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최초’라는 수식어가 가득한 OB 베어스의 역사. 그중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최초’ 역사가 있다. 바로 KBO리그 최초 신인왕 배출이다. KBO는 1983년부터 최우수 신인(신인왕)을 선정하기 시작했는데, 첫 주인공이 OB 베어스 박종훈이었다. 베어스는 그 이후에도 전통을 이어가며 총 7명의 신인왕을 내놓았다. KBO리그 역사에서 가장 많은 신인왕을 배출한 구단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베팬알백] 14번째 이야기는 ‘신인왕의 산실’ OB 베어스가 프로야구 최초 신인왕을 배출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승팀에서 꼴찌팀 전락…1983년 유일한 낙은 초대 신인왕 배출
“종훈아~, 종훈이 어디 있니? 종훈아!”
1983년 10월 17일. 경기도 이천의 한 여관에서 구경백 매니저는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부리나케 박종훈을 찾아 뛰어다녔다.
“저, 여기 있습니다.”
박종훈은 무슨 일인가 싶어 여관방 화장실에서 대답을 했다.
“야, 축하해! 너 신인왕 됐대, 신인왕!”
“제가요? 그럴 리가….”
박종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나름대로 데뷔 첫해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신인왕까지 차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OB 베어스는 1983년 많은 일을 겪었다. 전기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아픔을 맛봤고, 후기리그에서도 6개 팀 중 5위에 그쳤다. 전·후기리그 100경기를 합쳐 종합성적 44승1무55패(승률 0.444)를 기록했다. 롯데(43승56패1무·승률 0.434)에 1게임차로 앞서면서 가까스로 최하위를 면했지만, 원년 우승 팀에서 1년 만에 사실상 꼴찌로 추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절대 에이스 박철순의 부재였다. 허리 부상 후유증 속에 박철순이 전력에 가세하지 못했고, 다른 투수들도 크고 작은 부상 속에 힘을 쓰지 못했다.
여기에다 OB는 시즌 후 김영덕 감독이 삼성 사령탑으로 넘어가고, 김성근 코치가 OB 베어스의 2대 감독으로 승격되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베팬알백] <11편>에서 설명했듯이, 베어스는 1983년 1월에 이천 OB맥주 공장 부지에 KBO 6개구단 중 최초로 전용연습장을 개장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실내훈련장은 물론 웨이트트레이닝장과 샤워시설까지 갖춰 ‘육성의 요람’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용연습장 내에 선수단 숙소는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선수들은 요즘으로 치면 모텔 격인 이천의 한 여관을 잡아 김성근 신임 감독의 지휘 아래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날 언론사 한 중견기자가 전화로 소식을 알려줬어요. 기자단 투표에서 박종훈 선수가 신인왕으로 선정됐다고 말이죠. 그래서 당사자한테 기쁜 소식을 전해주려고 찾아다녔는데 박종훈 선수가 여관방 화장실에 있더라고요. 볼일을 보다가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거죠. 하하.”
당시 구단 매니저를 맡은 구경백 현 일구회 사무총장은 그날의 일화를 들려주며 껄껄 웃었다.
●박종훈 장호연 한대화…신인드래프트의 수확
“인하대 투수 오영일!”
“상업은행 외야수 박종훈!”
시곗바늘을 1년 전으로 돌려보자. 1982년 11월 10일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실시한 MBC와 OB의 신인 드래프트 현장. 먼저 지명권을 행사한 MBC가 당시 대학 최고 투수로 꼽히던 오영일(배명고-인하대)을 찍었다. 그러자 OB는 국가대표를 지낸 외야수 박종훈(신일고-고려대-상업은행)을 호명했다.
OB는 대전을 연고로 출발했지만, 프로야구 출범 당시 연고 지역 서울을 MBC에 양보하고 3년간 대전에 임시로 내려가기로 약속했다. 그 대신 대전·충청권의 고교는 선수층이 얇아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서울 고교 출신 선수를 놓고 MBC와 2대1로 뽑기로 합의를 한 바 있다. 원년엔 MBC가 2명을 먼저 호명하고 OB가 1명을 지명하는 방식으로 선수를 배분했다.
1983년엔 신인 드래프트 방식을 약간 손질했다. MBC와 OB가 각자 데려가고 싶은 선수를 먼저 지명했다. 두 팀이 중복 지명하는 서울 지역 출신 선수에 대해서는 드래프트를 실시했다. MBC와 OB에 중복 지명된 선수는 총 10명. 정확히 2대1로 나눌 수는 없어 MBC가 6명, OB가 4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절충안을 찾았다.
10명 중에 MBC는 당시 배명고-인하대 출신의 오영일을 포함해 김용수(동대문상고-중앙대) 기세봉(충암고-포철-경리단) 신계석(경기고-경희대) 박철영(배명고-연세대) 김정수(신일고-고려대) 등 6명을 뽑았고, OB는 신일고-고려대-상업은행 출신의 박종훈에다 장호연(충암고-동국대) 정선두(장충고-롯데-경리단) 이선웅(선린상고-인하대) 등 4명을 지명했다.
OB는 중복 지명되지 않은 충청권 고교 출신 자원 중 한대화(대전고-동국대)와 정구선(대전고-동국대-경리단)을 선택했다.
그런데 당시 OB는 정구선과 이선웅을 삼미에 통 큰 양보를 하게 된다. 1982년 원년 멤버 중 내야수로 김광수 구천서 유지훤 양세종에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결승 3점홈런을 치며 영웅이 된 특급 내야수 한대화도 새롭게 가세해 내야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원년에 형편없는 선수층으로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 쥔 꼴찌 삼미 측의 간곡한 요청까지 있어 정구선과 이선웅이라는 걸출한 내야수를 양보한 것이었다.
OB는 다른 팀과 달리 1983년 재일교포 영입도 하지 않았다. 외야수 박종훈, 내야수 한대화, 투수 장호연과 정선두 등 알짜배기 신인 4명만 새로운 피로 수혈하면서 1983년을 맞이했다.
●프로 원년에 상업은행에 입단한 이유
박종훈은 신일고 야구부 창단 멤버로 2학년 때인 1976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었고, 고려대 시절에도 각종 타격상과 도루상을 휩쓸며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프로야구가 출범해 원년 멤버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프로 대신 실업팀 상업은행에 입단했다.
“대학 졸업반 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어요. 그래서 프로 대신 고려대 야간 대학원에 합격을 해놓고 실업팀 상업은행에 들어갔던 거죠. 그런데 원년 프로야구를 지켜보다가 ‘내가 선택한 길이 맞나?’라는 내면의 갈등이 생기더라고요. 결국 프로에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은퇴 후에 다시 공부를 하자고 생각했죠.”
박종훈 현 KBO 경기운영위원(전 한화 이글스 단장)의 설명이다.
1982년 9월 4일에는 당시 한국 스포츠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 있었다. 바로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개막.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개최해 봤지만 서양 국가까지 참가하는 세계대회를 유치한 적은 없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확정한 상태에서 유치한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단순한 야구대회가 아니라 범국가적인 올림픽 준비 행사 중 하나였던 셈이다.
야구대표팀 선수들은 국가적 지원과 국민들의 관심 속에 1982년 7월 26일부터 합숙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국가대표에 뽑힌 박종훈은 훈련 도중 무릎을 다치면서 정작 대회에 뛸 수 없었다.
한국야구는 세계야구선수권 최종전에서 일본을 상대했다. 결승전이 아니라 풀리그로 치러졌는데,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7승1패를 기록 중이었기 때문에 최종전에서 이기는 팀이 결국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은 여기서 고려대 2학년 선동열의 완투와 김재박의 개구리번트, 한대화의 극적인 3점포로 우승을 맛봤다. 박종훈은 선수로서 우승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삼킨 채 결국 프로에 뛰어들었다.
●등번호 1번의 1번타자 ‘꽃미남’ 박종훈 돌풍
198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OB의 선택을 받은 박종훈은 첫 해부터 주전 중견수로 발탁됐다. 원년 우승팀 OB에는 윤동균 김우열 김유동 이홍범 등 베테랑 외야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김영덕 감독은 스프링캠프부터 발이 빠르고 야구센스가 좋은 루키 박종훈을 시야에 넣기 시작했다.
1983년 4월 2일 잠실구장에서 MBC와 맞붙은 시즌 개막전. 박종훈은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 출장했다. OB가 7-0으로 이긴 가운데 완봉승을 거둔 신인 투수 장호연과 3점홈런을 때린 신인 타자 한대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또 다른 루키 박종훈도 9회 마지막 타석에서 MBC 2번째 투수 유종겸을 상대로 2루타를 치며 데뷔전에서 안타를 신고했다.
등번호 1번의 1번타자. 꽃미남 신인 외야수는 안타 생산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외모만큼이나 깔끔한 플레이로 단숨에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차세대 OB 베어스 간판스타로 각광받으며 인기를 누렸다.
그해 팀이 치른 100경기 중 박종훈은 97경기에 출장해 3할대 타율 0.312(375타수 117안타)로 KBO리그 전체 타격 4위에 올랐다. OB 팀 내에서는 타율 1위였다.
117안타는 삼성 신인 장효조와 KBO 최다안타 부문 공동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최다안타는 1990년부터 개인 타이틀로 시상하기 시작해 당시엔 KBO 공식 타이틀은 아니었다. 그러나 1982년 불멸의 0.412 타율을 기록한 백인천이 작성한 103안타를 훌쩍 넘는 KBO 신기록이라는 점에서 박종훈과 장효조가 벌인 최다안타 싸움은 그해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빠른 발을 앞세워 117개의 안타 중 번트 안타를 10개나 만들었다. 3루 쪽으로 기습 번트 4개 시도해 2개를 안타로 연결했고, 1루 쪽으로는 드래그 번트를 10개 시도해 8개를 안타로 만드는 탁월한 번트 감각을 발휘했다.
“발도 빨랐고 무엇보다 야구 센스가 대단했어요. 당시엔 우타자든 좌타자든 내야안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기습 번트는 1루와 거리가 먼 3루 쪽으로 대는 게 정석이었는데, 박종훈은 1루 쪽으로 드래그 번트를 대고 달리면서 내야안타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1루 쪽 드래그 번트가 국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박종훈 때문이었죠.”
1983년 신인 박종훈을 1번타자이자 주전 중견수로 발탁한 당시 OB 베어스 김영덕 감독의 기억이다.
●KBO 최초 신인왕 “OB 베어스 박종훈!”
앞서 설명한 대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국가적 차원에서 원년 프로 진출이 유보된 특급 선수들이 1983년 대거 입단했다. 그만큼 신인왕 경쟁도 치열했다.
KBO는 1차 신인왕 후보 12명을 선정했다. 투수 중에서는 삼성 김시진을 비롯해 삼미 임호균, 롯데 최동원 등 6명이 1차 후보에 올랐다. 타자 중에서는 삼성 장효조, MBC 김재박 이해창 김정수, OB 박종훈 한대화, 삼미 김진우 정구선 등이 1차 후보로 선정됐다.
이들 중에서 최종 후보 3명을 추렸는데 삼성 장효조와 김시진, OB 박종훈으로 결선투표가 진행됐다.
삼성 장효조는 ‘안타제조기’라는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에 걸맞게 타율 0.369을 기록하며 여유 있게 타격왕에 올랐다. 아울러 18홈런(3위) 62타점(3위) 61득점(2위) 22도루(4위)에다 장타율 0.618(1위), 출루율 0.475(1위) 등 타격 모든 부문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냈다.
또 다른 삼성 선수인 김시진은 팀당 100경기를 소화한 그해 무려 229.1이닝(3위)을 던져 17승(3위) 11패 1세이브, 154탈삼진(3위), 평균자책점 2.55(7위) 등으로 역시 눈에 띄는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나 기자단 투표 결과 초대 신인왕은 박종훈으로 결정됐다.
『최우수 신인상은 87점을 얻은 OB 베어스 중견수 박종훈이 선정됐다. 신인상 결선 후보로는 박 외에 타격왕 장효조(46점), 17승을 올린 김시진(44점) 등이 올랐으나 신인으로서 참신한 이미지와 좋은 매너로 호감을 산 박종훈이 1위 7표, 2위 3표, 3위 1표를 얻어 큰 점수차로 리드했다.』 <1983년 10월 18일자 경향신문>
사실 성적만 놓고 보면 장효조가 신인왕을 받는 것이 당연했지만 당시 기자단은 “장효조는 신인답지 않은 신인이다”, “참신성이 떨어진다”, “장효조는 신인이라기보다는 MVP 경쟁을 해야 하는 선수다”라는 이유 등을 붙이며 박종훈을 선택했다.
장효조는 이미 실업야구 시절부터 한국 최고의 타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장효조가 치지 않는 공은 볼이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탁월한 선구안을 바탕으로 정교한 타격을 자랑했다. 알루미늄 배트를 쓰던 실업야구에서는 방망이를 짧게 잡고도 장타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생으로 프로에 데뷔한 1983년엔 이미 우리 나이로 28세였다. ‘타격의 대가’로 자리 잡은 장효조였기에 ‘초대 신인왕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던 것이다.
실제로 장효조는 1983년 신인왕뿐만 아니라 MVP 최종 후보에도 올라 경쟁했다. 그러나 MVP 투표에서도 3위에 그쳤다. 팀 동료 이만수가 홈런(27)과 타점(74) 승리타점(13) 3관왕에 오르면서 95점을 획득해 MVP가 됐고, 30승의 괴력을 발휘한 삼미 장명부가 50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장효조는 49점으로 MVP 3위에 그쳤다. 결국 그해 MVP와 신인왕을 모두 놓쳐 빈손이 되고 말았다.
박종훈도 그래서 이천 합숙훈련 도중 구경백 매니저에게 신인왕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도 자신의 귀를 의심했던 것이었다. 그도 타격 4위에 KBO 최다안타 신기록을 쓰며 1위를 차지했다. 성적만 놓고 보면 신인왕으로 충분했지만 장효조와 경쟁 관계라면 성적 면에서는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장효조 선배의 성적이 워낙 좋아 신인왕은 정말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투표인단이 장효조 선배는 이미 신인이라기보다는 최고의 선수였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보여준 모습이 제가 더 신선했다고 하더라고요. 신인 이미지에 더 잘 어울린다면서요. 장효조 선배에게는 죄송했죠. 어쨌든 최초의 신인왕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저로선 감사한 일이었죠. 돌이켜보면 저는 특출 난 부분이 없었고 좋은 야구선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운이 좋았어요. 원년 우승 팀인 OB에 입단했던 것만 해도 프라이드가 있었는데, 외야에 윤동균 김우열 김유동 이홍범 선배 등 쟁쟁한 베테랑들 사이에서 주전으로 뛸 기회가 주어진 것도 행운이었고, 신인왕에 오른 것도 행운이었죠”
그는 1983년 신인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추억에 잠겼다.
박종훈은 초대 신인왕 출신답게 1984년 0.306(6위), 1985년 0.342(2위)로 3년 연속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OB 베어스 간판타자로 성장해 나갔다.
특히 1985년 시즌 중반까지는 4할대 고공 타율로 타격 1위를 질주할 기록할 정도로 기량을 무르익었다. 그러나 불운이 닥쳤다. MBC전에서 오영일의 투구에 허리를 맞고 말았다. 그때부터 심각한 허리 통증에 시달리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85년에는 중반까지 벌어놓은 타율 덕에 3할대 타율(0.342)로 마감했지만, 허리 부상은 결국 고질이 되고 말았다. 허리 통증이 계속 악화되면서 1989년을 끝으로 프로 데뷔 7년 만에 은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박종훈에겐 1983년과 1985년 골든글러브 수상이 마지막 훈장이었다. 그는 은퇴 후 프로 입단으로 미뤄뒀던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났다.
●신인왕도 화수분…7명 배출 신인왕의 산실
OB는 초대 신인왕 박종훈을 필두로 신인왕과 유난히 많은 인연을 맺었다. 1984년 두 번째 신인왕도 KBO리그 전문 마무리투수의 영역을 개척한 좌완투수 윤석환이 차지했다. OB 시절엔 더 이상 신인왕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두산 시절로 넘어간 1999년에 포수 홍성흔, 2007년에 투수 임태훈, 2009년에 투수 이용찬, 2010년에 포수 양의지, 2022년 정철원이 신인왕 계보를 이었다.
베어스는 지금까지 총 7명의 신인왕을 내놓아 가장 많은 신인왕을 배출한 구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신인왕의 산실’로 불리고 있다. 윤석환을 비롯해 역사적 인물들은 추후 다시 조명을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