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나긴 마라톤 파트너
브런치의 독서챌린지를 위해서『천 개의 고원』을 아주 오랜만에 펼쳐 읽었다.
2016년 1월 초 알라딘에서 구입했다고 메모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읽기를 시도했던,
비장한 결심이 적힌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어느새 종이는 누렇게 삭아가고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도 읽지 않았다고도 할 수가 없다.
짐정리를 하면서 버린 책들 중에서 남겨 둔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다.
『주역』과도 맥락이 닿는 것 같아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서양철학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차라리 원문을 더듬어 배워가며 읽는 편이 오히려 쉽지 않을까라는.
이 말이 혹시라도 번역하신 분에 대한 불평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보다는 철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고 난해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다 같이 생각해 볼 문제다.
왜냐하면 같은 번역서라고 해도 문학작품은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 읽히니까.
한강 작가 덕분에 이제는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한글로 쓰인 한강의 작품이 영문으로 번역된 것은 어떤 느낌일까.
모국어로 쓰인 작품을 읽을 때와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그 차이를 알고 싶다.
그러면 서양철학 번역서를 읽을 때의 답답함이 해소될까?
철학은 어렵고 문학은 쉬운가?
그런데 사실『천 개의 고원』이 철학서인가?
이 책을 아주 오랜만에 펼쳐 들고 읽으면서 새로운 것을 느꼈다.
이전에는 막연하게 너무 어렵고, 이해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다가 책장을 덮었다면
이번에는 누군가와 함께 강변을 달리면서 얘기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나란히 가볍게 달리면서 말을 주고받을 때 그 이야기를 전부 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거친 숨결과 스치는 바람 속으로 상대방의 말이 뚝뚝 끊겨 잘 안 들려도
"뭐라고?"라고 되묻지 않는다. 그냥 계속 달리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
도무지 현란하고 혼란한 이 책의 문장들은, 강변을 달리며 스치는 바람결이고
내 정수리에 내려 쪼이는 햇살 같은 것이었다.
<오늘은〔7장. 0-얼굴성〕을 읽었다.
내용 정리는 블로그에 발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