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9년 차에 애 둘을 낳고 든 생각
2015년 봄에 박사과정에 입학한 지 벌써 9년째다. (방금 9라는 숫자를 쓰고 기함했다.) 나는 왜 졸업을 하지 못하고 10년 가까이 학교에 남아있는 걸까? (석사까지 치면 이미 13년) 2018년 박사 수료 상태로 진급을 한 뒤, 한 1년 열심히 티칭만 하며 쉬다가 여유 있게 논문을 써서 졸업하려고 했는데… 몇 달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2019년에 첫 아이를 낳고 2021년에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2018년에 써놓았던 프로포절은 열어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이 초라한 문서를 열어서 내가 떠난 자리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 둘째를 낳고 약 1년 뒤니까 약 4년이 걸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뜯어고치고 싶은 욕구를 참아가며 살을 붙일 내용을 찾는데 또 반년 가까이 걸렸다.
아직도 나는 내 논문이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다. 왜 그런 걸까? 나는 왜 제대로 된 한 문장 쓰기가 이렇게 어렵고 늘 주위만 빙빙 도는 걸까? 머릿속에는 이렇게 이렇게 써야지 하는 계획들이 충분히 있고 하루 종일 그 생각들을 떠올리고 수정하며 지내고 있는데, 막상 내 논문에 문장 하나 써넣기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작년 여름부터 8개월 동안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최소 2-3시간씩 공부를 하고 있다. 논문에 필요한 책도 읽고, 중요한 부분은 발췌와 필사도 하고 데이터도 수집하고 분석하고 있다. 티칭을 다시 시작한 이후로는 수업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아쉽게 보낼 때가 많지만 그래도 10분이라도 짬이 나면 논문에 신경을 쓰도록 하고 있다. 확실히 큰 그림은 더 또렷이 그려지고 있지만 내 문장은 별로 쓰지 못했다.
내 목소리를 문장으로 옮기는 것은 가면 갈수록 어렵다. 영어 전공이지만 원어민이 아니라서 영어로 글을 쓸 때는 늘 ‘영작’하는 느낌이었는데, 논문을 쓸 때는 영어가 내 언어라고 생각하고 써야 나중에 봐도 문장이 군더더기가 없다. 그리고 논문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쓴 단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한 단어 한 단어 꾹꾹 눌러써야 한다.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학자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확인하지 않고 부주의하게 사용한다면 내 논지에 대한 타당성과 신뢰성도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장을 쓸 때는 꼭 누가 보고 있는 것처럼 긴장되고 부끄럽다.
나보다 늦게 입학한 학생들도 하나둘씩 졸업을 하고 있다. 물론 그중 애를 둘 낳은 사람은 나뿐이지만, 모두가 다른 속도로 자기만의 작품을 완성하고 있지만, 그래도 계획보다 뒤처지는 느낌은 나를 침울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내가 연 이 문을 성실하게 닫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쓴 이야기의 끝은 맺어야 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뭐라도 쓰려고 치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새벽이 최고인데, 그래도 불안해진다. 외롭고 막막하고… 아이들이 없을 때는 밤을 새우고 아침에 잠들어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해도 됐지만 지금은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새벽 6시면 일어나는 둘째가 잠에서 깨기 전에 얼른 하나라도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마치 도서관에서 방대한 책의 선택지 앞에서 긴장감으로 아랫배가 콕콕 쑤시는 것처럼 초조함에 휩싸인다.
과거의 (아이가 없던) 나는 그렇게 불안할 때마다 영상이나 음악을 화면 한쪽 구석에 틀어놓고 하루 종일 하염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페이퍼를 썼다. 가끔 좀 집중이 안 되더라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정신이 돌아오겠지 하면서 책상 앞에서 밥도 먹고 엎드려 쪽잠도 자며 수험생처럼 생활했었다. 좀 징그럽지만 박사 종합시험을 볼 때는 3주간 매일 그렇게 책상 앞에서 생활했다. 힘들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다. 그 시간이, 자유가 너무 그립다. 지금은 3시간 이상 혼자만의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3시간이 30분처럼 금방 지나간다.
작년으로 정해 놓았던 졸업 시기가 올해 초로 미뤄지고, 또 한 번 더 미뤄져서 다음 가을 학기가 목표가 되었다. 이제 더 미루면 취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기에 꼭 졸업을 해야 한다. 고집 센 완벽주의 벼락치기 장인은 과연 흡족하게 논문을 완성하고 졸업할 수 있을까? 아니면 논문도 벼락치기로 완성할 것인가? 시간 분배와 데드라인, 퀄리티 사이의 함수는 늘 풀어내기 힘들다. 데드라인에 끌려 다니는 삶은 진절머리 나지만 데드라인이 없으면 뭐든 생각만 하다가 하염없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이건 공부뿐만이 아니다. 업무, 프로젝트, 심지어 다이어트도 시간과 과정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은 너무 힘든 것 같다. 오래된 나쁜 습관을 끊어내고 새로운 마인드셋으로 작업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동기와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은 3월 초, 5월 초면 학기가 끝난다.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 큰 진전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여름이 되면 조금 나아질 테고 나는 졸업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내겠지. 9-10월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논문 디펜스가 끝나고 레이를 목에 걸고 그동안 키워주신? 교수님들과 허그하면 어떤 기분일까. 벌써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왜일까. 얼른 긴 여정을 끝내고 침대에 누워서 아이처럼 울고 싶다. 힘내자 그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