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못 그리세요? 그렇다면 추천합니다

(수채화에서 좌절 어반드로잉에는 만족)

by 김보성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술 시간은 힘든 과목이다. 그림 그리기에 남 다르게 뒤 쳐져있던 나에게는 고뇌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냥 못 그린 정도가 아니라, 종이에 연필이 닿는 순간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아그리파를 데생하게 됐다. 이것이 사람인지 원숭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 였다. 살아가면서 화가가 될 것도 아닌데 그림이 나에게 무슨 관련이 있겠나. 글씨도 악필이고 그림도 못 그리고 어쨌든 나에게 그림과 글씨는 넘지 못할 산 같은 존재였다. 다행히 글씨는 컴퓨터가 대체해 주어서 아무 걱정 없이 지나며 살아왔다. 그림 또한 내가 살면서 드러낼 일이 전혀 없는 것이라서 불편함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평생 그림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은퇴를 하고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했다. 다행히 악기를 다루는 데는 소질이 있어 기타를 제법 잘 쳤고 새롭게 도전한 드럼도 진도가 빠르게 진행됐다. 여기에 막연한 자신감을 얻은 나는 그림에 도전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어렸을 적 좌절했던 그림에 덜컥 도전해 보기로 했다. 죽기 전에 내게 열등감을 줬던 것 그림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졌다.


매년 2월이면 당진 문화예술학교에 등록 공지가 뜬다. 십여 가지 과목들 중에 선택해서 등록을 하면 일 년 단위로 배울 수 있다. 당진 문화예술학교 공고에 들어가 과목들을 들여다보니 인물화, 수묵화, 수채화. 등이 있다. 물감을 사용해 여러 가지 색상을 연출할 수 있는 수채화. 일단 등록하자. 시작이 반이다.


마법에 이끌리듯 등록을 하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여성분들이었고 그림을 계속 그려오던 고수의 남성 한 명이 있다. 안 그래도 쫄리는 기분이었는데 좀 더 위축된다. 새로 들어온 신입생은 다섯 명, 나머지 열 분은 선배님들이다. 처음에는 4B 연필로 데생을 배운다. 원기둥을 보고 명암을 구분해서 입체감 있게 그리는 것이다. 힘겹지만 그럭저럭 쫓아간다. 원근감을 그리는 일점 투시, 이점 투시, 삼점 투시를 배우며 그린다. 수채화의 기초인 데생을 배우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 없이 진도를 따라갔다.


본격적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강사님이 추천해 준 물감과 붓 등 도구들을 구입했다. 수채화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예술. 처음 시작하면 우아함은커녕 종이가 물난리를 겪으며 혼란에 빠진다. 연필로 데생을 할 때는 명암도 표현되고 입체감도 살아났다. 수채화를 그리면서 명암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알맞은 색상을 배합해서 만들어 내야 하는데 나에게는 힘든 일이다.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그리는데 아무리 봐도 사과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아그리파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어찌어찌하여 꽃도 그리고 과일도 그리고 하면서 풍경에 들어갔다. 강사가 단톡방에 풍경 사진들을 올리면 선택해서 그리는 것이다. 단품을 조그맣게 그리는 것과 8절지에 꽉 차게 그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하늘과 산, 나무, 집, 길 등을 조화롭게 표현해야 한다. 스케치까지는 항상 무난하다. 색을 칠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이 기괴한 우주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인고의 시간을 일 년 넘게 버텨왔다. 오! 통재라. 진척이 없다. 소질이 없는 것은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음 해에 다시 예술학교에 공고가 올라오고 고민에 빠졌다. 의지의 한국인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이대로 좌절할 것인가. 아무래도 나의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미련은 남았다. 채색만 들어가지 않으면 스케치는 그런대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어반드로잉이라는 과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해 처음으로 다시 시작된 강좌이다. 어반드로잉(Urban Drawing)은 도시의 풍경이나 일상을 즉흥적으로 스케치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어반스케치라고도 불리며, 특정 장소에서 직접 관찰한 모습을 빠르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도 스케치는 웬만큼 진도를 따라갔으니 한 번 재도전해 보기로 했다.


드디어 가슴 떨리는 첫 수업이다. 처음으로 개설한 과목이라서 선배도 없다. 보통 그렇듯이 오전에 수업하는 과목에는 거의 여성분들이다. 남성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왠지 쑥스러워서 도전하기를 꺼린다. 여지없이 10명의 수강생 중에 남자는 나 하나다. 그래도 상관없다. 사십대에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도 남자는 나 하나였다. 5학기 내내 경쟁 상대 없이 꽃밭에서 누려본 경험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어반드로잉은 처음에 연필을 집는 대신 드로잉 펜을 사용한다. 실수해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강사는 말했다.

“어반 드로잉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넘어, 도시의 분위기와 순간을 기록하는 역할은 한다. 완벽한 그림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림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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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그리려고 꼼꼼히 그리지 말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 매력적이다. 그날부터 한 달을 넘게 매일매일 그림 하나를 그려서 단톡방에 올리는 숙제를 했다. 처음에는 화분으로 시작해서 운동화, 카메라, 핸드폰 등 일상에서 보이는 많은 것들을 그렸고 다음으로 도시의 풍경이나 건물들을 그려 나갔다. 가장 좋았던 것은 8절지의 큰 스케치북에서 한 뼘 정도의 크기로 그림이 작아졌다는 것이다. 균형이 조금 일그러져도, 잘 표시가 안 나고 건물들은 미니어처처럼 앙증맞고 귀엽기까지 하다. 그림 크기가 줄어드니 그리는데도 부담이 덜 갔다.


예술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 연말에 발표회를 가져야 한다. 한 해 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표현하는 시간들이다. 악기를 하는 사람들은 연주를 하고 그림이나 공예,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전시를 해야 한다. 나의 주제는 내가 사는 ‘순성’이라는 동네를 그렸다. 순성의 행정복지센터, 맛집들, 커피숍, 성당, 나의 집 등을 손바닥만 한 종이에 파노라마처럼 연결되어 접힌 화첩에 그려 나갔다. 오밀조밀 그려진 내 그림들은 수채화에서 좌절됐던 쓰라린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잘 그렸다기보다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이 됐다. 내 모토인 내가 만족하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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