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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17. 2023

[09] '불사조' 박철순 '7전8기' 악몽의 시작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나는 발버둥 쳤다. 이대로 떠나지는 않겠다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려 깊게 생각해서 잘 정리해 보니 그게 좋겠다고 판단을 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나는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를 외치면서. ‘시련아! 이제 내게서 멀어져라’ 하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언덕이 있을 때마다 나는 몸을 끌고서라도 넘으려 했다. 쉽게 야구를 포기하는 후배들. 매년 떠나가는 사람들. 한 번쯤 죽을힘을 다해서 해 보고 떠나도 떠났으면 좋겠다. ‘고통이여 와라’ 하고 모두 떠나간 연습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진정한 스포츠맨만이 두 발을 딛고 설 자격이 있다. 최소한 나의 기준은 그렇다.』


 1995년 나온 박철순 자전 에세이 <혼(魂)을 던지는 남자>에 나오는 대목이다.


 ‘불사조’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 박철순은 원년 22연승과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 MVP로 기록되면서 동시에 ‘불굴의 의지’와 ‘재기의 화신’으로 기억된다. 운동선수가 아니라 일반인으로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지 모르는 대수술을 거듭했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마운드로 돌아왔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쓰러지면 부활하는 그의 모습에 초창기 프로야구 팬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불사조’라는 별명을 듣노라면 오히려 처연함과 숙연함이 밀려든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아홉 번째 주제는 박철순이 처음으로 쓰러진 가슴 아픈 시련의 순간이다. ‘불사조’ 스토리가 시작된 첫 장이기도 하지만, OB 구단과 프로야구 전체의 역사가 얽히고설킨 순간이기도 하다.


<박철순 ⓒ두산베어스>


 ●한국시리즈를 없애자!


 1982년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격돌하는 시스템이었다. 전기리그 우승팀이 후기리그 우승까지 성공한다면 한국시리즈는 무산되고 통합우승으로 싱겁게 챔피언이 가려지는 불완전한 제도였지만, 누구도 그 가능성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아니, 예상을 했더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OB가 그 시나리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OB는 전기리그에서 4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했다. 결국 전기리그 최종 성적 29승11패(승률 0.725)로 마감했다. 2위 삼성(26승14패)에 3게임차 앞섰다.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확보한 OB로선 사실 후기리그는 큰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꼴찌를 하더라도 한국시리즈에는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리하지 않고 일찌감치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전력을 재정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당초 기껏해야 6개 구단 중 3~4위권 전력으로 평가받던 OB였기에 이미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전기리그에서만 17연승을 포함해 팀의 29승 중 18승을 책임진 박철순을 한 달 이상(6월 26일 전기리그 마지막 등판 이후 후기리그 7월 31일 첫 등판) 쉬게 했다. 한 술 더 떠 구단의 배려 속에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가 한창 진행되던 8월에 보름가량 선진야구를 배우기 위해 지휘봉을 김성근 코치에게 잠시 맡긴 뒤 일본으로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비우면 채워지고 낮추면 높아진다’는 노자의 ‘무위(無爲)’ 철학처럼, OB는 후기리그에 마음을 비웠지만 도리어 승수를 채워나갔다. 막바지에 삼성과 후기리그 1~2위를 다투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결국 1위로 치고 올라섰다. 9월 26일 해태를 7-1로 꺾고 후기리그 27승11패의 전적을 올렸을 때, 삼성은 MBC에 0-7로 덜미를 잡혀 25승12패를 기록하게 됐다. OB가 1.5게임차로 앞서나갔다.


<아이싱을 하고 있는 박철순 ⓒ두산베어스>

 OB의 후기리그 남은 경기수는 2경기. 9월 28일 동대문 MBC전과 29일 대구 삼성전이 예정돼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OB가 MBC를 이기고 삼성에 진다면 최소 공동선두를 확보하게 된다. 삼성은 남은 3경기(삼미, OB, MBC)를 모두 이기고, OB와 후기 우승 결정전(3전2선승제)까지 이겨야 한국시리즈에 오를 수 있다. 반대로 OB는 MBC에 지더라도 삼성만 잡는다면 후기리그 우승을 확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원년 한국시리즈를 없애고 통합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OB는 기로에 섰다. 바로 에이스 박철순의 투입 시점 때문이었다.


 9월 23일 해태전 승리 이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에이스 박철순을 28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리는 MBC전에 투입하느냐, 29일 대구구장에 예정된 최종 삼성전에 투입하느냐. 답은 뻔했다. OB 수뇌부는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삼성전이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9월 28일 서울에서 MBC전이 열렸지만 박철순은 하루 먼저 홀로 대구에 내려가 삼성전을 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OB는 이날 MBC에 0-7로 완패했고, 삼성은 대구에서 삼미를 9-4로 꺾었다. 양 팀 간의 격차는 0.5게임으로 다시 좁혀졌다.


<타석에 들어선 박철순 ⓒ두산베어스>


●삼성전 번트 수비, 불행을 잉태하다


 9월 29일 대구구장.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OB는 절대 에이스 박철순 카드 하나였지만, 삼성은 권영호를 비롯해 황규봉(고인) 이선희 등 15승을 올리며 다승 공동 2위에 오른 트로이카를 보유하고 있었다.

 박철순에 맞서 삼성은 좌완 에이스 권영호를 선봉에 내세웠다.


 초반에 양 팀은 득점기회가 있었지만 살리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에이스들의 빼어난 경기운영이 돋보였다.


 0-0의 팽팽한 균형을 먼저 깬 것은 OB였다. 6회초 백전노장 김우열이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1-0 리드. 그러자 삼성은 7회말 천보성과 김한근의 연속 2루타로 응수했다. 1-1 동점.


 OB는 박철순이 홀로 마운드에 버텼다. 카드가 다양한 삼성은 7회부터 우완 에이스 황규봉으로 교체하며 체력전으로 박철순에 대항해 나가고 있었다.


 운명의 8회말. 삼성은 무사 1루 찬스를 잡고 오대석에게 희생번트 작전을 냈다. 여기서 박철순에게 시련의 시그널이 찾아왔다. 재빨리 번트타구를 처리하던 순간 그만 허리를 삐끗하고 만 것.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경기가 경기인만큼 박철순은 마운드를 내려올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투구를 이어갔다. 실점 없이 8회를 넘겼다. 9회까지 양 팀이 점수를 내지 못하면서 승부는 결국 연장으로 넘어갔다.


 10회, 11회…. 전광판에는 계속 0의 행렬이 이어졌다.


 연장 12회말. 박철순은 여전히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힘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1사 후 2번타자 허규옥에게 중전안타를 맞았다. 2사 후 4번타자 이만수에게 좌전안타를 내주면서 1·3루 위기에 몰렸다.


 타석에는 5번타자 함학수. 땅볼 타구는 3루수 양세종과 유격수 유지훤 사이로 얄밉게 뚫고 나갔다. 끝내기 안타였다. 삼성의 2-1 승리. 2위 삼성이 0.5게임차로 후기리그 1위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황규봉이 시즌 15승째를 수확했고, 박철순은 11.2이닝 역투를 펼쳤지만 완투패를 기록하며 시즌 4번째 패전(24승7세이브)을 떠안았다.


 OB는 이날 경기로 먼저 후기리그를 마감했다. 삼성은 10월 2일 MBC와 시즌 최종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만약 삼성이 MBC에 패하면 OB와 동률이 되면서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 후기리그 자력 우승이 물 건너간 OB로선 행운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삼성이 시즌 최종 MBC전에서 5회초 이종도에게 선제 솔로홈런을 맞을 때만 해도 ‘혹시나’ 했지만, 결국 3-1로 역전승했다. 후기리그 우승은 삼성에게 넘어갔다. 결국 원년 한국시리즈는 OB와 삼성의 매치업으로 짜이게 됐다.


 박철순은 4시간 7분의 혈투를 치른 뒤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비로소 통증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화장실에 기어들어갈 만큼 허리 통증이 극심해지자 서울로 후송됐고, 급기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눈치 빠른 기자들이 박철순의 허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OB 구단 측에 물었지만 구단 측은 일단 “가벼운 요통일 뿐”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철순은 그해 추석(10월 1일)은 물론 그 이후에도 꼼짝을 하지 못하고 병원 침대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은 10월 5일. 박철순의 허리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선수에게나 OB 구단에게나 절망적인 상황. 한국시리즈 1차전에 내세울 선발투수가 마땅치 않은 OB로선 한숨만 나오는 시간이었다.


<현역에서 물러나는 박철순 ⓒ두산베어스>



  ●반복되는 운명의 장난, ‘불사조가 된 절절한 사연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9월 29일 8회말 번트 수비에서 허리 통증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박철순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아니, 번트 수비 후 허리를 삐끗했을 때 교체가 됐더라면 어땠을까.


 그땐 후기리그 우승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선수도, 코칭스태프도 허리 부상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요즘이야 선수 보호를 우선시하지만, 당시엔 팀을 위해, 승리를 위해 누구든 투혼을 불살라야 했다. 그땐 박철순이 아니더라도 에이스라면 누구나 그렇게 던졌던 시절이다.


 박철순에게 당시 상황을 묻자 “또 불사조 얘기하시려고? 이젠 그 얘긴 그만합시다”라며 웃어넘긴다. 허허로운 웃음 마디마디가 아리게 다가온다. 당시의 고통이 허리를 타고 다시 밀려오는 듯했다.


 박철순은 허리 통증으로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진통제 주사를 맞고 한국시리즈에 3차전부터 등판해 우승을 이끌었다(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서술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듬해 2월 대만 스프링캠프 도중 허리 디스크 증세로 쓰러져 일본 병원으로 후송되는 아픔을 겪었다. 오랜 재활 끝에 1983년 9월 22일 MBC전에 등판했지만 하늘의 장난처럼 1회말 시작하자마자 송영운의 직선타구에 허리를 맞고 쓰러져 다시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1984년 4월엔 미국 LA로 건너가 척추 디스크 수술을 했고, 머리카락이 다 빠진 채 휠체어를 타고 귀국한 그를 보고 모두들 ‘야구선수 박철순은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또 일어섰다. 1985년 8월 20일 청보전에서 승리하면서 1062일 만(1982년 9월 23일 해태전 승리 이후)에 첫 승을 맛본 것. ‘박철순은 끝났다’고 생각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해 9월 22일 대구에서 훈련을 하다 허리 부상이 재발했고, 1985년 5월 17일 대전 빙그레전 승리로 3차 재기에 성공했다.


 그런데 또 예상하지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1988년 속옷 CF 촬영 도중 새벽 한강변에서 러닝을 하다 점프를 하는 장면을 찍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점프 후 착지를 하는 과정에서 왼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킬레스건을 이어 붙였지만 왼발 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상황. 야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마운드로 돌아왔고, 1990년 7월 4일 잠실 해태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부활했다. 훗날 한화 송진우에 의해 깨지긴 했지만, 1994년 9월 4일 전주 쌍방울전에서는 역대 최고령(35세5개월) 완봉승 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쓰러지면 일어서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면 또 쓰러지는 운명의 장난. 그럼에도 그는 그 운명을 탓하지 않았다. 시련에 무릎 꿇지 않고 끝끝내 마운드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를 두고 우리는 ‘불사조’라 불렀던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몸과 영혼을 던진 이 곳에 내 유니폼을 던져두고 떠나는 날, 늘 걷던 담벼락에 이렇게 쓰면 어떨까. ‘운명아 비켜서라, 내가 간다’라고.』 <혼을 던지는 남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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