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으로 느끼는 내 삶의 미분 계수
※ 원문: C. G. Jung, Foreword, The I Ching or Book of Changes, translated by Richard Wilhelm (English version by Cary F. Baynes).
[번역문 | 칼 구스타프 융, 리하르트 빌헬름 번역 『주역』 서문 중 — 필자 번역]
이 가정은 내가 '동시성(Synchronicity)'이라 명명한 어떤 묘한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인과율(Causality)과는 정반대 되는 관점을 공식화한 개념이다. 인과율은 단지 통계적인 진실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사건들이 어떻게 서로를 매개로 전개되는지에 대한 일종의 '작업가설'에 불과하다. 반면, 동시성은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일치가 단순히 우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즉, 객관적 사건들 상호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관찰자의 주관적(심리적) 상태와도 밀접한 상호 의존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의 사고방식은 현대 물리학자의 관점과 비교될 만한 방식으로 우주를 바라본다. 현대 물리학자들 또한 자신의 세계 모델이 명백히 '정신-물리적(psychophysical)' 구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미시물리적 사건에 관찰자가 포함되듯, 『주역』의 근저에 깔린 실재 또한 순간적인 상황의 전체성 안에서 주관적(심리적)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인과율이 사건의 '연쇄'를 설명한다면, 중국적 사고에서의 동시성은 사건의 '일치'를 다룬다. 인과론적 관점은 'D'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D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C에서 기원했고, C는 다시 그 아버지인 B로부터 나왔다는 식이다. 반면에 동시성적 관점은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그에 못지않게 의미 있는 그림을 제시하려 한다.
"어떻게 A', B', C', D' 등이 모두 같은 순간, 같은 장소에서 나타나게 되었는가?" 동시성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우선 물리적 사건인 A', B'가 심리적 사건인 C', D'와 동일한 질(Quality)을 공유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이 단 하나의 동일한 순간적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 상황 자체가 하나의 읽어낼 수 있고 이해 가능한 상(picture)을 나타내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융이 말한 동시성이 순간의 ‘배치’를 읽는 일이라면,
나는 그 배치 속에서 ‘기울기’를 느끼려 한다.
우리는 흔히 삶을 ‘적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어제까지의 노력, 쌓아온 커리어,
지나온 실패와 상처가 켜켜이 쌓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융은
인생의 결정적인 답이
때로는
‘지금 이 찰나’에 있다는 설명을 한다.
그는 그것을
동시성(Synchronicity)이라고 부른다.
괘를 뽑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동전의 앞뒤는
단순한 확률의 결과라기보다는
동전의 물리적 움직임과
그 순간 질문자의 심리 상태가
잠시 겹치는
하나의 장(field)이라는 것이다.
주역의 음(--)과 양(—)을
반도체의 n과 p에 비유해 보면 어떨까.
p(+)는 비어 있음으로 흐름을 만들고,
n(-)은 채워짐으로 균형을 이룬다.
하나는 밖으로 열리고,
하나는 안으로 모인다.
둘은 대립하지만,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뽑는 하나의 괘는
천·인·지라는 3층 구조 속에서
지금 내 에너지 회로가
어떤 코드로 배열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스냅숏에 가깝다.
그것은 미래를 예언한다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배치를 드러낸다.
운이 좋았다거나
신기한 우연이었다라는 말들은
혹시
내면의 에너지 회로와
외부 세계의 흐름이
잠시 완벽하게 위상 정렬된 순간은 아닐까.
수학에서 미분은
곡선의 ‘찰나의 기울기’를 구하는 일이다.
적분이
지나온 면적의 총합이라면,
미분은
지금 이 점에서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묻는다.
“과거가 이랬으니 미래는 이렇겠지.”가 아니라,
“과거가 무엇이었든,
지금 이 찰나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상승의 기울기를 더 키우는 구간인가,
아니면
기울기가 0에 가까워지며
방향이 바뀌려는 변곡의 문턱인가.
인공지능은
오차를 줄이기 위해
미분을 사용한다.
조금씩 방향을 수정하며
손실을 낮추고,
더 나은 경로를 향해 나아간다.
어쩌면 우리도
쌓여온 시간 위를 걷고 있지만,
실제로 감각해야 할 것은
지나온 총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경사인지 모른다.
지금 나는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는가.
이런 측면에서
주역의 괘는 스케이트보드다.
길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의 감각을 온몸으로 전달하며
지금의 경사에 몸을 싣는 보더처럼,
세상과 나 사이의
미세한 신호를 느끼게 하는
감각의 판이다.
다음 이야기
이제 융은 직접 동전을 던지면서 묻는다.
"주역아, 내가 너를 서구에 소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