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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의 졸업

두 번의 임신-출산보다 힘겨웠던 박사 논문 “낳기”

지난여름  썼던 글을 마지막으로 나는 본격적인 ‘출산 준비했다. 이미  명의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지만 이번엔 달랐다. 8  잉태해    번째 자식, 박사 논문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8  모든 순간 박사 논문에 집중했던 것은 아니다. 3 반의 코스웍과 GA Ship, 그리고 박사 수료를 하자마자 찾아온 첫째, 연달아 코로나 중에 찾아온 둘째를 차례대로 낳아 키우며 이후 4년을 보냈다. 결국 입학 9 차가 되었던 올해 여름,  박사 논문을 마치고 졸업을 했다.


지난번 글에서 왜 박사 논문을 쓰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솔직하지만 핑계가 잔뜩 섞인 고찰을 했었는데, 이번 여름 박사 논문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도 같은 생각과 고민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건 쓰면서도 확신이 들지 않는 내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 상황이었다.


무조건 힘들고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한국어 대화를 분석하는 사람이고,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한국어의 쓰임의 학문적인 설명을 학계의 기존 연구에 살짝 보태는 작은 역할을 할 뿐이지만, 아직 활발히 되어있지 않은 연구 분야에 대해 새로운 설명을 보탤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될 때 나는 보람을 느낀다. 내 논문도 일종의 그러한 기회였던 것 같다. 재미있는 주제를 찾았고, 재미있는 자료를 가지고 분석을 했고,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논문을 쓰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여름 내내 논문을 쓰며 사실 너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쌓여서 마음이 복잡했는데, 논문을 마칠 때까지, 심지어 논문을 마치고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이걸 풀어낼 기회가 없었다. 출산을 두 번 하고 기억력 감퇴를 경험하며 느낀 건,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은 잊어버리기 전에 당시의 생각과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문에 대한 글을 쓰기 망설여졌지만 최소한 어떤 감정들이 나를 찾아왔었는지 기록하고 싶어졌다.


첫 번째로, 좌절감과 억울함이었다. 좌절감은 우리말로 하니 너무 무거운 단어인 것 같고, 영어로 frustration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논문을 써야 하는데 논문을 쓸 시간이 없다는 것에 큰 좌절과 억울함을 느꼈던 것 같다. 노트북만 열면 쪼르르 달려와 칭얼대는 어린 만 2세, 4세 남매를 밀어내며 10분이라도 더 내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하는 엄마의 좌절감과, ‘이런데 어떻게 논문을 쓰라는 거야’ 식의 대상 모를 억울함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숨이 막혔다. 잠을 하루 4시간으로 줄여 봤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쓸 시간이 필요했다.


두 번째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결국은 내 상황을 아신 부모님이 무리를 해가며 하와이에 오셔서 한 달 반을 있다 가셨다. 이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써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자연스럽지만 강렬하고 모순적인 감정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 달 반 동안 작은 우리 집 안에서만 칩거하듯이 계시며 아이들을 봐주시고 살림을 해주시던 부모님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조금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귀여운 아이들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하는 시간도 처음에는 특별했지만, 결국 가족의 중심인 내가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 종일 일을 하는 상황에서는 매일이 반복되는 힘겨운 일상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드신 부모님은 한창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을 감당하실 수가 없었고, 결국 나는 육아에서 손을 떼는 데에 다소 실패했다. 학교를 가든 도서관을 가든 반나절이 최대였고, 아이들 밥을 챙기고 한국말을 못 하는 남편과 부모님 사이 통역을 하기 위해 집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달라붙을 때마다 나는 짜증이 났고, 당연히 차가운 태도와 모진 말들이 따라붙었다. 마음이 아프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도 당장 내일 할 일이 넘치고 시간은 부족했다. 논문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열등감과 불안함이었다. 박사 논문이 이렇게 누추해도 되는 것인지, 용두사미가 된 것은 아닌지, 만약 제 기한 안에 끝낼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교수님과 커미티 멤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자면서도 불안감에 자꾸만 잠을 깼다. 다른 사람들의 박사 논문을 찾아보면서, 그들에겐 있지만 나에겐 없는 것을 찾으면 불안했고, 자꾸만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8년 만의 박사 논문이라고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결국 내 논문은 3년 반 차에서 멈춘 그대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박사 논문을 마치고 졸업한 이들, 그들도 다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란 걸 느끼게 되었을 때, 모두에게 경외감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과연 부끄럽지 않은 퀄리티의 논문을 쓸 수 있을까 불안감이 자꾸만 차올랐다. 논문이 반 이상 진전되었을 무렵,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에서도 ‘더 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네 번째, 송구함과 부끄러움이다. 박사 수료를 마치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지도교수님은 직접 베이비샤워를 열어주셨다. 그리고, 임신 중에도 공동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출산 때문에 학회에 가지 못했을 때도 대신 참석하셔서 발표를 해 주셨다. 둘째를 출산하고 (남편의 사고까지 겹쳐) 우울증에 짓눌려 있을 때도 지도교수님은 공동 작업을 이끌어주시며 가장 잘 나가는 저널에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리게 해주셨다. 또 급하게 논문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도 어떤 재촉이나 꾸중도 없이 믿고 기다려주셨다. 이런 은인 같은 교수님께 성실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고 감사함에 보답하고 싶은데 정작 논문을 쓰면서 나의 게으름과 무책임함, 무능력 등 바닥을 모두 보여드리게 되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 컸다. 우여곡절 끝에 논문이 마무리되고 통과된 날, 나는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이메일을 보냈고, 교수님께서는 ‘네가 정말 정말 자랑스럽다’는 답변을 보내주셨다. 잘했다, 수고한다는 칭찬은 들었어도 자랑스럽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라 눈물이 왈칵 났다.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그 또한 모두 지나갔고, 나는 이름 옆에 PhD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나에게 이 타이틀은 좀 과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부족한 내가 이 타이틀을 달기까지 고생하고 좌절했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 시간들이 준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석학들은 박사 논문도 굉장할 때가 꽤 있는데, 나도 박사 초년생 시절에는 어렴풋이 그런 멋진 논문을 써야겠다는 의욕이 있었었다. 물론 그런 욕심은 박사 논문을 쓰며 내 부족함을 확인하고 모두 접었다. 박사 논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들 한다. 혹자는 운전면허 같은 것이라고도 한다. 연구를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받는 면허 시험 같은 것이랄까? 나는 이 면허 시험도 딱히 충실하게 통과한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면허가 내 손에 들어왔으니 앞으로의 노력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운이 좋게도, 나는 졸업과 동시에 모교에 전임강사로 임용이 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기에,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논문과 졸업, 취업에 대한 이야기를 내 입장에서 풀어내길 망설였던 것도 어찌 보면 길고 긴 고통의 잉태 기간 끝에 논문을 낳고, 모든 행운이 찾아온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할 여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왜 논문을 쓰지 못할까’라는 지난 글에서 빨리 모든 걸 끝내놓고 아이처럼 울고 싶다는 표현을 썼는데, 아직 나는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혼자 울(거나 웃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뤄낸 것들이 너무 믿기지 않고 소중해서 행여나 사라질까 몹시 긴장했던 것 같다. 이 공간에 글을 계속 쓰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종결되지 않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 싫어서 언급과 평가를 아끼려는 마음. 그리고 해피엔딩 이후에도 해피할 수 없는 이상한 심리. 마치 큰 무대를 선보이고 내려와서 깊은 허전함을 느끼는 공연예술인처럼, 나도 피로감이 섞인 허전함을 늘 지니고 있다.


졸업 전에는 졸업 이외의 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사치스럽고 건방지고 오만한 자세라고 생각했지만, 앞으로는 조금씩 내 진짜 꿈에 대해서도 스스로 생각해 보고 작은 발걸음을 살살 떼어보면 어떨까 싶다. 일 년 뒤의 나는 지금의 이 글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그때쯤엔 조금만 덜 불안하고 조금만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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