준비하고 있는데, 조금만 더 계시다 가세요.”
“아냐! 영선과 이러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잘못하면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칠 것 같아, 오늘은 영선 씨 만나서 너무 기분이 좋다.”
예상보다 빨리 자리를 떠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그의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그래! 저 모습이구나. 정현이를 정신 못 차리게 했던 그 마력, 저 모습이 영선의 실체이구나.’ 그는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 연못에 빠져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 정현이의 모습에 오버랩된 자신을 보았다.
그렇게 준호는 영선과 자신의 사이에 계속되는 경고음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믿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만남으로 뚜렷했던 그녀와의 경계가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시련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왜 나에게 그런 공격을 계속하는 걸까?’ 그는 나름대로 영선이의 입장에서 곰곰이 헤아려 보았다. ‘어쩌면 지금 그녀는 특별한 사랑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것은 어떤 사랑일까,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랑? 아니면 아빠와 같이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여 보호받고 싶은 가족과 같은 사랑? 그렇지만 그녀로서는 능히 자신에게 걸맞은 짝을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 어려운 길을 쳐다보고 있는 것일까?’ 또다시 그녀가 위험한 선택을 하지나 않을지, 알 듯하면서 풀리지 않는 그녀 생각에 그의 잠 못 이루는 밤이 깊어지고 술잔은 비워져 가고 있었다.
외부 손님을 현관까지 배웅하고 들어오는데 비서실에 김 기사가 정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냐는 식으로 김 기사를 쳐다보았다.
“사장님! 저 문제가 좀 생겼는데요, 지난번 학교 갔다 오던 길에 꼬마가 우리 차에 부딪혀 넘어진 것 때문에 성동경찰서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김 기사는 면목 없다는 듯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이 회사로 연락을 했다고?” 정현이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음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가 뭔가? 나도 경찰서에 가야 하나?”
“아닙니다. 운전자 제가 가면 되고요, 경찰 말로는 아이 아빠가 뺑소니로 신고를 했다고 하니 나와서 경위 설명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뺑소니? 그것이 어떻게 뺑소니가 될 수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얘가 잘못했고 아무 탈 없이 먼저 현장을 떠났는데,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고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냥 가서 상황만 설명하면 아무 문제없으리라 봅니다.”
“그래? 그때 뭔가 찝찝하다 했더니 그냥 넘어가지 않는구먼, 그런데, 어떻게 우리라는 것을 알았지? 누가 신고를 했나?”
“그것은 아니고요, 아마 경찰이 근처 CCTV를 조사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경찰이 가서 설명 잘하고 문제 생기지 않도록 마무리 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