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과를 넘어 형세로

순간의 배치와 의미 있는 우연

by 이제

※ 원문: C. G. Jung, Foreword, The I Ching or Book of Changes, translated by Richard Wilhelm (English version by Cary F. Baynes).

[번역문 | 칼 구스타프 융, 리하르트 빌헬름 번역 『주역』 서문 중 — 필자 번역]


나는 중국학자가 아니며 중국에 가본 적도 없다. 이 책이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도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이 중국 사상의 기념비와도 같은 저작에 접근하는 올바른 길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말해 두고 싶다.


이런 책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이해하려면, 서구적 사고방식이 지닌 몇 가지 선입견을 반드시 벗어던져야 한다. 이렇게 재능 있고 지적인 민족인 중국인이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과학’을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은 인과성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인과성은 자명한 공리적 진리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관점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이루지 못했던 일을 현대 물리학이 이루고 있다.


인과성의 공리들은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자연법칙이라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통계적 진리에 불과하며, 따라서 반드시 예외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자연법칙의 변함없는 타당성을 증명하려면, 날카롭게 조건을 통제한 실험실 환경이 필요하다는 점도 우리는 아직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사물을 자연 상태에 맡겨 두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모든 과정은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방해를 받으며, 자연적 상황에서는 특정 법칙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건의 전개가 오히려 거의 예외에 가깝다.


내가 『주역』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통해 보건대, 중국인의 정신은 사건의 우연적 측면에 거의 전적으로 주목하는 듯하다.


우리가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것이 이 독특한 정신의 주된 관심사처럼 보이며, 우리가 숭상하는 인과성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지나간다.


우리는 우연이 지니는 막대한 중요성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엄청난 노력은 우연이 가져오는 불편이나 위험을 극복하고 제한하는 데 쏟아지고 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론적 고찰은 실제로 나타나는 우연의 실질적 결과와 비교해 보면 종종 빛이 바래고 먼지 낀 것처럼 보인다.


석영 결정이 육각기둥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다. 이상적인 결정을 상정한다면 그 진술은 분명 참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는 완전히 똑같은 결정 두 개를 찾을 수 없다. 모두가 분명히 육각형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동일하지는 않다.


실제의 형태가 이상적 형태보다 중국의 현자에게는 더 큰 호소력을 지니는 듯하다. 경험적 현실을 이루는 자연법칙들의 뒤섞임이, 사건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방식—게다가 그런 설명은 대개 사건들을 서로 분리해 다루어야만 가능한데—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주역』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의 인과론적 절차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관찰되는 순간은, 서로 맞물린 인과 사슬의 과정이 만들어낸 분명한 결과라기보다는, 고대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우연한 적중처럼 보인다.


관심의 대상은 우연한 사건들이 관찰의 순간에 형성하는 ‘배치’이며, 그 일치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줄 것처럼 보이는 가설적 이유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서구의 정신이 신중하게 걸러내고, 저울질하고, 선택하고, 분류하고, 분리하는 데 힘쓴다면, 중국적 순간의 그림은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괄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요소가 바로 관찰되는 그 순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원인과 결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있다.


석영이 육각기둥이라는 구조를 가졌어도 모양이 제각각이듯,

불변의 법칙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주역은 이렇게 다양한 실제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배치와 관계를 본다.
원인에 대한 가설보다, 눈앞에 나타난 현상의 전체 모습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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