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이날 청주공설운동장에는 관중들이 몰려들어 표를 사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경기장 입구는 큰 혼잡을 빚었으며, 관중이 다 입장한 것은 경기 시작 1시간이 지난 후였다. 관리인이 고작 4명인데 전문매표원이 한 사람도 없는 데다 지난 79년 개장한 이래 단 한 번도 표를 팔아본 일이 없어 표를 파는 데 시간이 걸려 대혼잡을 이룬 것.』 <1982년 4월 5일자 경향신문>
세월은 흐르고 추억은 남는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요즘 관점에서 보면 웃지 못할 해프닝 같지만, 아날로그 같은 당시 풍경이 오히려 더 포근하고 정겨운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왜일까. 그땐 그랬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여섯 번째 이야기는 바로 베어스 역사상 최초의 홈경기 추억 여행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사실. OB는 프로야구 원년에 대전을 연고지로 출발했는데, 왜 청주에서 홈 개막전을 치렀던 것일까. 최초의 홈경기를 찾아가 본다. “Let's Go!”
●소년체전 관계로 대전 대신 청주에서 홈개막전
대전 지역은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까지는 야구 열기가 뜨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고교야구 붐이 전국적으로 불었지만, 대전고는 전국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한 약체 팀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전 시민들은 야구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고, 야구장 시설 또한 변변치 않았다.
때마침 1982년 소년체전이 대전에서 열리게 되고, 대전이 프로야구 OB 베어스의 연고지로 확정되면서 대전구장은 개보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야구 개막까지 정비를 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결국 KBO와 OB는 4월 4일 홈 개막전을 대전이 아닌 청주에서 열기로 한 것이었다. 대전 개막전은 그로부터 한 참 뒤인 5월 15일 개최됐다.
홈 개막전은 1982년 4월 4일(일요일)과 5일(월요일) 이틀에 걸쳐 MBC와 2연전을 치르는 일정으로 잡혔다. MBC는 이에 앞서 3월 28일 OB 베어스의 최초의 경기 상대였다. 그 이전에 서울 연고지를 두고 서로 적임자임을 주장하면서 다툼을 벌이기도 했던 상대이기도 했다.
어쨌든 프로야구단 OB를 맞이하는 청주는 홈 개막 며칠 전부터 축제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당시 청주MBC는 방송을 통해 MBC 청룡 응원단을 모집하는 데 열을 올리기도 했다.
마침내 4월 4일. 구단 직원들은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베팬알백] <2편>에서 소개했듯이, 당시 직원이라고 해봤자 단장을 제외하면 이민우 사무국장과 구경백 매니저, 경리 박인자 씨 3명으로 시작했다. 경기 개시시간은 오후 2시로 예정돼 있었는데, 오전부터 팬들이 표를 사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청주구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기사에서 보듯 구장관리인이 고작 4명뿐이었고, 전문매표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 청주구장은 1979년 개장했는데 그 이전에 표를 팔아본 일이 없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팬들을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시엔 요즘처럼 표를 전산으로 예매하는 시스템도 없었죠. 저희는 개막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구장관리인들이 현금을 받고 표를 주는 식이었는데 매표인원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50~60m씩 서 있었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자 고함을 치고 난리가 났죠. 결국 팬들이 경기 시작 직전까지 표를 못 구한 사람들이 외야로 달려가 담을 타고 야구장 안으로 넘어왔어요. 당시 청주구장 외야는 언덕이 산비탈처럼 급경사로 이뤄져 있었고 풀밭이었어요. 외야석 뒤로 담장이 낮아서 사람들이 담을 넘어 들어올 수 있었던 거죠. 결국 그 관중들이 다 자리를 잡고 나서야 경기가 시작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매니저였던 구경백 현 일구회 사무총장의 말이다.
공식 기록지를 보면 경기는 예정보다 늦은 오후 2시 25분에 시작됐다. 당시 관중수를 두고 어떤 신문은 청주구장 개장 이래 최다인 2만 명이 운집했다고 표현했고, 어떤 신문은 1만5000명이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담을 타고 넘어온 관중들까지 집계를 할 수 없었으니 어림짐작으로 관중수를 기사화했던 셈이다.
현 두산 베어스 김태준 홍보팀장은 청주 출신으로, 역사적인 OB의 청주 홈개막 2연전을 현장에서 지켜본 산증인이다. 그리고는 운명처럼 현재 두산 베어스 점퍼를 입고 일하고 있다. 당시 그는 고등학생이었다.
“개막 며칠 전부터 청주에서 프로야구가 열린다고 하니 다들 신기해하던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청주엔 세광고가 있었지만 야구와는 큰 인연이 없었거든요. 저는 아버지가 구해주신 표로 동생과 함께 개막 2연전을 구경하러 갔어요. 경기 전부터 사람들로 무척 붐볐고, 청주MBC에서 방송을 통해 응원단을 조직적으로 구성해 OB팬뿐 아니라 MBC 팬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첫 경기에서 김우열 선수가 홈런을 쳤고, 두 번째 경기에서 3루수 양세종 선수가 트리플플레이를 성공했던 것이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기사를 보면 두산은 그룹차원에서 임직원 350여 명이 8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청주까지 내려와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OB의 마스코트인 형제곰이 등장해 야구장 앞과 관중석을 종횡무진 누비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
●홈개막전 선발도 에이스 박철순! MBC와 또 대결
OB는 3월 28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베어스 최초의 경기 MBC전(원정)에서 박철순의 호투 속에 9-2로 승리했지만, 다음 경기인 3월 31일 구덕(부산) 롯데전에서는 4안타의 빈공으로 좌완 천창호에게 완봉승 안겨주며 0-4로 패했다.
1승1패 후 마침내 맞이한 홈 개막전. OB 초대 사령탑 김영덕 감독은 역사적인 날에 승리로 홈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스케줄을 미리 짜놓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에이스를 선발투수로 올렸다. MBC 선발투수는 좌완 유종겸.
박철순이 1회초 공 7개로 김인식~송영운~김용달을 삼자범퇴로 막은 뒤 1회말 선취점을 뽑았다. 1번타자 ‘작은(小)’ 이근식이 중전안타로 출루한 뒤 김광수의 2루수 앞 땅볼 때 2루까지 진루했다. 이어 3번타자 윤동균의 타구를 MBC 2루수 조호가 실책을 범하면서 2루주자 이근식이 먼저 홈을 밟았다. 신명 난 팬들의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2회말 양세종의 볼넷과 1사후 조범현의 2루타로 1사 2·3루, 그리고 2사 만루의 찬스 속에 득점에 실패했지만 박철순은 3회까지 9명의 타자를 모두 범타로 돌려세우며 에이스의 위용을 과시했다. 타선이 3회말 1점을 추가했다. 2사후 신경식의 중전안타와 양세종의 2루타가 이어지며 2-0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4회초 박철순이 2점을 내주면서 이때부터 일진일퇴 공방이 이어졌다. 김인식과 송영운에게 연속 내야안타를 맞은 뒤 1사 2·3루서 MBC 감독 겸 선수인 4번타자 백인천을 볼넷으로 내보내 만루가 됐다. 여기서 원년 개막전 만루홈런의 사나이 이종도에게 2타점 중전 적시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OB는 5회말 황금찬스를 잡았다. 3번타자 윤동균과 4번타자 김우열의 연속 중전안타와 신경식의 1루수 앞 내야안타로 무사 만루. 그러나 양세종의 유격수 땅볼로 3루주자 윤동균이 홈에서 포스아웃됐다. 이어 김유동의 땅볼 때 2루수 실책이 나오면서 3-2로 앞서나갔지만, 5회말 1점만 빼낸 것이 아쉬웠다.
결국 6회초 동점을 허용했다. 선두타자 송영운의 유격수 앞 땅볼을 유지훤이 놓친 것이 화근이었다. 청주구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그라운드 사정이 더 열악해 내야수들이 수비를 하기 쉽지 않았다. 이어 김용달 타석에서 대타 김용윤(개명 후 김바위)의 볼넷으로 무사 1·2루. 여기서 강타자 백인천이 좌전 적시타를 날렸다. 3-3 동점. 계속된 무사 1·2루서 더블스틸을 감행했지만 포수 조범현의 정확한 송구에 김용윤이 3루에서 아웃됐다.
이어진 2사 만루. 여기서 일이 발생했다. 3루주자 백인천이 돌연 홈 쪽으로 걸어 나왔다. 심판이 타임을 선언하기 전이었다. 이때 포수 조범현이 공을 갖고 재빨리 뛰어가 백인천을 태그아웃시켰다. 태그 직전 백인천은 우성제 3루심에게 “타임”을 외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웃이 선언되자 백인천은 그라운드에 모자를 집어던지며 항의를 해 경기가 중단됐다. 팬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7회초 고비가 왔다. 6회까지 투구수 96개로 MBC 타선을 3점으로 막아냈던 박철순이 1사후 9번타자 신언호에게 볼넷을 내줬다. 그리고 김인식의 땅볼을 잡은 유격수 유지훤이 1루에 악송구하면서 무사 2·3루 위기에 몰렸다. 투구수는 106개. 타석엔 2번타자인 좌타자 송영운이 들어설 차례였다. 결국 OB는 박철순을 내리고 좌완 황태환을 올렸다. 여기서 송영운의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3-4 역전. 김용윤(김바위)의 좌전 적시타가 이어지며 3-5로 뒤지게 됐다.
●홈개막전 역전패, 충청도 사나이 김우열 홈런이 위안
7회말 공격. 선두타자 김우열이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에는 4회 1사 1루서 등판한 하기룡. 볼카운트 1-1에서 3구째를 받아쳤고, 타구는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4-5로 1점 차로 따라붙는 추격의 솔로포였다. 이 홈런은 청주 홈 팬들이 구경한 최초의 프로야구 홈런이기도 했다. 관중석의 팬들은 “김우열!”을 연호했고, 트레이드마크였던 구레나룻을 휘날리며 홈에 들어온 김우열은 손을 들어 홈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쇼맨십과 팬서비스 정신이 투철했던 김우열이었다.
팬들이 더욱 열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김우열이 충북 영동 출신 스타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OB는 선수 부족으로 서울 지역 출신 선수들을 놓고 MBC와 2대1 드래프트를 하면서 정작 순수 충청도 출신 선수가 거의 없었다. 김경문과 신경식이 공주고 출신이기는 했지만, 둘 다 고향이 충청도는 아니었다. 고교 시절 공주고로 스카우트된 케이스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 출신의 윤동균과 영동 출신의 김우열은 지역 팬들에게 더욱 인기를 끌었다. 둘 다 1949년생이지만, 학교는 김우열이 1년 먼저 다녀 윤동균은 늘 김우열을 “형”이라고 불렀다. 윤동균은 동대문상고, 김우열은 선린상고를 나왔지만, 고향을 유난히 많이 따지던 당시 시대 상황에선 이들이 곧 ‘충청도 아들’이었다.
그러나 OB는 결국 9회까지 던진 하기룡을 더 이상 무너뜨리지 못하고 홈 개막전에서 4-5로 무릎을 꿇었다. 박철순은 6.1이닝 4안타 5볼넷 1탈삼진 5실점(2자책점)으로 시즌 첫 패(1승1패)를 당했다.
●구레나룻 홈런왕 김우열 간암 투병
안정된 실업팀 제일은행에서 은퇴 후 은행원으로 살아가려던 김우열은 33세의 뒤늦은 나이에 출범한 프로야구에 뛰어든 뒤 고향 팬들에게 홈 개막전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패배가 확정되자 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청주 팬들은 “역시 김우열”이라며 패배 속에서도 김우열의 홈런포 선물을 받은 데 위안을 삼고 내일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제 키가 170㎝에 불과합니다. 당시 몸무게는 63kg였어요. 그런데 제가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실업야구 시절 거구의 김응용 박영길 등을 제치고 홈런왕에 오르면서 팬들이 좋아해 주셨죠.”
2014년 간암 수술 후 경기도 양평에서 살고 있는 그는 옛날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난 듯 목소리 볼륨을 올렸다. 실제 그는 실업야구 2년째인 1969년에 홈런왕에 오르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고교 2학년까지 체격이 작아 후보에 그쳤고, 3학년 때 야구가 늘면서 1968년 제일은행에 가까스로 입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입단 2년째에 1965년, 67년, 68년 홈런왕을 차지한 거구의 김응룡을 밀어내고 홈런왕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가 실업야구 시절 통산 127홈런을 기록해 ‘아시아의 철인’이라고 불린 박현식 선배가 기록한 124홈런 기록을 깼어요. 프로야구가 시작될 당시 저는 서른세 살이었는데 제일은행 대리였죠. 당시엔 스물일곱 살만 돼도 노장 소리를 듣고 은퇴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저하고 윤동균이 좀 오래 선수생활을 했죠. 저도 그래서 그때쯤 은퇴를 하고 안정적인 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KBO 이용일 사무총장이 ‘프로야구 흥행을 위해 프로에 와서 뛰어달라’고 계속 사정을 하는 바람에 결국 프로야구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는 이날 홈런을 시작으로 40경기로 치러진 그해 전기리그에서만 11개의 홈런을 날렸다. 원년 전체 홈런왕은 22개의 홈런을 때려낸 해태 김봉연이었지만, 전기리그 홈런왕은 김우열이었다. 그런데 김우열은 그해 13홈런으로 최종 4위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6월 22일 삼성전(대전)에서 홈스틸을 하다가 포수 이만수와 충돌을 했어요. 허리와 어깨를 다치면서 결장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 후유증으로 홈런을 치지 못했어요. 원년에 홈런왕에 오르고 싶었는데 그게 아쉬웠죠.” 실제 전기리그 5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부상으로 이탈한 뒤 7월 말에 팀에 복귀했지만 홈런은 2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는 홈런과 함께 트레이드마크인 구레나룻으로 원년 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팬들이 저를 참 좋아했어요. 제가 충북 영동 출신이니까 청주 팬들이 저를 많이 좋아했죠. 구레나룻은 제가 얼굴에 수염이 많아 일부러 안 깎으면서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제가 잘 생겼잖아요. 구레나룻이 더 포인트가 됐죠. 하아. 사람들이 밖에서도 저를 보면 ‘저 구레나룻 간다’ 그러면서 알아보곤 했어요. 지금도 기르고 다니는데, 구레나룻을 보고는 사람들이 ‘김우열 선수 아닙니까’ 하면서 알아봅니다. 하하.”
올해 우리 나이 칠순에 접어든 그는 현재 양평집에서 남양주로 출퇴근하면서 초·중·고에 다니는 어린 선수들을 무료로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간암 수술은 잘 돼서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지만 간경화까지 와서 앞으로 평생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제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어린 선수들한테 다 전수해 줘야죠. 저처럼 체격이 작아도 홈런왕에 오를 수 있거든요. 돈 없는 어린 친구들한테 무보수로 야구를 가르치면서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양세종의 트리플플레이! 청주 홈구장 첫 승 신고
청주에서 홈경기를 치르다 보니 홈이었지만 사실상 원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 경기를 위해 청주의 한 여관에서 잠을 자야 했다. 구경백 사무총장은 그 시절을 회상했다.
“당시 우리 선수들은 대부분 집이 서울에 있었어요. 원년엔 지금처럼 3연전씩 하지 않고 일주일에 6경기를 꾸준히 하던 시절이 아니었죠. 한 시즌 80경기를 했으니까 일주일에 3~4경기를 했습니다. 주중에 1경기 또는 2연전을 하고 하루이틀 쉬다가 주말에 2연전을 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당시 청주에 호텔이 없다 보니 여관에서 지냈어요. 청주가 홈구장이었지만 지금 원정 가듯이 선수단이 구단버스를 타고 청주에 도착해 여관에서 하루나 이틀 묵었다가 서울 집으로 올라왔어요.”
OB는 다음날인 4월 5일(월요일)에 설욕을 다짐했다. 계형철을 선발로 내세웠다. MBC 선발은 정순명. 1회 시작부터 무사 만루서 백인천에게 희생플라이를 허용해 선취점을 내줬지만 1회말 윤동균의 적시타로 1-1 동점을 만들었다. 3회초에 다시 백인천에게 적시타를 맞아 1-2로 끌려가다 6회말 대거 3점을 올리면서 4-2 역전에 성공했다. 8회에 또 백인천에게 1사 3루서 적시 2루타를 맞아 3-4로 쫓겼지만, 8회말 양세종의 희생플라이로 5-3으로 앞서나갔다. 일본프로야구 출신 백인천은 그렇게 무서운 타자였다.
9회초 MBC 마지막 공격. 8회부터 구원등판한 좌완 황태환이 선두타자인 대타 김용달에게 좌월 2루타를 맞았다. 대타 김용운에게 볼넷, 김인식에게 초구에 사구를 내주며 무사 만루의 절체절명 위기에 몰렸다. 3연패의 어두운 그림자가 몰려오던 상황. 여기서 MBC는 좌타자 송영운 대신 우타자 신언호를 대타로 냈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신언호가 2구째를 받아친 타구는 총알처럼 3루 쪽으로 날아갔다. 장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선상을 지키던 3루수 양세종이 껑충 뛰어오르며 글러브로 낚아챘다. 그리고는 재빨리 3루를 밟은 뒤 2루로 송구해 순식간에 3아웃이 됐다. 트리플플레이(삼중살)로 승리를 마무리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 팬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두산 김태준 홍보팀장이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트리플플레이는 KBO 역사상 최초의 기록은 아니었다. 간발의 차이로 2호가 됐다. 공교롭게도 그날 삼미가 춘천(역시 인천구장 개보수 관계로)에서 롯데를 불러들여 홈 개막전을 치렀는데, 1회초에 트리플플레이가 나왔다. 롯데 1번타자 정학수와 2번타자 김일환의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 3번타자 김정수의 타구가 삼미 2루수 이철성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고, 주자들이 스타트를 끊는 바람에 2루와 1루로 공이 배달되면서 3아웃이 만들어졌다.
어쨌든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이 터지고, 이날은 하루에 2개 구장에서 트리플플레이가 터져 나왔다. 특히 청주에서는 삼중살로 승리가 마무리되는 진기명기가 펼쳐졌다. 마치 “프로야구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는 것처럼. 원년에 팬들이 프로야구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연이어 연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