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83년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년도 우승을 다퉜던 OB와 삼성의 몰락이었다. 6월 11일까지만 해도 전년도 우승팀답게 3위를 지키며 체면을 유지했으나 6월 5~15일 사이 6연패를 당하며 꼴찌로 곤두박질했고, 롯데와의 전기리그 최종전에서 박상열이 1안타로 호투하고도 1-0으로 지는 바람에 롯데와 삼성에 반게임차로 뒤진 최하위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야구사 1176페이지>
늘 좋은 기억만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의 추억 저편엔 아픈 역사도 함께한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3번째 주제는 원년 우승팀에서 이듬해 곧바로 최하위로 떨어진 사연이다. 1983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개막전 승리 산뜻한 출발…원년 우승팀의 위용
출발은 산뜻했다. [베팬알백_12]에서 설명했듯이 OB는 4월 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1983시즌 공식 개막전에서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쌀쌀한 날씨 속에 신인 투수 장호연의 완봉투와 한대화의 3점홈런 등으로 7-0으로 승리하며 기분 좋게 시작했다(요즘엔 5개 구장에서 10개팀이 개막전을 동시에 치르지만, 당시만 해도 공식 개막전은 1경기만 특별 편성해 주목도를 높였다).
개막 이튿날인 3일. 비로소 전국 3개 구장에서 6개 팀이 일제히 경기를 펼쳤다. 이날의 최대 관심사는 부산 구덕야구장 쪽이었다. 삼미와 롯데의 대결. 삼미는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카프 에이스로 활약한 재일교포 장명부를 영입했고, 롯데는 아마추어 시절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한 최동원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장명부는 쌀쌀한 날씨 속에 선발등판해 기대대로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롯데는 선발 노상수에 이어 승부처에서 최동원을 투입할 기회를 엿봤다. 0-2로 끌려가던 4회초 수비 때 만루 위기를 맞자 최동원을 구원 카드로 빼들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3연타를 맞으면서 4점을 더 내주고 말았다. 삼미가 부산에서 롯데를 10-4로 꺾었다.
광주 무등야구장에서는 해태와 삼성이 7회까지 5-5 동점인 상황에서 강우 콜드게임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첫 판부터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잠실구장. 다른 구장이 사실상 시즌 개막전을 치를 때, 전날 공식 개막전을 펼친 잠실은 개막 이틀째를 맞이했다. OB는 MBC전 선발로 계형철을 내세웠다. 그러나 2회초 먼저 2점을 뽑고도 2회말 2실점한 뒤 4회말 추가 3실점하면서 4-5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계형철(당시만 해도 공은 빨랐지만 제구력이 부족한 투수였다)이 폭투만 3개를 범하는 등 초반에 승기를 내주면서 연승에 실패했다. 개막 2연전에서 1승1패를 기록했다.
OB는 하루 쉬고 5일 잠실에서 다시 MBC를 만났다. 여기서 루키 장호연을 또 선발로 내세워 MBC를 5-4로 제압했다. 7일 홈구장 대전에서 해태를 만나 8-2로 승리했다. 초반 4경기에서 3승1패의 기세. 이때만 해도 원년 우승팀의 저력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다.
●전기리그 충격의 최하위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OB는 이후 레이스에서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4월 9일과 10일 대구에서 삼성에 연패를 하더니, 12일과 13일 대전에서 삼미에도 연패를 당했다.
원년의 영웅 박철순이 스프링캠프에서 허리 통증을 호소해 이탈한 가운데 선우대영-장호연-장호연-박상열이 줄줄이 패전투수의 멍에를 쓰면서 충격의 4연패를 당했다.
특히 12일에 삼미와 연장 13회까지 4시간 40분간의 혈투를 펼쳤는데, 13회초 대거 6실점하며 5-11로 패한 것이 뼈아팠다.
‘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 감독(김경기 전 해설위원의 아버지)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삼미는 이를 갈고 나왔다. 원년 OB전 16전 전패의 수모를 씻으려는 듯 1983년 OB와 시즌 첫 대결부터 장명부를 선발로 투입했고, 13회까지 완투시켰다.
‘너구리’ 장명부는 삼미가 1983시즌을 앞두고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억2000만원을 주고 영입한 회심의 카드. 팀당 100경기로 치러진 그해 장명부는 홀로 60경기에 등판해 30승을 거두는 초인적인 활약을 펼쳤다. 36경기 완투와 427.1이닝 투구 역시 앞으로 영원히 깨지기 힘든 불멸의 영역으로 꼽힌다.
장명부는 이날 연장 13회까지 ‘허허실실 전법’으로 16안타를 내줬지만, 위기만 되면 전력투구로 실점을 최소화했다. 묘한 미소와 능글능글한 표정. 그리고 너구리 같은 영리한 투구로 OB 타선을 주물렀다.
OB는 선발투수 강철원에 이어 6회부터 장호연을 구원투입했다. 장호연은 데뷔 후 2연승을 기록하다 10일 삼성전에 선발등판해 첫 패를 기록했는데, 하루 휴식 후 다시 구원등판한 것이었다. 장명부와 팽팽한 싸움을 하면서 연장 12회까지는 역투를 펼쳤지만, 이틀을 쉰 뒤 다시 던진 탓에 힘이 다한 나머지 13회에 대량실점을 하며 패하고 말았다.
이날은 프로야구사에서 알고 지나가야 할 의미 있는 승부이기도 했다. OB로선 프로야구 출범 후 삼미전 첫 패배였다. 원년 삼미전에서 거둔 16전 전승의 역사도 이날 마감했다.
삼미는 내친김에 13일에도 작심한 듯 임호균을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임호균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당시 활약한 국가대표 출신 우완투수로, 제구력 면에서 당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장명부와 임호균으로 새롭게 원투펀치를 짠 삼미는 독기를 품고 나왔다. OB는 결국 임호균의 완투에 밀리면서 이날도 1-3으로 패했다.
OB는 그래도 6월 11일까지는 초대 챔피언답게 6개 팀 중 3위를 지키며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위기 반전만 일어나면 마지막 스퍼트로 대역전극을 꿈꿀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6월 5~15일 사이 6연패에 빠지며 꼴찌로 내려앉았다. 롯데와 전기리그 최종전에 선발등판한 박상열이 ‘꼴찌는 면해보자’는 듯 이를 악물고 9회까지 1안타로 막는 역투를 펼쳤지만 0-1으로 졌다. 전기리그 22승28패. 결국 롯데(22승27패1무)와 삼성(21승26패3무)에 0.5게임차로 뒤진 최하위의 성적표를 쥐고 말았다.
후기리그가 남아 있긴 해도 원년에 정상에 오른 팀이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결과였다.
사족 하나. OB는 과거엔 우승 후 이듬해 부진에 빠지는 징크스를 되풀이했다. 1983년뿐만 아니라 1995년 우승 후에도 이듬해인 1996년 최하위로 추락했다. 두산으로 구단 이름이 바뀐 뒤 2001년 첫 우승을 차지했지만 2002년에 5위로 떨어졌다. 꼴찌는 아니었지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승 이듬해에 부진에 빠지는 이상한 징크스는 이젠 먼 옛날 일이 됐다.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2016년에 통합우승에 성공했고, 2019년 통합우승으로 5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2020년에 이어 2021년까지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으면서 사상 최초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KBO 새 역사를 썼다. 한 해만 반짝하는 팀이 아니라 지속적인 강팀으로, 베어스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 막판 5연승 뚝심…후기리그 극적 탈꼴찌
1980년대(1988년까지)에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눠 치러졌기에, 전기리그 실패는 전기리그에서 끝난다는 장점이 있었다. 후기리그에 우승하면 또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 전기리그 실패 팀에게도 후기리그부터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OB는 후기리그에서도 꼬였다. 개막전인 7월 9일 대전 해태전에서 3-6으로 패하더니 20일 대전 MBC전까지 7연패의 늪에 빠졌다. 장호연은 7연패 기간에 무려 3차례나 패전투수가 됐다.
후기리그는 계속 진행됐지만 OB는 좀처럼 치고 나갈 기회를 잡지 못했다. 3연승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시즌 말미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계산에서 이탈하는 선수가 속출했다. 박철순도 없는 상황에서 원년 6차례 완투 속에 7승6패(승운이 따르지 않음)를 올린 좌완 에이스 선우대영은 1983년 무리한 연투 속에 어깨뼈 힘줄이 끊어졌다. 4승6패1세이브의 성적을 남긴 채 프로 2년 만에 은퇴했다.
1982년 후반기 혜성처럼 나타나 5연승 무패를 기록한 뒤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까지 꿰찬 잠수함 투수 강철원마저 부상으로 빠졌다. 강철원은 1983년 4연승을 보태 프로 데뷔 후 정규시즌 9연승 무패 기록을 세웠지만 어깨 부상으로 2패를 추가한 뒤 이탈했다. 그는 1986년 청보로 트레이드된 뒤 은퇴할 때까지 통산 9승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더 이상 승수를 추가하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었다. 데뷔 후 9연승 무패 기록은 훗날 1992년 삼성 신인 오봉옥이 데뷔 첫해 13승 무패를 기록할 때까지 이 부문 최고 기록이었다.
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만루홈런으로 초대 MVP에 오른 김유동은 팀 무단이탈로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자체 징계를 받았다.
여기에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투수코치의 갈등 관계는 표면화됐다. 선수 기용을 놓고 마찰을 빚다 경기 도중 김성근 코치가 가방을 싸서 나가버리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팀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8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그나마 시즌 최다인 5연승을 비롯해 7승1패의 호조 속에 후기리그를 마쳤다. 이로 인해 후기리그에서는 롯데를 1.5게임차로 제치고 최하위를 면했다. 전·후기리그를 합친 1983년 전체 성적(44승1무55패)도 롯데(43승1무56패)에 1게임차 앞서 탈꼴찌에 성공했다.
● 재기 몸부림 박철순, 직선 타구 맞고 시즌 아웃 불운
박철순은 허리 부상에서 벗어나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으나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다 1983년 전기리그 막바지인 6월 22일 선두를 달리던 해태를 상대로 시즌 처음 시험등판을 했다. 여기서 1이닝 투구를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김일권과 김성한을 삼진으로 잡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감감무소식. 결국 해태전 10개의 투구도 허리에 부담이 됐던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OB가 후기리그에서 부진에 빠진 것은 박철순으로 한정시킨다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승권으로 치고 나갔다면 무리한 등판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복귀를 준비하던 박철순은 9월 12일 대전 삼성전에 선발로 나섰다. 시즌 2번째 등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3이닝 5피안타 3볼넷 3실점을 기록한 뒤 마운드를 내려가고 말았다. 오랜만의 투구여서 그런지 3이닝 동안 무려 79개의 공을 던질 정도로 제구가 되지 않았다.
패전투수가 되고도 반가운 소식은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서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는 점. 박철순은 3일간의 휴식 후 9월 16일 대전 삼성전에 다시 선발 등판했다. 이번엔 6회까지 2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0-0으로 진행돼 박철순은 승패를 기록하지 않는 ‘노 디시전(No Decision)’ 상태로 물러났다. OB는 9회초 이만수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해 0-1로 패했지만, 박철순의 재기 가능성을 확실히 발견했다는 점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늘은 또다시 장난을 쳤다. 불사조에게 찾아온 또 다른 시련. 9월 22일 잠실 MBC전이었다. 선발등판한 박철순은 1회말 상대 4번타자 송영운의 총알 같은 직선타구에 오른쪽 골반 부위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공을 맞은 부위보다는 쏜살같이 날아오는 공을 피하기 위해 몸이 솟구치다 땅에 떨어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그 충격파가 다시 허리에 가해진 게 문제였다.
당시 경향신문은 ‘박철순, 운도 없다’는 제목 아래 ‘OB 박철순의 금년 시즌은 끝났다’고 기사 리드를 뽑았다.
박철순은 급히 강남성모병원으로 이송됐다.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 타구의 충격으로 골절이 되지는 않았지만, 허리 디스크 증세가 악화되면서 ‘시즌 아웃’을 선고받고 말았다. 23일 밤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재차 정밀검진을 받았지만 결과가 바뀌진 않았다.
9월 22일. 박철순에게는 마치 운명처럼 악몽이 지긋지긋하게 되풀이된 날이다. 1982년 22연승 기록이 깨진 날도 9월 22일 롯데전이었고, 1983년 9월 22일에 이렇게 타구에 맞아 허리 디스크를 다쳤으니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투수로선 끝났다”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재기해 다시 마운드에 섰지만 3번째 부상도 1985년 9월 22일에 찾아왔다. ‘불사조 신화’ 속에 9월 22일은 박철순에게 잊고 싶은 날(?)로 자리 잡고 있다.
●맏형 황태환 구원왕, 루키 박종훈 신인왕이 위안거리
팀 성적이 추락한 OB는 개인 타이틀에서도 밀렸다. 타격 쪽에서 보면 신인 박종훈이 타율 0.312로 4위에 오른 것이 팀 내 최고 성적이었다. 김우열이 0.291로 10위에 겨우 턱걸이했고, 원년 타격 2위 윤동균은 0.275로 20위에 머물렀다.
마운드에서는 박상열이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10승을 수확해 팀 내 유일한 두 자릿수 승리투수가 되며 다승 공동 7위에 랭크됐고, 계형철이 9승으로 뒤를 받쳤다.
개인 타이틀 홀더가 1명 있긴 있었다. 바로 구원왕(20세이브포인트)에 오른 6개 구단 최고령 투수 황태환이었다. 황태환은 1982년 초대 골든글러브(당시엔 공격력을 제외한 수비율로만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가림) 투수 부문 수상자이기도 했다.
첫해 투수로서 성적은 6승5패3세이브. 이듬해인 1983년 39경기에 등판(선발 2경기 포함)해 105.1이닝을 던지면서 6구원승과 14세이브로 20세이브 포인트(2003년까지는 구원승+세이브로 구원왕을 가렸다)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 2.65는 팀 내 1위이자 리그 전체 4위. 사실상 황태환 의존도가 컸던 시즌이었다.
신인 장호연은 개막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17패(6승)로 시즌 최다패 1위 투수가 됐다. 최다패 2위 장명부(30승16패)보다 1패가 더 많았다. 장호연은 이 경험을 밑거름 삼아 훗날 100승 투수(109승110패17세이브)로 도약하게 된다.
또 하나의 수확은 박종훈의 신인왕 수상. 박종훈은 1983년 최다안타 공동 1위에 올랐지만 당시엔 최다안타가 공식적으로 개인 타이틀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박종훈이 KBO리그 사상 최초의 신인왕에 오르는 과정은 [베펜알백] 다음편에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