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결혼
21. 결혼
구름이 잔뜩 낀 것이 금방이라도 쏟아부을 것 같았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준호의 얼굴에도 지쳐가는 빛이 역력했다. 정현이를 대신하여 회사를 꾸려 온 지도 2년이 지나고 있었다. 상황이 그런지라 회사의 어려운 사정이나 본인의 감정을 나타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로지 위기의 회사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보! 준구 결혼날짜가 잡혔어요.”
“그래? 생각보다 빨리 잡았네.” 준호는 기가 죽은 목소리였다. 그간 신혼집 장만이나 결혼자금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지 못하고 아내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나저나 전세금도 그렇고 결혼 비용은 어떻게 준비가 다 되었나? 우리가 얼마나 도와줘야 하지? 당장 내일 은행에 대출이라도 신청을 할까 하는데.” 그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준비됐어요.”
“응! 어떻게?” 그는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실은 내가 결혼 때부터 당신 몰래 부은 적금이 있었는데 그것을 찾아서 해결했어요. 그 돈은 우리 노후자금으로 계획하고 당신에게 끝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힘없이 이야기하는 아내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네, 능력 부족한 남편 만나 도움도 주지 못하고 당신에게 미안할 뿐이야.”
“그것도 당신이 벌어온 돈인데 결국 처갓 집에 쓰게 되어 내가 더 미안하고 감사하죠, 그래도 당신이 준구에게는 부모나 다름없는데, 당신이 그 애 결혼에 아무 대책도 없는 것 같아 서운하기는 했어요, 그러나 당신이 돈 욕심도 없고 또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한다는 성격을 아니까 체념하게 되더라고요.” 아내는 은행에서 적금을 찾는 날이 처남하고 같이 집을 보러 갔던 그날이라고 했다.
그의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처남과 영선은 결혼식장에 서게 되었다.
“설마 정현 씨가 오늘 불쑥 나타나지는 않겠지요.” 혜경이는 식장을 둘러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럴 수는 없지, 안심해요, 어제 그 사람 만났는데 참석 못 해서 미안하다며 축의금도 내가 대신 가져왔으니 그럴 일은 없어요.”
예상보다 조촐한 식장 분위기에 그만큼 자신이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이내 식장에 들어선 영선을 보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잊었다. 눈부신 신부의 모습에 그는 터지는 탄성을 삼켰다.
‘싸리나무 울타리 위에 솥은 초승달은 마당 가득한데,
앙상한 가지에 피어오른 목련은 스스로 고고함에 취해 외로웠다.’
박수 속에 단상을 향하는 영선의 행진, 준호는 그 발걸음 옆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의 눈길은 받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결혼식 동안도 영선과 눈길 한번 마주치지 못해 그는 서운한 마음으로 식장을 나섰다. 그녀가 이젠 가족이 되었고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의 위로가 되기는 했으나 이 모든 선택이 반드시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했다.
고심 끝에 그녀가 옮겨 간 곳은 같은 호구 관리 지역 안의 더 좁은 도시인 타이허였다.
“마마 집이 왜 이렇게 작아? 우리 여기서 살아야만 되는 거야?” 초휘는 입을 내밀며 실망스러운 마음을 나타냈다.
“그래! 초휘야 너 난창의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 우리 이곳에서 당분간만 지내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자. 그때는 아주 큰 집으로 갈 수 있어. 이곳에서 너 대학 갈 때까지만 있는 거야.”
“그런데, 왜 꼭 그래야만 돼?” 이유를 모르고 학교를 떠나온 초휘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이곳으로 피신하듯 이사 온 후 대인 공포증으로 그녀의 은둔 시간은 길어지고 초휘의 방황하는 마음은 깊어만 갔다.
먼 산의 모습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 막연한 그리움으로 밀려와 결국 바람이 되어 멀리멀리 흩어졌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자꾸 외로움에 싸여 눈물이 나오려는 것이 자신의 감정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을 가고 싶다. 대학은 그곳으로 가고 싶은데,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마마 앞에서 내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난창을 떠나오면서 초휘는 어린 시절 자신을 둘러싼 어두운 시간이 있었음을 느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간 막연한 기억과 알 수 없는 추억들이 슬픔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저미어 올라왔다.
진경도 초휘의 이런 변화에 대하여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이곳으로 온 뒤 초휘는 말수와 웃음이 줄어들었다. ‘나이로 볼 때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왔나? 아니면 환경의 변화 때문인가?’ 불안한 생각이 들수록 초휘에 대한 집착도 강해졌다. ‘어느 날 초휘가 갑자기 사라지고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너는 절대 나를 떠날 수 없어, 내가 너를 꼭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자신의 품에 파고들어 곤히 잠든 초휘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애틋함과 함께 마음의 결심도 새롭게 했다. ‘지금까지 너를 얻기 위해 지옥 길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무엇이 두려울까,’ 그녀는 지금의 행복을 이곳에서 굳건히 다지겠다는 각오로 초휘를 꼭 껴안았다.
다시 그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앞으로 초휘를 대학 보내고 결혼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많아 보였던 남편의 남겨진 재산도 이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낮에 마트에서 물건 포장하는 일과 저녁에는 집에서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하는 등 직업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진경 씨! 그 남은 일은 내일 마치고 어서 들어가 봐요, 초휘 하교 시간 되었잖아요.” 처음부터 마트 지배인 추 씨가 유난히 살갑게 대해 주는 바람에 얼었던 그녀의 마음에도 촉촉한 봄기운이 돌았지만, 그녀는 어찌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참! 그러면 뭐 하냐! 유부남 주제에.’ 흔들리는 마음을 달래며 그녀는 초휘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남녀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사랑? 숨어 지내는 내 처지에 가당키나 하나? 또, 초휘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아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나만의 삶에 대한 설계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녀는 남자를 만나 초휘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니야! 지금은 아니다, 자칫 섣부른 방심으로 이제까지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날 수가 있다.’ 그녀는 피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가슴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들이 바위에서 놀고 있다. 찌든 정신은 서울에 두고 홀가분하게 찾은 제주 바다는 그의 마음을 더 먼 남쪽 바다 끝을 향하여 달려가게 했다. 그곳에는 자신이 갈망하는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곳에 은비가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며 너덜너덜해진 심정으로 힘든 날을 보내고 있을 장헌이를 생각하면 혼자 호사를 누리고 있지는 않은지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아무튼, 아내의 요청으로 내려왔지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바다를 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내도 남편의 편안한 표정에 이번 여행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전무님 옛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영선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장난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옛날 생각? 나 말고 생각할 사람이 있기는 했나? 그런데 영선 이는 아직도 전무님이 뭐야? 뭐지? 아주버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하하하 아주버님! 어쩐지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요.”
“그래도 전무님이 뭐야! 지금은 그래도 대표이사 된 지가 언제인데!”
“그렇다고 사장님으로 부르면 더 이상하지 않나요? 차라리 형부라고 부를게요. 하하하!”
“그것은 아닌데! 그러면 관계가 헷갈리잖아!” 처남은 손사래 치며 말렸다.
“그래, 그게 낫겠다.” 아내가 영선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정작 그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나저나 신혼부부 여행에 이렇게 늙은이들이 따라와도 되나?” 그가 영선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나타냈다.
“아닙니다. 매형! 둘만 있으면 심심하다고 이 사람이 우겨서 제가 누님께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처남댁은 술 좀 제법 하는 것 같네.”
“하하하! 제가 좀 좋아하기는 합니다.”
“술은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취하기도 해요.” 그의 걱정에 또 처남이 대신 설명을 했다.
오늘이 휴가의 마지막 밤인데 아내는 벌써 잠이 들었다. 취기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창밖을 보니 검은 바다가 보였다. 그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어둠 속의 바다를 보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은 온몸을 감 싸들고, 칠흑 같은 바다는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가 자신들만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고기잡이배의 등불, 이 모든 풍경은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러하겠지.’ 내일 서울로 올라갈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때 뒤편에 인기척이 있었다.
“전무님 아니세요?” 돌아보니 어느새 영선이 와 있었다.
“발코니에서 보니 전무님 같아 보여 혹시나 하고 내려왔어요.”
“아니 바람이 찬데 그렇게 얇은 차림으로 나왔어, 처남은 뭐 하고?”
“그 사람 잠이 많잖아요, 지금 11시가 넘었는데, 전무님은 아니 형부는 왜 나오셨어요?” 그는 형부란 소리가 무척이나 정감 나게 들렸다.
“저기 검은 파도가 나를 불러서, 아니! 영선이가 불렀구나, 하하하!” 캄캄한 하늘에 갈매기 한 쌍이 끼룩끼룩 울며 사라진다.
“쟤들도 잠이 안 오나 봐, 이 늦은 밤에 어디를 가나?”
“그래도 쟤들은 행복해 보여요, 놀 때 같이 놀고 잘 때도 같이 자고 하겠지요, 하하하!”
“신혼 생활은 어때? 처남이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예, 그 사람은 너무 잘해줘서 제가 미안할 정도예요.”
“다행이네, 이번 여행이 어떻게 맘에는 들었어요?” 그는 지금 상황이 무슨 대화든지 계속해야만 될 것 같았다.
“행복해요! 특히 언니, 형부 같이 와서 너무 좋았어요.” 그는 바람에 날리는 영선의 향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춥지 않아? 옷을 너무 얇게 입었네.” 움츠리는 그녀를 보며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려 했다.
“추워요, 그런데 저 이렇게 하면 안 추워요.” 그녀는 그의 팔을 끼며 가슴으로 기대어 왔다. 순간 그녀의 육감이 진하게 치고 올라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얼떨결에 그녀를 안았으나 이내 놀라 그녀의 팔을 풀어내려 했다.
“영선아 왜 이러나! 취한 거야?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는 호텔 쪽을 둘러보았다.
“전무님 조금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전무님 가슴이 따뜻해요!” 그녀는 더욱 파고들며 그의 허리를 감싸려 했다.
“그만해! 이게 무슨 짓이야!” 그는 당황하여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낮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
“미안, 미안해요.” 그녀는 움찔하며 손을 풀었다.
“괜찮아! 영선이가 오늘 좀 취하긴 한 것 같네, 이러면 안 돼, 어서 들어가자.” 분위기가 심각해진 것에 당황한 그는 그녀를 달래야 했다.
“....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제가 무례했나요? 하지만 너무하세요. 전무님은 제가 전무님을 좋아하는 것 진즉 알고 계셨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제게 냉담하고 모른 체할 수 있으세요.” 그녀는 풀이 죽어 뒤돌아서서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미안해! 화를 내서, 그렇지만 이래서는 안 되지. 그렇게 어려울 때도 잘 이겨냈잖아!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 되겠어? 영선이가 말하였듯이 영선이가 날 생각하는 만큼 나도 영선이를 좋아했어. 그렇지만 그것은 이런 것이 아니잖아,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오늘 저녁 우리가 너무 취했나 봐, 이러지 말고 추운데 어서 들어가자.” 준호가 붙잡으러 한 걸음 다가서자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섰다. 어둠 속에서 빛나던 하얀 얼굴은 이내 뒤돌아서서 바닷가 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를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걱정된 나머지 뒤쫓아갔으나 어둠 속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영선이가 몹쓸 선택이나 하지 않을까 두려웠고 행여 지금 모습을 아내나 처남이 볼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두렵기만 했다. 어둠 속을 정신없이 헤매고 다니던 그는 그녀가 호텔로 다시 들어가지는 않았나 생각하고 호텔 입구로 돌아왔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영선을 보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따뜻한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추운데 어디를 갔다 왔어? 많이 찾았는데.”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앞을 지나 호텔로 들어갔다. 그는 머쓱하여 사라진 그녀의 뒤 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그는 걱정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동안 준호의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영선은 그에게 아침 인사는커녕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한마디 말도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처남은 그녀의 기분을 맞추려 애를 쓸 뿐 그녀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