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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18. 2023

[12] '개막전 최강' 전설의 시작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83년 4월 2일. 기온은 뚝 떨어졌고, 바람은 회오리처럼 이리저리 잠실구장을 휘감았다. 경기가 시작될 무렵엔 진눈깨비까지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야구의 계절이 돌아오고, 화창한 봄 날씨를 기대했지만,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1983년 개막전이 치러졌다.


 그리고….


 박철순도 없는 그날에, 신인 선발투수 장호연은 조용히 반란을 준비했다.


 [베팬알백ㅡ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2번째 주제는 '개막전 최강팀' 베어스의 전설이 시작된 지점, 바로 1983년 개막전에 얽힌 스토리다.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 ⓒ두산베어스>


●개막전, 베어스가 만들어가는 또 다른 전설


 '개막전의 팀'이라고 하면, 이젠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바로 두산 베어스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KBO리그 역대 모든 팀을 통틀어 개막전 최강자다.


 2022시즌 개막전에서도 한화에 6-4로 승리하며 다시 1승을 추가했다. OB 시절을 포함해 개막전 통산 24승1무13패. 승률만 무려 0.649다. 24승은 개막전 최다승 기록이다. 개막전 표본수가 적은 KT(4경기)와 NC(7경기)를 제외하고 통산 10경기 이상 개막전을 치른 역대 팀 중에 승률 역시 1위다. 그래서 베어스 팬들은 누구보다 개막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개막전만 되면 승리에 대한 부푼 기대감을 안고 야구장으로 향한다.

 

   개막전 신화의 시작은 어디일까. 베어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83년이 그 시발점이다. 프로야구 원년이 아니라 1983년이라는 점이 의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원년인 1982년과 이듬해인 1983년에는 개막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공식 개막전을 딱 1경기만 편성했다. 1982년에는 3월 27일 서울운동장(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MBC전으로 치러졌다. OB는 원년에 개막일 이튿날인 3월 28일에 동대문구장에서 MBC를 상대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게임을 펼쳐 9-2로 승리했다(베팬알백 5편 참고). 그러나 이는 KBO에서 집계하는 개막전 전적과 성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OB로서는 최초의 게임이었지만, MBC는 두 번째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4월 2일 잠실구장에서 전년도 우승팀 OB와 서울을 연고로 하는 MBC가 공식 개막전을 치렀다. 베어스가 최초로 개막전에 초대된 날이었다.


<1983년 OB베어스 선수단 ⓒ두산베어스>


●원년 우승팀 OB, 신인은 4명만 영입


 1983년 개막전을 설명하기에 앞서 프로야구 전체의 상황과 시대적 환경에 대해서 미리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1982년 9월에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가 한국에서 개최됐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3점홈런으로 기억되는 바로 그 대회다.


 이를 위해 국가대표 슈퍼스타들의 프로 진출이 유보된 상태에서 1982년 봄에 프로야구가 출범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강제적으로 아마추어에 묶인 채 프로야구가 시작한 것이었다.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개발도상국에 접어든 한국에서 개최되는 최초의 세계 대회로, 국위를 선양해야 하는 정부 차원에서도 실업 최고의 선수들이 프로 입단을 할 수 없도록 유도했다.


 어쨌든 이 대회에서 한국은 드라마 같은 승부로 극적인 우승을 차지하면서 부수적인 효과를 얻었다. 용광로처럼 끓어오른 야구 인기를 고스란히 프로야구로 옮길 수 있었고, 족쇄처럼 아마추어에 묶여있던 슈퍼스타들이 마침내 프로에 가세해 전력 강화는 물론 흥행 면에서도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 중 프로에 입단한 스타의 이름만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하다. 삼성은 에이스 후보로 꼽히던 김시진을 비롯해 최고의 타자로 평가받던 장효조까지 붙잡았다. 여기에 박승호와 김근석 등 총 10명의 선수를 새롭게 영입해 한층 더 탄탄한 선수단을 구성했다.


 MBC는 1982년 9월에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나자마자 시즌 말미에 초특급 유격수 김재박을 입단시켜 잔여경기를 뛰게 했다. 1983년엔 외야수 이해창 김정수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강하면서 최강의 야수진을 구축했다. 투수 오영일과 포수 박철영 등 총 9명을 새롭게 계약해 우승권 전력을 갖췄다.


 원년 하위권에 빠졌던 롯데는 불멸의 투수 최동원은 물론 포수 심재원과 한문연, 2루수 박영태, 외야수 유두열 등 11명을 데려와 알차게 전력 보강을 마쳤다. 심지어 원년 꼴찌팀 삼미도 투수 임호균과 포수 김진우, 내야수 정구선, 이선웅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하는 등 총 13명을 끌어들여 만만찮은 변화를 예고했다.


 여기에 1983년부터 얇은 선수층을 보강하고 전력평준화를 이루기 위해 재일교포 선수를 영입하기 시작했는데, 원년에 선수 부족으로 하위권에 빠진 삼미와 해태는 재일교포 선수들을 우선적으로 배정받는 특혜를 누렸다. 삼미는 결국 1983년 30승을 기록한 장명부와 내야수 이영구를 잡았다. 해태는 곧바로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끈 투수 주동식과 포수 김무종을 비롯해 국내 선수까지 10명을 보강해 전력이 급상승했다.


 그러나 OB는 재일교포 영입도 없이 4명의 신인만 새롭게 데려왔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전에서 결승 3점포를 날리며 한국의 우승에 일등공신이 된 한대화를 비롯해 투수 장호연과 정선두, 1983년 신인왕이 된 외야수 박종훈(현 한화 단장)이 주인공이었다. 박종훈 역시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 뽑기 위해 1982년 프로 진출이 유보된 대상자였지만 정작 부상으로 대회엔 참가하지 못하는 비운을 맛봤다.


 이에 대해 박용민 OB 초대 단장은 "그 시절 구단은 감독 말만 듣고 선수가 필요한지, 아닌지를 판단했는데 원년 우승팀으로서 전력을 어느 정도 갖춰놓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꼭 필요한 4명 정도만 보강해도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OB에는 2루수 요원으로 김광수와 구천서가 버티고 있었고, 유격수 유지훤, 3루수 양세종 등이 포진해 있었다. 더군다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최고의 영웅 한대화(대전고-동국대 출신)도 신인 내야수로 가세하는 상황. 대전고 출신의 국가대표 내야수 정구선과 서울고 출신의 이선웅 역시 OB가 우선권을 가졌지만, 내야수가 포화 상태인 데다 계약 조건이 맞지 않아 자유계약으로 풀었다. 둘은 결국 삼미 유니폼을 입었고, 그 중 정구선은 1983년부터 1985년 3년 연속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며 KBO리그를 대표하는 2루수로 자리를 잡았다.



 ●루키 장호연이 1983년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된 이유

<장호연(가운데)과 계형철(오른쪽) ⓒ두산베어스>


 역사적인 OB의 최초 공식 개막전. 선발투수는 뜻밖에도 장호연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던 시절이라 카드를 숨기고 상대를 속이는 게 중요한 전략이었다. 팀 내에서도 당사자와 코칭스태프 정도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충암고와 동국대를 나온 장호연은 직구 구속이 시속 130㎞를 넘을까 말까한 느린공을 던지는 우완투수였다. 청소년대표를 지냈지만 국가대표는 아니었다. 그러나 각종 변화구를 현란하게 던지고 절묘한 컨트롤과 완급조절로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지저분한 공끝을 자랑하면서 통산 109승과 110패를 달성하는 전설을 남겼다(장호연에 대해서는 추후 1988년 노히트노런 이야기를 할 때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OB가 장호연을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에이스 박철순의 부상 공백 때문이었다. 원년 우승을 위해 허리를 바친 박철순은 1983년 2월 대만 스프링캠프에 참가했으나 디스크 통증으로 쓰려졌다. 대만에서 일본으로 긴급 후송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2월 9일 도쿄의 한 정형외과에 입원해 25일간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사실상 전기리그는 뛰기 힘들다"는 판정을 받았다.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투수코치는 이에 따라 박철순이 돌아올 때까지 계형철과 선우대영, 장호연을 선발로 쓰고, 박상열과 황태환을 불펜으로 돌려 마운드를 운영할 그림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인인 장호연이 개막전 선발 카드로 결정된 것은 사실 의외였다. 당시 OB 사령탑을 맡았던 김영덕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자.


 "장호연이 연습 때 잘 던졌어요. 박철순이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후보를 추려봤지만 몇몇 다른 선수들도 부상으로 빠져 있었죠. 훗날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는 투수가 됐지만 계형철은 당시 볼은 빨라도 컨트롤이 부족했던 투수였어요. 장호연은 김성근 투수코치가 충암고 감독으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제자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프로에 오고 나서 연습경기에서도 잘 던지더라고요. 그래서 신인이긴 해도 제구력과 변화구가 좋은 장호연을 1983년 개막전 선발로 선택했습니다."


 현재 대구에 살고 있는 장호연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고등학교(충암고) 시절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는데 그때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영덕 감독님하고 처음 인연을 맺었어요. 제가 특기생으로 동국대 체육교육과에 들어가 솔직히 졸업 후엔 그냥 체육선생님을 할까, 실업야구선수로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4학년 2학기 때 실업팀 한일은행에서 오라고 하더라고요. 졸업 전에 미리 들어가 한일은행 촉탁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한일은행 대투수 출신의 김영덕 감독님이 거기 놀러 오셨다가 저를 보고는 '여기 왜 있냐'면서 'OB에서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요. 고민을 하다 OB에 입단하게 됐어요. 그리고 시범경기(3월 26일 마산) 때 MBC전에 등판해 잘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해 개막전 상대가 MBC였고, 그래서 그런지 저한테 선발로 준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개막이 임박해서가 아니라 사실 일찌감치 선발 통보를 받고 준비를 했습니다."



●최초 개막전 그날, 하늘엔 진눈깨비가 날리고


<1983년 개막전 기록지 ⓒ한국야구위원회>


 1983년 4월 2일, OB 베어스 역사적인 최초 정규시즌 개막전 라인업은 다음과 같았다. 신인 3명이 포진한 점이 눈길을 끈다.


1=*박종훈(중견수)

2=*한대화(3루수)

3=윤동균(우익수)

4=김우열(지명타자)

5=신경식(1루수)

6=김유동(좌익수)

7=구천서(2루수)

8=조범현(포수)

9=유지훤(유격수)

선발투수=*장호연

(*는 신인)


 MBC 역시 라인업에 신인이 3명 들어갔다. 이해창(1번 중견수), 김재박(3번 유격수), 김정수(8번 좌익수)가 주인공으로 모두 전년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국가대표 출신이다. 이들은 기존의 백인천(4번 지명타자), 이종도(5번 1루수), 이광은(6번 3루수) 등과 어울려 화려한 라인을 구축했다. MBC 선발투수는 에이스 하기룡. 무게감만큼은 분명 하기룡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역시 대봐야 아는 법이었다.


 OB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1회초 하기룡의 투구에 눌리며 공 9개 만에 삼자범퇴로 간단히 물러났다.


 반면 OB 선발투수 장호연은 1회말 신인 티를 내며 위기를 만났다. 2사까지는 잘 잡았지만 3번타자 김재박에게 볼넷을 허용했다. 이어 백인천도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내보내 2사 1·2루가 됐다.


 "김재박 선배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대한민국 최고 스타였고, 백인천 감독님은 당시 MBC에서 플레잉 감독이었는데 일본프로야구에서도 타격왕을 차지했던 강타자라 저에겐 우상이었습니다. 그날 긴장을 많이 했어요."


 장호연은 프로 데뷔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현역 시절 제가 마운드에 섰을 때 표정만 보고 다들 '능글맞게 긴장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저는 늘 긴장했어요. 긴장할 때면 전광판 방향으로 돌아서서 기도도 많이 했죠. 1983년 개막전 선발투수 통보를 받았는데 개막 하루 전날엔 너무 긴장을 하다 보니 잠을 거의 못 잤어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개막전을 하러 야구장에 나갔죠. 그런데 당시엔 프로야구라고 해도 뭔가 어수선했어요. 개막전 이벤트를 한다고 무용수들이 실내로 와서 제 눈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그랬으니까요."


 '눈이 더 시뻘게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 장호연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가 공이 빠른 투수가 아니잖아요. 물론 마음만 먹으면 시속 140㎞ 정도까지는 던질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야구는 속도 가지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요즘 시속 150㎞ 이상 던지는 투수도 많아요. 공이 빠르면 유리하긴 하죠. 그런데 속도보다 공을 변화시키는 게 더 중요해요. 저는 공에 변화를 주는 재미로 야구를 했어요. 150㎞ 던져도 얻어맞고 내려오잖아요. 유희관 같은 투수도 안 얻어맞을 수 있거든요. 아무튼 1983년 개막전에 바람도 불고 진눈깨비가 날리고 날씨도 추웠는데, 오히려 제겐 유리한 환경이었던 것 같아요. 제 직구가 120㎞대라 타자들이 눈에 보이고 만만하니까 막 덤비더라고요. 그런데 직구보다 빠른 시속 135㎞짜리 슬라이더를 던지니까 타자들이 타이밍을 잘 못 잡더라고요. 그날 바람이 홈으로 불었기 때문에 공에 변화만 살짝살짝 주면 됐어요. 그걸 이용했죠. 커브도 똑같은 커브가 아니고, 슬라이더도 똑같은 슬라이더가 아니죠. 크게 변하기도 하고 작게 변하기도 합니다. 커브가 회전만 빙글빙글 돌다 떨어지지 않고 쑥 밀고 들어가는 것도 있었어요. 야구공 실밥이 108개 아닙니까. 그걸 이용하는 거죠."


 다시 경기로 돌아가 보자. 장호연으로선 1회말부터 1사 1·2루 위기를 맞이했다. 5번타자 이종도가 등장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초구에 스트라이크부터 꽂아 넣고 시작해야 했다. 이어 2구째 공에 이종도의 방망이가 돌았다. 코스가 절묘한 1루수 쪽 내야안타성 타구였다. 그런데 1루수가 투수에게 공을 던져주는 찰나에 김재박이 3루를 돌아 홈을 향해 질주했다. 김재박은 상대 수비수가 타자에게 신경을 쓸 거라 판단하고 허를 찌르는 역주를 펼쳤다.


 "순간적으로 김재박 선수 별명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라운드 여우' 아닙니까. 그래서 타자가 아니라 3루 쪽을 재빨리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홈을 노리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결정적이었습니다. 김재박 선수가 홈과 3루 사이에 런다운에 걸리면서 아웃돼 위기를 벗어났죠. 그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타자만 보다가 실점을 했다면 제가 초반에 그냥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김재박을 태그해 잡아낸 조범현 포수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소환했다. "눈발이 날리고 날씨가 추웠는데 1회에 그 위기를 벗어난 게 장호연한테는 컸던 것 같다"면서 "장호연은 신인이었는데 공끝이 정말 지저분한 투수였다. 사인만 주면 타자들 히팅포인트만 살짝살짝 벗어나게 영리하게 던졌다"며 웃었다.


<1983년 개막전 1회말 공수교대 모습 ⓒ두산베어스>


 2회말에도 장호연은 2사까지 잘 잡아놓고 김정수와 김인식을 연속 볼넷으로 내보내며 흔들렸다. 이어 이해창의 직선 타구가 중견수에게 잡히면서 또 위기를 탈출했다. 3회말에는 삼자범퇴로 막아 안정을 찾았다.


 0-0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균형이 무너진 것은 4회초, OB의 공격 때였다. 한꺼번에 7점을 뽑으며 승기를 틀어쥐었다.


 1사 후 4번타자 김우열이 볼넷으로 나간 뒤 투수 견제구가 빠지는 사이 2루까지 진출했다. 신경식의 우익수 쪽 적시타로 선취점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결승타점이 됐다. 홈으로 송구된 사이에 신경식은 2루까지 내달렸다. 이어 6번타자 김유동의 적시타로 2-0 리드.


 상대가 흔들렸다. 구천서의 중전안타로 다시 1·2루를 만들었고 보크까지 나오며 주자는 2·3루로 변했다. 여기서 8번타자 조범현의 2타점 좌전 적시타가 터졌다. 스코어는 4-0. 9번타자 유지훤의 투수 앞 땅볼 때 투수가 2루로 던진 것이 악송구가 되면서 주자는 1·2루로 이어졌다.


 좀처럼 OB 공격이 끝나지 않았다. 1번타자 박종훈 타석. MBC 백인천 감독은 하기룡을 내리고 좌완 유종겸으로 교체했다. 박종훈이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나면서 모처럼 아웃카운트가 올라갔다.


 2사 1·2루. 여기서 장호연과 동국대 동기인 한대화가 타석에 들어섰다. 유종겸의 2구째였다. 한대화의 방망이에 걸린 타구는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좌월 3점홈런. 스코어는 순식간에 7-0으로 벌어졌고, 이 점수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변동이 없었다.


 한대화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결승 3점홈런으로 영웅이 됐는데, 이날도 또 3점홈런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훗날 해태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3점포를 날렸다. 홈런을 많이 치는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 3점홈런을 많이 때리면서 '해결사' 혹은 '3점홈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개막전 최초 완봉승-3점홈런 '개막전 사나이' 탄생


 이미 승부는 기울어진 분위기. 장호연은 4회말부터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고도 MBC 타선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갔다. '어~ 어~' 하다 보니 9회말 마지막 타자까지 도달했다. 결국 이해창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고 7-0 완봉승을 올렸다.


 9이닝 동안 투구수는 124개. 6안타와 6볼넷을 내줬지만 삼진 2개만 잡고도 무실점 승리를 거뒀다. 팬들에게 장호연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알렸다. 프로 데뷔전에서, 그것도 KBO리그 역사상 최초로 ‘개막전 완봉승’이라는 값진 기록을 아로새겼다.


"공 3개로 삼진을 잡는 것보다 공 1개로 맞혀잡는 게 낫죠."


 장호연이 한 방송광고에서 말했던 카피다. 실제로 현역 시절 그는 이 같은 말을 하곤 했다.


 "1-0으로 지는 것보다 10-9로 이기는 편이 낫다"는 말도 그의 어록 중 하나다.


 장호연은 타자를 압도하는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느린 공으로 타자에게 빨리 치라고 던지는 유형의 투수였다. 그 대신 배트 중심에만 맞지 않게 공에 갖가지 변화를 줬다. 한마디로 얄밉게 던지는 스타일이었다. 이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호연은 그날 이후 개막전만 되면 호출됐다. 1983년, 1985~1990년, 1992년, 1995년 9차례나 개막전에 선발등판했다. 이는 여전히 KBO 개막전 최다 등판 기록이다. 그리고 개막전 최다승(6), 최다 완투승(3승), 최다 완봉승(2승) 등 개막전에 걸린 갖가지 기록을 그의 이름으로 장식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88년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개막전에서는 사상 최초로 '개막전 노히트노런'의 역사를 썼다. 그러면서 '개막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장호연은 데뷔 시즌인 1983년에 개막전 승리투수로 출발해, 은퇴 시즌인 1995년까지 개막전 승리투수가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개막전의 사나이 한대화 ⓒ두산베어스>


 타자 쪽에서는 한대화가 '개막전의 사나이'로 통한다. 그 역시 프로 데뷔전인 1983년 개막전에서 홈런을 쳤을 뿐 아니라 은퇴하던 마지막 시즌 1997년 쌍방울 유니폼을 입고 개막전 홈런을 뽑아냈다. 개막전 통산홈런 7개로 역대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통산 개막전 최다 타점(19)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7개의 홈런 중 3차례나 개막전 1호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대화 역시 장호연과 비슷한 말을 했다.


 "남들은 나더러 '개막전의 사나이'니까 안 떨리는 줄 알지만, 신인 때나 은퇴할 때나 개막전은 늘 긴장됐어요. 신인 때도 정말 긴장하고 개막전에 들어갔는데 1회 첫 타석에서 어떻게 쳤는지도 모르고 아웃(유격수 땅볼)됐어요. 당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홈런을 치면서 프로 입단할 때부터 관심을 많이 받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MBC 김정수와 대졸 타자 랭킹 1~2위라고 비교도 많이 됐거든요. 부담이 컸죠. 그런데 4회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치니까 비로소 긴장이 풀리더라고요."


 장호연은 동국대 시절 동기 한대화와 얽힌 얘기 하나를 들려줬다.


 "프로 이전부터 개막전에 인연이 많았어요. 한대화하고는 청소년 대표팀에 함께 뽑히면서 서로 알게 됐는데, 동국대에 입학해서 1학년 때 개막전에서 저하고 한대화하고 잘해서 이기기도 했습니다. 당시 동국대는 전력이 약해 연·고대를 이기는 건 기적이라고 했는데 연세대를 이겼거든요. 연세대에 박철순 최동원 김봉연 박해종 등 스타들이 즐비했는데, 제가 7이닝을 막아 승리투수가 되고, 뒤에 김성한 선배가 투수로 올라와 3이닝 마무리를 맡았죠. 한대화는 그 경기에서 3안타를 때린 걸로 기억합니다. 둘이 개막전에 인연이 많은 건 그때부터입니다."


 장호연은 1983년 개막전에서 모두가 깜짝 놀랄 완봉승을 거뒀지만, 이후 승보다 패가 많은 투수가 됐다. 그해에 6승17패로 최다패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지금 돌이켜봐도 당시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코칭스태프가 저에게 기회를 정말 많이 주셨어요. 남들 몇 년 동안 경험해야 할 것을 1년 만에 경험했죠. 개막전에서 승리한 다음에 조금 방심을 하기도 했지만, 프로의 매운맛을 제대로 봤죠. 그렇지만 그런 패전의 경험들이 쌓여서 나도 100승 투수가 될 수 있었다고 봐요."


 장호연은 훗날 성장의 자양분이 된 1983년 신인 시절을 고마운 마음으로 반추했다.


 '개막전 최강자' 베어스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개막전에만 9차례 등판해 6승2패를 거둔 장호연이 있었기에 베어스는 역대 개막전 최다승과 최고승률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베어스가 있었기에 장호연은 매년 개막전만 되면 이름이 나오는 '개막전의 사나이'가 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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