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졌다, 졌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해라’라는. 상대 팀을 향한 눈물의 호소와 통곡만이 처절한 울림으로 마음속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한민족끼리 이래도 된단 말인가?’ 4월 25일의 OB전은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경기였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이날의 경기에 관해서는 긴 말을 하고 싶지 않다. ‘8점 차’라는, OB의 최다 점수차 역전승으로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게 된 이 경기. <중략> 불쌍한 소년들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나오게 하고, 그 괴로움으로 땅바닥에서 뒹굴게 했던 이 경기. 12살의 소년들에게 심근경색이 무엇인지, 뇌졸중이 무엇인지, 중풍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해 준 눈물 나게 고마운 이 경기. 우리의 박현식 감독을 한 달 만에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던 이 경기. <중략> 나는 생각했다. ‘내 팔자야!’』
2003년 출판된 박민규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오는 대목이다. 8점차의 역대 최다 점수차 역전승 기록이 만들어진 1982년 4월 25일 삼미-OB전이 끝난 뒤, 원년 삼미팬의 시각과 감정이입으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삼미팬이 ‘한민족끼리 이래도 된단 말인가’라고 절규한 것처럼, OB 베어스는 원년에 삼미 슈퍼스타즈를 상대로 인정사정없이 ‘한 시즌 상대전적 16전 전승’ 신화를 만들었다. 한 팀이 특정팀을 상대로 한 시즌 전 경기를 이긴 유일한 사례다. 2018년 두산은 LG 트윈스를 상대로 15전 전승을 기록하다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면서 이 기록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여덟 번째 주제는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원년 OB의 삼미전 16전 전승 스토리다. 굳이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 속에 프로야구 역사와 갖가지 사연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맞대결 전승 신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다
OB의 삼미전 16전 전승의 첫 단추는 4월 15일 춘천 경기부터 시작됐다. 원년에 삼미는 인천이 본거지였지만, 경기도와 강원도까지를 광역연고로 삼고 있었다. 인천 도원구장이 공사 중이어서 삼미는 프로야구 출범 후 한동안 춘천구장에서 홈경기를 소화했다. 7월 17일에서야 MBC를 불러들여 첫 인천 경기를 열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양 팀의 분위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OB는 원년 우승 팀이지만 시즌 초반 출발이 좋지 않았다. 개막 후 6경기를 치르는 동안 에이스 박철순이 1승2패로 저조한 스타트를 끊는 등 2승4패의 부진한 성적표를 쥐고 있었다. 그러더니 4월 10일과 11일 전주에서 해태를 2연파하고, 14일에 대구에서 박철순이 삼성을 상대로 6-0 완봉승을 거두면서 3연승의 휘파람을 불었다. 단숨에 5할승률을 넘어 5승4패로 승패마진이 플러스 1이 됐다. 팀 분위기가 막 상승하는 시점이었고, 팀 순위는 6개 팀 중 공동 3위로 올라섰다.
삼미는 원년 개막 전부터 약체로 분류됐다. 선수 수급도 원활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팀명인 슈퍼스타즈와는 달리 국가대표 출신이 단 1명도 없었다. “삼미는 박현식 감독만 슈퍼스타일 뿐 슈퍼스타가 없다”는 조롱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시즌 개막 이후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3월 28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전. 삼미 구단 역사상 최초의 게임이었다. 여기서 국가대표 출신 선수가 즐비한 삼성을 5-3으로 꺾었다. 그러자 삼미 초대 사령탑 박현식 감독(‘아시아의 철인’으로 불린 왕년의 홈런왕 출신)은 경기 후 언론 인터뷰에서 “앞으로 우리 팀을 ‘슈퍼스타가 없는 슈퍼스타즈’로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팀 전원이 슈퍼스타니까”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삼미는 첫 경기 승리 이후 2연패를 당하더니 4월 5일엔 춘천에서 롯데에 8-7로 승리하며 홈 첫 승을 올렸다. 시즌 2승2패 균형을 맞췄다. 예상보다 좋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날 이후로 전력을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5연패를 당하면서 결국 2승7패로 꼴찌로 내려앉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4월 15일 OB와 삼미의 역사적인 첫 경기가 펼쳐졌다. OB 선발투수는 좌완 에이스로 평가받던 선우대영이었다.
삼미 선발투수는 좌완 감사용. 2004년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재조명받았지만, 그는 당시 정식 실업야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지 않았다. 마산고와 인천체전에서 잠시 선수 생활을 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군복무를 하면서 사실상 유니폼을 벗었다. 삼미철강에서 직장팀 선수로 뛰던 그는 좌완이 부족한 삼미에 테스트를 통해 합격하면서 원년 멤버로 합류하는 기막힌 스토리를 썼다.
OB는 1회초 시작부터 감사용을 몰아붙였다. 2사 후 3번타자 윤동균의 볼넷과 4번타자 김우열의 좌전안타로 1·3루의 찬스를 잡더니 김우열이 2루 도루에 성공하면서 2·3루. 여기서 5번타자 신경식의 2타점 좌전 적시타가 터져 2-0 리드를 잡았다. 삼미가 2회말 4번타자 김호인(현 KBO 비디오판독센터장)의 솔로홈런으로 저항했지만, 3회 김우열의 솔로홈런과 4회 구천서의 솔로홈런이 이어지며 4-1로 달아났다. 결국 9-3 승리. 이 승리가 16전 전승 신화의 신호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 0대8→12대11, 최다 점수차 역전승으로 대기록 발판
삼미는 4월 17일 해태를 꺾고 6연패의 늪에서 벗어났지만, 이후 7일 만에 펼쳐진 춘천 OB와 2연전에서 충격의 2연패를 당하고 만다. 거꾸로 OB는 삼미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면서 시즌 9승5패로 2위로 도약하게 된다.
4월 24일 OB-삼미전. OB 선발투수 박철순은 6회까지 4실점하며 2-4로 끌려갔다. 그러나 타선이 7회초 3점을 뽑아주면서 가까스로 6-4 승리를 이끌고 힘겹게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다. 개인 4연승이자 시즌 5승째. 박철순으로선 자칫 연승 행진이 끊길 뻔했으나 타선 덕분에 연승 신화의 불씨를 가까스로 살려낸 셈이다. 이처럼 박철순은 이상하리만치 최약체 삼미에 고전했다.
“원년에 22연승을 했지만 삼미에 정말 많이 혼났어요. 이상하게 삼미 타자들이 제 공을 잘 쳤어요. 삼미 때문에 연승 기록이 몇 번이나 끊길 뻔했는지 몰라요. 그럴 때마다 운 좋게 우리 타자들이 점수를 뽑아주면서 승리하거나 패전투수를 모면했죠.”
박철순은 삼미 얘기를 꺼내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년에 삼미를 상대로 5승2세이브무패를 기록했지만, 내용상으로는 힘든 게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해 시즌 평균자책점이 1.88이었는데 삼미전에서는 2.29(35.1이닝 9자책점)를 기록했다. 2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이라면 요즘 관점에서 보면 특급 기록. 그러나 최하위 삼미를 상대로 시즌 평균자책점에도 못 미쳤다는 점에서 보면 박철순의 말이 엄살이나 겸손의 뜻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튿날인 4월 25일 OB-삼미전. 역사에 남을 만한 경기였다. 이날은 삼미가 분풀이를 하려는 듯, 1회말 시작부터 OB 마운드를 맹폭했다.
OB 선발투수 선우대영을 상대로 1번타자 장정기와 2번타자 조흥운의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 찬스를 잡았다. 이어 3번타자 김무관의 좌전 적시타, 4번타자 양승관의 중견수 희생플라이가 터지며 2-0으로 앞서나갔다.
2회말엔 7안타를 몰아치며 무려 6점을 뽑았다. 1사 후 허운(현 KBO 심판위위원장)이 중전안타를 치자 OB 김영덕 감독은 투수를 박상열로 교체했지만 들불처럼 불붙은 삼미 타선을 잡지 못했다. 조흥운의 홈런을 비롯해 2루타 2개, 3루타 1개 등 장타가 폭발했다.
이미 스코어는 8-0. 삼미로선 내심 ‘이 정도면 이기겠지’ 하고 안심을 할 수 있는 점수 차였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OB의 반격이 시작됐다. 2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던 삼미 선발투수 감사용이 3회초 시작과 동시에 3연속 안타로 1실점한 뒤 내려갔고, 이후 인호봉이 구원등판했지만 또 연속 안타를 맞으며 대거 4점을 내줬다.
OB는 4회초 3점을 얻어 7-8, 1점차로 압박했다. 그리고는 5회초 2사후 양세종의 2루타를 시작으로 5연속 안타를 몰아치며 3점을 뽑아내 순식간에 승부를 10-8로 뒤집었다.
OB는 6회와 7회에도 1점씩을 추가해 12-8로 점수차를 벌렸다. 이쯤 되면 삼미가 충격을 받고 그대로 쓰러질 줄 알았다.
그러나 삼미의 반격이 시작됐다. 8회초 2사 1·2루에서 OB가 황태환을 구원투입했지만 1점을 내주면서 12-9로 추격을 허용했다.
9회말에 양승관에게 볼넷, 대타 금광옥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무사 2·3루. OB 벤치는 급하게 김옥경 주심에게 다가가 투수교체를 알렸다.
“투수 박철순!”
박철순으로 삼미 타선을 잠재우고자 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삼미 타선은 박철순을 상대로도 거센 반격을 이어갔다.
박철순이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김경남에게 우전 적시타를 맞았다. 12-10. 여기서 연속 삼진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듯했으나 김진철에게 볼넷을 내준 뒤 장정기에게 밀어내기 볼넷까지 허용하면서 1점차로 쫓기고 말았다. 더군다나 둘 다 스트라이크 하나 잡지 못하고 내준 볼넷이었다.
12-11에서 계속된 2사 만루. 타석에 조흥운이 들어섰다. 이날 이미 3안타를 칠 정도로 타격감이 좋은 상태였다.
“지금도 기억나요. 조흥운 선수를 상대하는데 초구에 팔이 말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1B-1S에서) 3구째 직구를 던졌는데, 그 타구가 3루수 양세종 앞으로 가더라고요. 양세종이 공을 잡은 다음에 실밥까지 확인하고 1루에 던져서 경기를 끝냈어요. 그만큼 다들 긴장했어요. 우리가 0-8로 뒤지던 게임을 12-8로 뒤집었는데, 여기서 또 역전패를 당하면 우리에게도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그대로 졌으면 모를까.”
박철순은 이 경기에서 1이닝 동안 1안타 2볼넷으로 고전하면서도 무실점으로 막아 세이브를 올렸다. 만약 조흥운에게 안타 한 방을 맞았다면 패전투수가 되고 연승 행진도 중단될 뻔했다. 여기서 졌다면 22연승 신화도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진땀을 흘렸으면 지금까지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박철순은 5월 26일 삼미전에서도 8회에 구원등판해 3이닝 2실점하면서 패전 위기에 몰렸다가 연장 10회에 양세종의 끝내기안타로 구원승(10연승)을 챙겼다. 6월 2일 삼미전에서도 6회에 구원등판했다가 동점을 내주면서 연장전을 허용했다. 다행히 14회말에 터진 이홍범의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다시 승리투수(12연승)가 됐다. 그만큼 박철순에게 삼미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삼미 박현식 감독, 사상 최초 감독 경질 사태
어쨌든 8-0으로 이기다 역전패한 4월 25일 경기의 후폭풍은 거셌다. 훗날 기록이 깨졌지만, 8점차 역전패는 1982년뿐만 아니라 20세기 내에서는 KBO 역대 한 경기 최다점수차 역전패 기록으로 남아 있었을 정도로 당시로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앞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오는 구절에서 설명했듯이 삼미를 응원하던 팬들은 “아이고 내 팔자야”라며 신세한탄을 할 만했고, “한민족끼리 이래도 된단 말인가”라며 OB를 향해 절규를 할 만했다. 전날 박철순을 상대로 4점을 뽑아 리드를 잡고도 역전패한 삼미는 이날도 대역전패를 당하자 결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감독 경질을 결정하게 된다.
“그날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이 춘천 구장에 왔다가 점수차가 커지자 구장을 나섰던 걸로 기억해요. 그날은 이길 거라고 봤던 거죠. 그런데 역전패를 당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박현식 감독을 경질했다고 하더라고요.”
OB 베어스 박용민 초대 단장의 이야기다.
이로써 삼미 초대 사령탑 박현식 감독은 13경기 만에 3승10패(승률 0.231)의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이튿날 유니폼을 벗었다. 이선덕 코치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단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박현식 감독은 한국야구사의 홈런왕 계보를 잇는 슬러거로, 아시아선수권대회에 6회 연속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아시아의 철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감독으로는 철인이 되지 못했다. KBO 역대 최단명 감독으로 이름을 남겼으니 말이다.
박현식 감독이 경질되자, 29일엔 해태가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을 해고했다. 김동엽 감독 역시 개막 후 13경기(5승8패)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지만, 날짜 상으로 박현식 감독에 이어 2호 경질 감독으로 기록됐다.
결국 4월 25일 춘천에서 OB가 8점차의 열세를 뒤집고 대역전극을 펼치면서 ‘KBO 최초 감독 경질’이라는 사례가 나오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날 승리로 박철순의 연승 행진도 계속 이어지게 됐다.
●삼미전 16전 전승 완성하던 날
“당시 우리 팀 타력은 괜찮았는데 투수력이 너무 약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기고 있다가도 중·후반에 역전패를 많이 당했죠. 지금은 고인이 된 1루수 김경남(작고)이나 다른 야수들이 경기 도중 갑자기 투수로 등판하기도 했어요. 그만큼 삼미는 투수가 부족했어요. OB에 8점차 역전패를 당한 것도 충격이었지만, 사실 그해 삼미에겐 그런 비슷한 경기가 허다했거든요. 앞서고 있어도 불안했고, 역전패를 걱정하면 그대로 역전패를 당하곤 했죠.”
삼미 원년 멤버였던 양승관 전 NC 다이노스 코치의 얘기다. 그는 1982년 OB에게 계속 패했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삼미가 OB에 16전 전패를 당했는데, 특정팀에 계속 지고 역전패를 당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더 많이 위축됐던 것 같아요. OB만 보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죠. 어릴 때 친구와 싸움을 하다 한 번 지고, 두 번 지고 나면 나중에 커서도 영원히 기에서 눌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거꾸로 OB는 그날 대역전극 이후 삼미라면 늘 자신감이 넘쳤다. 4월과 5월에 3승씩을 거둔 뒤 6월에 2승, 7월과 8월에 3승씩을 올렸다. 9월에도 2승을 추가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스코어로 이긴 건 아니었다. 1점차와 2점차 승부가 상당히 많았다. 6경기가 1점차 승리였고, 4경기가 2점차 승리였다.
9월 16일 청주에서 열린 양 팀 간의 시즌 마지막 경기. 삼미는 치욕의 시즌 전패를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회초 선두타자 조흥운이 볼넷과 도루로 찬스를 만들고 장정기의 적시타로 선취점을 뽑았다. 4회초에 2점을 추가하며 3-0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OB는 6회말 정혁진의 2타점 2루타와 양세종의 적시타로 한꺼번에 가볍게 3점을 뽑아 3-3 동점을 만들었다. 그러자 삼미는 다시 쫓기기 시작했고, OB는 8회말 무사 1·3루의 황금 기회를 잡았다. 여기서 완투를 하던 삼미 선발투수 김재현을 상대로 정혁진이 좌전 적시타를 날리면서 4-3 역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5회부터 구원등판한 잠수함투수 강철원이 9회초를 틀어막으면서 16전 전승 신화를 완성했다.
OB는 원년 삼미전 전승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삼미는 전기리그 때 10승(30패)을 올린 뒤 후기리그에서는 단 5승(35패)에 그쳤다. 한마디로 박철순 첫해 승수(24승)에도 훨씬 못 미쳤다.
팀당 80경기를 소화한 원년에 삼미는 15승65패를 기록했다. 승률 0.188은 지금까지 역대 최저승률로 남아 있다. 삼미는 나머지 팀들을 상대로는 15승49패를 기록해 승률이 0.234로 오른다. 그만큼 OB전 16전패 기록이 뼈아팠다.
투수들의 개인 성적도 희비가 엇갈렸다. OB에서는 박철순과 박상열이 삼미를 상대로 5승씩을 챙겼다. 반대로 삼미에서는 OB를 상대로 김재현이 7패, 감사용이 5패를 떠안았다. 박철순이 22연승 포함 24승(4패7세이브)으로 다승왕에 올랐다면, 김재현은 전·후기리그 총 80경기가 치러진 그해 19패(6승1세이브)로 롯데 노상수(14승19패2세이브)와 최다패 공동 1위 투수가 됐다.
KBO리그 역사상 유일한 특정팀 상대 시즌 전승. OB의 삼미전 싹쓸이는 이렇듯 많은 역사적 뒷얘기와 기록들을 배출했다. 베어스의 역사와 KBO리그의 역사를 논할 때 원년 삼미전 16전 전승 신화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한 시즌 특정팀 상대 전승은 다시는 보기 힘든 불멸의 기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