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연의 미학

시간의 무늬

by 이제


※ 원문: C. G. Jung, Foreword, The I Ching or Book of Changes, translated by Richard Wilhelm (English version by Cary F. Baynes).

[번역문 | 칼 구스타프 융, 리하르트 빌헬름 번역 『주역』 서문 중 — 필자 번역]


"따라서 세 개의 동전을 던지거나 마흔아홉 개의 산가지(蓍草)를 세는 행위를 할 때, 이러한 우연적 세부 사항들은 관찰의 순간이라는 전체 그림 속으로 들어와 그 일부를 이룬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사소해 보이지만, 중국인의 정신에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부분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특정한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그 순간 특유의 성질을 지닌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진부하고 거의 무의미한 주장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논증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주장이다.


어떤 감정가(鑑定家)들은 단지 와인의 빛깔, 맛, 그리고 특성만 보고도 그 포도밭의 위치와 생산 연도를 알아맞힐 수 있다. 또 어떤 골동품 감정가들은 예술품이나 가구를 한 번 보기만 해도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정확성으로 그 제작 시기와 장소, 제작자를 말해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점성술사들은 당신의 출생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어도, 당신이 태어난 순간 태양과 달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어떤 황도대 별자리가 지평선 위로 떠올랐는지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순간이라는 것이 오래 지속되는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I Ching』을 만든 사람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산출된 괘(卦)가 단지 시간적으로만 그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質)에 있어서도 그 순간과 일치한다고 확신했다. 그에게 괘는 그것이 던져진 순간의 표현이었으며, 시계의 시간이나 달력의 구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그 순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괘는 생성된 그 순간에 지배하고 있는 본질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지표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와인 감정가나 골동품 감정가의 능력은 , 오랜 경험과 통계적 학습을 통해 축적된 인과적 데이터의 결과다.


한편으로 점성술사의 직관 역시 이것을 신비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반복된 경험 속에서 형성된 감각으로 보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례는 결국 인과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남기지만 융의 논점은 다른 곳에 있다.


아마도 융이 이런 예시를 든 이유는, 모든 현상에는 그것을 규정하는 시간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숙련된 이가 사물의 미세한 흔적에서 그 기원을 읽어내듯, 우리는 ‘지금’이라는 순간이 지닌 고유한 결을 감각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겉으로는 인과적 숙련처럼 보이지만,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숙련된 감각이 포착하는 ‘순간의 고유한 문양’ 일 것이다.


'순간의 질'이란 그 순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상황의 표현으로 이는 존재론적 주장에 가깝다.

세계는 각 순간마다 고유한 구조를 지니며, 괘는 그것을 드러낸다는 생각이다.





다음 이야기

시간이 단순히 흐르는 숫자가 아니라 고유한 품질을 가졌다면, 이 '우연'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다음 글에서는 융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개념, 원인 없는 결과들의 비밀인 '동시성(Synchronicity)'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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