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잡니다. 꿈을 이뤘거든요

(독서, 골목 서점 연탄난로 옆에서 그린 내 미래)

by 김보성

한겨울 불어오는 칼바람에 몸을 한껏 움츠리며 한 손은 무거운 책가방을, 한 손으로는 볼을 비벼가며 까까머리에 중학교 교모를 눌러쓰고 잰걸음으로 골목에 들어선다. 요즘 같으면 반짝이는 간판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 옛날 골목길 작은 서점에는 옅은 조명으로 보이는 빽빽한 책들로 서점의 위용을 드러낸다. 차가운 서점 문의 손잡이를 옆으로 밀어 들어서면 쿱쿱한 오래된 책 냄새들이 편안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3구짜리 연탄난로 위에 황금색 찌그러진 큰 물 주전자가 수증기를 만들고 금세 사라진다. 서점 주인아저씨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며 씨익 웃으면서 반겨 주신다.


어느 날 참고서를 사러 갔다가 눈에 들어온 문고집에 이끌려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외국 고전을 한참 쭈그려 앉아 읽고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난로 앞에 의자들을 가리키며 앉아서 읽고 가도 된다고 한다. 그 후로 한두 달에 한 번 용돈을 아껴 마음에 드는 책을 사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서점에 있는 책을 읽으러 갔다.

난로 앞 의자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책 속에 빠져들어 갔다. 그럼에도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는 언제나 미소로 맞이해 준다. 아마도 쬐그만 중학생 녀석이 나름 진지하게 책을 읽는 모습이 귀여웠나 보다. 시험 기간이 아니면 대부분의 날 들을 방과 후에 골목 서점으로 향했다. 난로 옆 의자에 앉아 벽에 나란히 꽃혀 있는 삼중당 문고들을 좋아했다. 한 뼘 크기의 문고 책들은 내용과 상관없이 만만해 보였다.


가지런히 고르기 좋게 꽃혀 있어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으며 전쟁의 참상이나 허무주의에 대한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읽기도 하고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을 읽으면서 조국보다는 이성을 떠 올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한하운 시집 ‘보리피리’속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를 읽고 작가의 절박한 심정이 어린 마음에 큰 감동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불현듯 나이 들었을 때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매일 매일 시험 걱정 없이 책을 읽으면서 죽을 때까지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막연하게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으면서 살리라. 그때는 나에게 아내나 딸들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저 혼자서 이런 시간 들을 보내면 좋겠구나, 라며 미래를 꿈꾸었다.


묻어 두었던 꿈은 나의 은퇴와 함께 현실로 다가왔다. 현직에 있을 때는 책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업무와 스트레스로 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손안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책은 멀리하게 되고 습관처럼 유튜브를 서핑하고 생활에 밀접한 경제나 좋아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흘려보냈다.


은퇴 후 당진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랐다. 내가 선택한 첫 책은 최진기의 ‘나를 채우는 인문학’으로 부제는 ‘문득 내 삶에서 나를 찾고 싶어질 때’와 Wonderful Wizard of Oz by L.Frank Baum 였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던 때에 제목이 나를 끄집어 당겼다. 역사, 인물, 교육등 여러 가지 주제에 맞는 책과 함께 책에 담긴 의미와 독서 노하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여유로울때 쉬운 영어책부터 한 권씩 읽자고 마음먹었다. 처음 읽은 책이 강렬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당진 도서관은 앱으로 운영하고 있어 대출 이력을 보고 알게 됐다.


처음에 집중이 되지 않고 자꾸만 다른 상념들이 떠올라 무슨 내용을 읽었는지 잊어버리고 다시 앞쪽을 읽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읽는 것에 흥미를 느끼면서 책의 분야도 세계사, 인문학, 철학, 사회과학. 고전등 넓혀 나갔다. 일주일에 두 세권을 읽었다. 일년여 만에 백 오십권 정도 읽었는데 돌이켜 보니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소설책들은 제목을 기억하는 것은 둘째치고 읽었던 책 제목을 봐도 내용이나 줄거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읽는 것이 맞는 걸까. 그저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읽고 있던 그 순간이 좋았던 것이다.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던 책들을 빼고는 기억에 전혀 남지 않아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닐까. 좀 더 효율적인 독서 방법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독서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문구나 마음에 드는 문구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필사를 하면서 읽기 시작하니까 책을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지는 단점이 생겼다. 그래서 연필을 가지고 필사할 부분을 체크하고 페이지를 작은 수첩에 적어 가면서 읽으니 독서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속도도 보장해 주었다. 문제는 한 권을 다 읽고 필사를 하는 시간을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다행히 필사 부분이 적은 책은 금방 넘어가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회과학책이나 인문서들은 필사할 부분이 많아져서 시간을 더 쪼개 여야만 했다. 보통은 책을 읽는 시간을 지정해서 읽는데 이제는 잠들기전 아침 일찍 일어나면 짜투리 시간도 독서 하는데 투자를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잠이 오질 않아 새벽 2시를 넘기곤 한다. 주로 유튜브를 보다가 자기 위해 눈을 감으면 한두 시간은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알고 보니 모니터나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에서 나오는 블루라이트는 뇌에 낮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잠이 오지 않게 된단다. 이 때문에 전자기기를 사용하면 잠드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거나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잠자기 전에 책을 읽기 시작했더니 불면증이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비스듬이 침대에 않아 책을 읽다 보면 한두 시간안에 졸음이 오고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든다.


책을 읽어서 좋고 불면증이 사라지니 활기찬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은퇴 해서 독서를 하며 파란만장한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하고 수천년전부터 현재까지의 성인들과 학자들의 책을 통해서 나는 인생의 지혜를 얻는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지식과 정보들에 대해 좀 더 깊은 사고(思考)를 하게 만들어 준다.


중요한 변곡점은 여러 인문 사회과학책을 통해 내가 평생 고집해왔던 삶의 태도와 고정관념들을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다니엘 코엔의 ‘악의 번영’에서 경제가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거꾸로 인류의 역사가 불변의 경제법칙을 어떻게 변화 시켰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고 데이비드 브룩스의 ‘사람을 안다는 것’에서 “마음을 여는 일은 충만하고 친절하고 현명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바라봄으로써 그 사람이 자신을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게 만드는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하도록 도와 준다. 살아오면서 궁금했던 것, 의문이 갔던 것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다.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자연의 법칙과 생명의 기원등 알아 보고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에서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중학생 때 꿈꾸었던 미래를 실현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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