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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16. 2023

[07] 박철순의 22연승 신화를 찾아서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프로야구에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그 중 프로야구 원년 최초의 별이라면, 가장 먼저 빛난 별이라면, 단연 OB 베어스 박철순이다.


 프로야구 초창기 역사를 말할 때 박철순이라는 이름 석 자는 100년이 지나도 200년이 지나도 거론될 수밖에 없다. 특히 원년 그가 작성한 22연승 신화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단일 시즌 최다연승 신기록이었다.


 [베팬알백] 일곱 번째 이야기는 베어스 팬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고, 또 알아야하는 1982년 박철순의 22연승 과정이다. 그 신화의 시작과 끝을 탐험해본다.



●1승2패 저조한 출발, 빈 깡통이 요란하다?

<박철순 ⓒ두산베어스>


원년 박철순을 얘기하자면 22연승부터 떠올려진다. 그러나 사실 처음부터 연승을 달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승2패로 출발이 좋지 않았다. OB 베어스의 최초 게임인 3월 28일 동대문 MBC전에서 완투승을 올린 뒤 4월 4일 청주 홈 개막전에서 MBC에 6.1이닝 5실점(2자책점)을 기록하며 첫 패를 당했다.


 그리고 이어진 4월 7일 대구 삼성전. 시즌 3번째 등판이었다. 9회초까지 2-1로 앞서 승리를 눈앞에 뒀지만, 9회말 1사 후 오대석에게 중전안타를 맞은 뒤 함학수에게 좌월 2루타를 내주면서 2-2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투구수 105개. 선우대영에게 마운드를 넘겨주고 강판됐다.


 선우대영이 허규옥을 2루수 앞 땅볼로 잡았지만 2사 3루. 여기서 다시 선우대영을 구원등판한 황태환이 정구왕에게 끝내기 좌전 적시타를 맞았다. 2-3 역전패. 박철순의 실점은 3점으로 불어났고, 패전투수도 박철순의 몫이었다. 1승 후 2연패.


 “미국 유학파도 별 볼 일 없네.”


 성급한 사람들은 박철순을 평가절하했다. 메이저리그 승격을 노리던 해외파 출신에게 ‘울트라 초특급 슈퍼 에이스’를 기대했던 팬들의 시선은 회의적으로 바뀌었다. OB 팀 성적 역시 이 순간 2승3패로 6개 구단 중 4위로 내려앉았다. OB 전력은 하위권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엔 볼 스피드도 별로 안 나오고 솔직히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첫 경기 승리 이후 바로 2연패를 하니까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어느 신문 기사 제목이 ‘빈 깡통이 요란한 박철순’이었어요. 또 ‘OB 구단 속았다’는 다른 신문 기사도 있었죠.”


 박철순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OB 초대 사령탑을 맡은 김영덕 전 감독의 얘기는 달랐다. 기록적으로는 출발이 부진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실망할 단계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박철순의 너클볼 그립 ⓒ두산베어스>


 “감독인 저나 투수코치를 맡았던 김성근 코치나 크게 걱정하지 않았어요. 우리야 전지훈련부터 쭉 박철순을 지켜봤으니 그가 보통 투수가 아니란 걸 알았죠. 공도 빨랐고 컨트롤도 좋았어요. 완전히 정통 오버핸드 투수여서 폼도 예뻤죠. 당시 국내에서 보지도 못하던 팜볼이나 너클볼 가지고 있었습니다. 1승2패를 기록했지만 개막 후 우리 팀 타선이 터지지 않은 측면이 있었고요. 승운이 따르지 않았죠. 아무튼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은 박철순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반전의 계기, 22연승의 시작점


 절치부심(切齒腐心). 그리고 와신상담(臥薪嘗膽). 매도 먼저 맞은 것이 나았다. 더 신중해졌고, 국내 타자들을 더 분석하고 더 치밀하게 상대하기 시작했다. 빠른 직구를 더 과감하게 몸쪽과 바깥쪽으로 찔렀고, 타자가 직구를 기다리면 나풀거리는 너크볼과 팜볼을 던져 타격 밸런스와 타이밍을 무너뜨렸다.


 “오히려 출발이 좋지 않았던 게 저에겐 약이 됐던 것 같아요. 한국야구가 만만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러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었죠. 속으로 ‘박철순 정신차려야한다’고 다그쳤습니다.” 박철순은 시즌 초반의 부진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4월 10일 전주 해태전. 그날의 구원승이 연승 행진의 시발점이 됐다. 원년에 투수로 10승을 올리고, 타자로 3할타율(0.305)과 타점(69)왕에 오르며 투타에서 맹활약한 해태 선발투수 김성한에게 OB 타선은 5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눌렸다.


 0-0으로 이어진 7회초. 신경식의 적시타로 1점을 먼저 뽑았다. 기회를 엿보던 김영덕 감독은 7회말 두 번째 투수 황태환이 선두타자를 내보내자 박철순을 호출해 급한 불을 껐다. 그리고는 8회초 2점을 추가해 3-0으로 앞서나갔다. 박철순은 9회까지 3이닝 무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마무리 지으면서 구원승을 챙겼다.


 이날 OB 선발투수는 선우대영. 5회 2사 만루 위기에서 내려가고 황태환이 구원등판해 1.1이닝 동안 3안타 2볼넷 무실점을 기록했다. 황태환이 던지고 있을 때 1-0 리드를 잡았지만, 승리투수의 월계관은 박철순에게 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야구규칙 10.19>는 승리투수와 패전투수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4)항을 보면 선발투수가 승리투수가 되지 못하고 2명 이상의 구원투수가 출전하였을 경우에 대해 정리를 해놓고 있다. 대개는 구원투수가 던지고 있는 동안 리드를 잡으면 그 투수에게 승리가 기록된다. 그러나 [예외] 조항이 있다. ‘구원투수가 잠시 동안 비효과적인 투구를 하고, 그 뒤에 나온 구원투수가 리드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인 투구를 하였을 경우 나중의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는 부분. 이날 기록을 맡은 김학효 KBO공식기록위원은 이에 따라 황태환이 아니라 박철순이 ‘효과적인 투구를 했다’고 판단해 승리를 부여한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22연승의 물줄기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심지어 박철순마저.



       ■ 박철순 1982년 등판일지

 

●연전연승, 전기리그에서만 무려 18승


 설욕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4월 14일 대구. 일주일 전에 자신에게 KBO리그 데뷔 첫 연패를 안겨준 장소에서 삼성을 만났다.


 7회말 2사까지 노히트노런 행진. 오대석에게 중전안타를 맞으면서 대기록 수립이 무산됐으나 9회까지 단 2개의 안타만 허용한 채 6-0 승리를 이끌었다. KBO리그 5경기 등판 만에 거둔 첫 완봉승. 그리고 데뷔 첫 2연승이었다.


 3승2패를 기록한 박철순은 롯데 노상수와 다승 공동 1위에 오르며 최다승 투수로 가는 길을 닦았다. 이날 박철순과 배터리를 이룬 조범현은 3-0으로 앞선 4회초 프로 데뷔 첫 홈런을 신고했고, 김유동은 5회초 투런포로 프로 데뷔 20타석만의 첫 안타를 의미 있게 장식했다.


 이후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연전연승. 상대팀은 박철순만 보면 꼬리를 내렸고, OB 타자들은 박철순만 등판하면 더 많은 안타와 홈런을 생산했다. 지고 있어도 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 불사조의 날갯짓은 승리를 불렀고, OB 역시 덩달아 승승장구했다. 모두가 기대했던 ‘울트라 초특급 슈퍼 에이스’ 모드가 작동했다.


 4월 18일 청주 해태전 9이닝 완투승, 4월 24일 춘천 삼미전 6이닝 선발승, 4월 25일 춘천 삼미전 첫 세이브. 4월까지 5승2패1세이브를 작성했다.


 5월 2일 청주 삼성전 10이닝 완투승에 이어 5월 8일 MBC전 9이닝 완투승을 기록하며 어버이날을 맞아 야구장을 찾은 가족팬들에게 투수 박철순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박철순 ⓒ두산베어스>

그리고 이어진 5월 15일 대전 삼미전. 이날 경기는 최초의 대전 홈경기였다. 앞서 [베팬알백] 편>에서 설명했듯이, 원년 대전구장은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소년체전 관계로 구장 개보수를 하는 바람에 이날에서야 프로야구 첫 경기를 열 수 있었다.


 OB 최초의 경기(3월 28일 동대문 MBC전), 최초의 청주 홈경기(4월 4일 청주 MBC전)처럼 역사적인 최초 대전 홈경기에서도 팬들 앞에 가장 먼저 인사를 해야 할 투수는 역시 에이스 박철순이었다.


 4월 4일 청주 홈 개막전 패전투수가 됐던 박철순은 이날 대전 홈 개막전에서는 선발 8이닝 무실점으로 9-1 승리를 따냈다. 시즌 7승째.


 타선도 처음부터 폭발하며 대전 팬들을 즐겁게 했다. 1회말 2사후 윤동균이 우전안타로 대전구장 1호 안타를 기록하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자, 청주구장 1호 홈런을 날린 4번타자 김우열이 이번엔 좌월 2점홈런으로 대전구장 1호 홈런까지 기록하며 타고난 스타 기질을 맘껏 발산했다. 박철순은 5월에만 5완투승 포함 7승2세이브를 올렸다.


 OB는 전기리그 우승 매직넘버 10을 안고 6월을 시작했다. 그리고 매직넘버 3을 남겨놓은 채 6월 22일 대전에서 삼성과 최종 8차전을 치렀다. OB 우완 박철순-삼성 좌완 권영호의 투수전. 여기서 김유동은 7회말 좌월 솔로홈런으로 2-2의 균형을 깨고 3-2 리드를 잡았다.


 박철순은 9회초 2사 1·2루 위기에 몰렸지만 7번 함학수를 중견수플라이로 처리하면서 완투승을 올렸다. 매직넘버를 1로 줄이며 사실상 우승의 최대 고비를 넘긴 박철순은 마운드에 큰절을 하듯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OB는 이튿날인 23일 롯데를 홈에 불러들여 5-2로 승리했다. 이날 OB는 박철순 없이 매직넘버를 소멸시키면서 4경기를 남겨둔 채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획득했다. 박철순은 팀당 40경기로 치러진 전기리그에서만 홀로 무려 17연승을 포함해 18승(2패) 3세이브를 올렸다. 그해 최하위 삼미가 전·후기리그를 합쳐 거둔 승수가 총 15승(65패)이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박철순이 전기리그에서만 삼미의 시즌 전체 승수보다 많은 18승을 기록했으니 놀라움 그 자체였다.


 OB는 박철순의 일당백 활약에 힘입어 가장 먼저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도 최초로 거머쥐는 역사를 썼다.


 ‘어떻게 팀당 40경기만 하는 전기리그에서 혼자 18승이나 올렸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철순은 “이 자식, 누군지 몰라도 많이도 이겼네”라며 36년 전 젊은 시절의 자신을 향해 너털웃음을 지었다.



●“승리는 함께 만드는 것” 희망을 부르는 파랑새


<원년 OB 베어스 포수 조범현 ⓒ두산베어스>


“철순이 형이 선발투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선배들이 ‘야, 오늘 철순이다, 철순이’라면서 웃곤 했죠. 철순이 형이 등판하면 계속 이기니까 선수단 내에 그냥 그날은 이긴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오히려 홈런도 더 많이 터지고, 점수도 더 나고, 지고 있어도 질 것 같은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원년 OB 베어스 포수 조범현(전 kt 감독)의 회상이다.


 그랬다. 박철순은 바로 승리를 부르는 파랑새였고, 지고 있어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불사조였다.


 “원년에 OB가 가장 먼저 메리트 시스템을 시행했는데 안타 하나에 얼마, 홈런 하나에 얼마, 승리투수에 얼마, 완투와 완봉승에 얼마 하는 식으로 메리트가 지급됐죠. 심지어 벤치서 열심히 박수 치고 소리 내는 사람한테도 일정 금액이 책정되기도 했어요. 철순이 형은 등판할 때마다 최고 수훈 선수로 선정돼 가장 많은 수당을 받았죠. 완투승을 올리면 웬만한 봉급쟁이 월급보다 더 많은 50만 원 정도를 받았어요.”


 조범현은 당시 박철순의 마음씀씀이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연승 행진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철순이 형은 늘 동료들한테 공을 돌렸죠. 저한테 ‘범현아, 네 덕분에 이겼다’고 하고, ‘(김)경문아, 네 덕분에 잘 던질 수 있었다’면서 상금을 베풀곤 했죠. 그날 홈런을 치거나 점수를 뽑아준 다른 야수들에게도 얼마씩 떼어서 주곤 했어요. 원정지에 가면 고스톱을 치면서 일부러 잃어주기도 하더라고요. 물론 철순이 형의 구위가 좋았던 것이 첫 번째 연승 원인이겠지만, 동료들이 철순이 형이 나올 때 더 힘을 내서 도와주려고 한 측면도 있었죠.”


 후배의 얘기에 박철순은 손사래를 쳤다.


 “후배들이 그렇게 기억해주니 고맙지만, 솔직히 당시 메리트는 그야말로 보너스라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승리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잖습니까. 모두가 함께 만드는 것이죠. 베푼 것도 아니라 그냥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운 마음의 표현이었죠. 저야말로 패전 위기에서 타자들이 점수를 뽑아주면서 연승 행진을 이어갔으니 고마워해야죠. 제가 2실점하면 타자들이 3점을 뽑아줬으니까요. 진짜 감사하고 고마웠어요.”


 OB는 당초 “잘 해야 중위권” 정도로 평가받던 팀이었다. 그런데 전기리그에서 투타의 완벽한 하모니로 우승을 차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박철순을 중심으로 한 마운드도 빛나지만, 타선 역시 윤동균과 김우열 등 노장들이 앞장서서 이끌고 신경식 구천서 등 젊은 타자들이 맹활약하면서 신구 조화 속에 팀타율 1위를 기록하는 막강한 화력을 뽐냈다.



●쉬엄쉬엄 시작된 후기리그, 그리고 22연승의 그날


 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티켓을 따낸 상황에서 후기리그는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박철순은 도중에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는 했지만, 정규시즌을 기준으로 보면 한 달 가까이 쉬었다. 전기리그 마지막 등판이 6월 26일 동대문 해태전 구원등판이었고, 후기리그 첫 등판이 7월 31일 인천 삼미전 구원등판(2이닝 세이브)이었다.


 8월 4일 대전 삼성전에서 1.2이닝 1실점(비자책점) 구원승으로 18연승이자 시즌 19승을 챙기며 다시 연승 가도를 이어갔다. 충분한 휴식 후 꼭 잡아야할 경기에 결정적인 순간 구원투수로 등판하면서 승리를 만들어갔다.


 8월 15일 광복절.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MBC전에서 2-1로 앞선 5회말 1사 1·2루서 선발 계형철을 구원등판해 경기 종료까지 1안타 무실점 역투를 펼치면서 대망의 20승 고지에 올랐다. 아울러 19연승을 달렸다.


 이어 8월 19일 대구 삼성전 9이닝 2안타 무실점 완봉승으로 20연승이자 시즌 21승째를 채웠다.


 메이저리그 최다연승 기록은 칼 허벨이 뉴욕 자이언츠 시절이던 1936~37년 2년에 걸쳐 기록한 24연승. 단일시즌만 놓고 보면 메이저리그에서 1888년 팀 키프와 1912년 루브 마콰도 등 뉴욕 자이언츠 투수들이 기록한 19연승이 최고 기록이었다. 이 부문 일본프로야구 최고 기록은 마쓰다(1951년 요미우리)와 이나오(1957년 니씨데스)가 기록한 20연승이었다.


 “솔직히 20연승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이기는 게 좋았어요. 이겨야한다는 생각뿐이었죠. 기록엔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20연승을 하고 나니 욕심이 생기고 부담감이 커지더라고요. 사람 마음이 그런가 봐요. 주위에서는 제가 등판하면 당연히 이길 것으로 믿었고, 저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연승 기록을 이어가야한다는 부담이 생기더라고요.”


<원년 OB 베어스 포수 김경문 ⓒ두산베어스>


 다시 박철순의 기나긴 휴식이 이어졌다. 한국시리즈에 대비하는 장기적 포석이었다. 김영덕 감독 역시 김성근 코치에게 감독대행을 맡기고 8월에 보름가량 일본으로 연수를 떠났다. 지금으로선 시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령탑이 해외 연수를 가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그랬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런데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하고 나니 구단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고 포상휴가처럼 저를 일본에 보내줬어요. 어차피 후기리그 우승팀과 한국시리즈를 해야 하니, 이 기회에 차라리 내년 시즌을 위해 뭔가를 배워오는 게 낫다고 판단을 했던 것이죠. 그만큼 후기리그는 여유롭게 대처를 했어요. 박철순도 전기리그에서 고생했기 때문에 충전을 위해 쉬게 했던 거죠.”


 김영덕 감독의 설명이다.


 박철순은 8월 19일 완투승 이후 9월 8일 대구 삼성전에서야 다음 등판을 이어갔다. 2이닝 무실점 세이브로 오랜 만에 마운드 복귀 인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어디 아파서 쉰 게 아니었습니다. 전기리그에 많이 던졌으니 휴식 차원에서 많이 쉬었던 거였죠. 그런데 후기리그도 우승이 가시권에 들어오니까 다시 등판을 하기 시작했죠. 선두 싸움을 하면서 후기리그까지 우승해 한국시리즈를 없애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죠”


 박철순 얘기다.


 9월 11일 대전 MBC전에서 11이닝 3실점 완투승을 올리며 21연승을 기록했다. 이어 9월 18일 대전 롯데전에서 극적으로 22연승을 수립했다. 9이닝 5안타 8탈삼진 1실점 완투로 4-1 승리를 거둔 결과만 보면 낙승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판단할 수 없는 경기였다.


 OB는 1회말 윤동균과 김우열의 연속 2루타로 선취점을 뽑았지만, 이후 롯데 선발투수 김문희의 투구에 막혀 좀처럼 추가점을 올리지 못했다. 1-0 리드를 안고 8회초 2사까지 1안타 무실점 역투를 펼치던 박철순이 흔들렸다. 김일환에게 2루타를 내준 뒤 이날 3회에 유일하게 안타를 허용한 롯데 백업포수 최순하에게 좌전 적시타를 맞으며 1-1 동점을 만들어주고 말았다.


 다 잡았던 승리가 날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박철순이 마운드에 있을 땐 언제나 힘을 내는 OB 타선이었다. 9회말 1사 1·2루에서 김경문 타석 때 대타 김유동이 들어선 뒤 끝내기 3점홈런을 날렸다. 그러면서 박철순의 연승행진 숫자가 22로 늘어났다. 22연승 신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기록돼 있는 순간이었다.


<박철순 22연승 경기 기록지 ⓒ두산베어스>


●‘공든탑’ 22연승의 종착역, 신화가 깨지던 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22연승을 처음 시작할 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끝날 때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 예상하는 이는 없었다. 박철순이 원년에 22연승을 올렸다는 사실은 웬만한 야구팬들이라면 모두 아는 상식이지만, 그가 어떻게 연승행진에 마침표를 찍었는지에 대해 아는 이는 많지 않다.


 9월 22일. 기차는 운명의 종착역으로 가고 있었다.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OB의 더블헤더. 잠실에서 경기를 했기에 OB의 홈경기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이날 경기는 롯데의 홈경기였다.


 원년에는 각 팀이 연고지 외에도 전국을 돌며 야구붐 조성과 홍보 차원에서 몇 경기씩 특별경기를 소화했는데 이날 경기도 그런 차원에서 진행됐다. OB도 동대문에서 삼성을 불러들여 홈경기(8월 19일)를 치렀고, 구덕에서 삼미(6월 16일)와 MBC(9월 9일)를 초대해 홈경기를 하기도 했다.


 7월에 개장한 잠실구장은 서울 연고팀으로 먼저 출발한 MBC가 8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홈구장으로 사용했는데, 9월 22일 이날은 롯데의 특별경기로 배정돼 OB와 더블헤더를 치렀던 것이었다.


 박철순은 당초 더블헤더 제2경기 선발투수로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제1경기가 묘하게 흘렀다. OB가 7회까지 0-3으로 뒤지다 8회초 밀어내기 볼넷으로 1점을 뽑은 뒤 9회초 무사 1·3루서 조범현의 중전 적시타와 유지훤의 투수 앞 기습번트 안타로 3-3 동점을 만들었다.


 이날 경기 전까지 후기리그 1위 삼성을 0.5게임차로 추격하던 OB였기에 김영덕 감독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9회말 롯데의 공격. 무사 1루에서 1사 1루 위기로 변한 상황이었다.


 “투수교체! 박철순!”


 어차피 1차전에서 패하고 2차전에서 승리를 거두나, 1차전에서 승리하고 2차전을 패하나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으면 1차전도 이기고, 2차전까지 잡을 수도 있는 상황. 일단 1차전부터 잡고 가자는 계산이었다.


 계형철과 황태환에 이어 박철순이 마운드에 올랐다. 급박하게 등판한 박철순은 여기서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쳤고, 연장 10회초 OB 역시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계속된 10회말. 선두타자인 롯데 3번 박용성에게 좌전안타를 맞았다. 이어 부산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 손을 잡고 함께 야구를 시작한 친구 김용희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았다. 박용성은 태그업을 통해 2루까지 진출했다. 1사 2루.


 타석에는 역시 동광초등학교 2년 후배인 5번 김용철이 들어와 있었다.


 스트라이크-파울-파울-볼-파울.


 볼카운트 1B-2S의 유리한 상황에서 6구째를 던졌으나 타구는 3루수 옆을 지나 좌익수 앞으로 날아갔고, 박용성이 전력질주로 홈으로 내달려 롯데의 4번째 득점을 올렸다. 끝내기 안타였다.


<OB 베어스 시절 박철순 ⓒ두산베어스>


 박철순은 4월 10일 해태전부터 9월 18일 롯데전까지 진행된 22연승 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날까지 163일 동안 이어온 무패의 공든 탑도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용철은 초등학교 2년 후배인데 제가 6학년 때 4학년으로 함께 야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내 연승 깨놓고 지금까지 사과가 없네요. 허허. 아직도 생생해요. 몸 쪽 꽉 찬 직구를 던져야겠다고 맘먹고 던졌는데 기다리고 있었는지 기막히게 쳤어요. 타구가 총알처럼 날아가는데, 3루수 양세종이 몸을 날렸지만 잡을 수 없었어요.”


 『글러브를 끼고 있던 손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면서 가슴 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탈했다. 이미 관중들의 환호성도 동료들의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허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까짓것 다시 시작하면 되지.』


 1995년 펴낸 박철순의 자전에세이 혼을 던지는 남자>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물어봤더니 그는 “당시 그런 느낌과 기분이 들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허탈하고 아무 생각이 안 났는데, 조금 지나니 허탈함과 후련함이 교차했어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나더라고요. 사실 언제까지 연승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20연승부터는 기록에 눌리고 부담감이 자꾸 커져갔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박철순의 연승 행진을 깬 김용철은 “형님, 22연승할 때 롯데가 몇 승을 보태드렸는데 그럽니까”라며 웃는다.


 22연승 과정에서 롯데와 해태는 3승씩, MBC와 삼미는 5승씩을 보태줬다. 삼성은 가장 많은 6승을 헌납했다. 박철순은 이후 1승과 1패를 보태 원년 24승4패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를 기록했다. 다승과 평균자책점은 물론 승률(0.857) 부문까지 휩쓸어 원년 3관왕에 올랐다.


<OB 베어스 박철순 ⓒ두산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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