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야야, 큰절 한번 해라. 큰절 한번 해!”
옆에 있던 김시진(삼성·동군 투수)이 큰 소리를 쳤다. 그러자 당시 막내급이었던 신경식(OB·동군 1루수)은 큰 키를 숙여 관중석을 향해 얼떨결에 큰절을 했다.
차가 귀하던 시절, 눈앞에 중형 승용차가 나타났다. 그는 또다시 얼떨결에 사진기자들이 시키는 대로 승용차 보닛 위에 걸터앉아 양팔을 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쇄도하는 인터뷰를 소화해야 했다.
은행원으로 살아갈 뻔했던 22살 키 큰 ‘학다리’는 프로에 들어와 평생 따라다니게 되는 가장 큰 훈장을 받았다. 바로 1983년 ‘미스터 올스타’라는 타이틀이었다.
[베팬알백] 15번째 주제는 베어스 구단 역사상 최초로 올스타전 MVP 주인공이 된 신경식 이야기다. 1983년 열린 ‘한여름밤의 클래식’에서 최고의 인기스타이자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 그는 초창기 OB 베어스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또 한 명의 인물이었다. 베어스가 배출한 20세기 유일한 ‘미스터 올스타’이기도 했다.
●올스타 최다득표, 최고 스타로 떠오른 ‘학다리’
『83년 올스타전도 첫해와 마찬가지로 팬들의 인기투표로 동군(롯데, 삼성, OB) 서군(해태, 삼미, MBC)의 베스트 10이 뽑혔다. 팬 투표 최다득표 선수는 OB의 신경식으로 총 투표 8만 3121명 중 89.9%인 7만 4692명의 추천을 받았다. 신경식은 예정된 3차전이 비로 인해 2차전으로 줄어들었지만 1차전에서 솔로홈런 등 4타수 3안타의 맹타를 휘두른 덕에 기자단 및 KBO투표단의 투표에 의해 올스타전 MVP로 뽑혀 팬들의 인기투표에 보답했다. 신경식은 부상으로 800만 원짜리 중형차를 받았다.』 <한국프로야구연감 1984년판>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도, 숫자만 보고도 과거의 활약상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야구의 매력이다. 그러나 숫자로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다.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 아련한 추억. ‘학다리’ 신경식은 올드팬들에게는 기록 그 이상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학창 시절 초고교급 선수도 아니었고, 국가대표 출신도 아니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공주고로 가서 상업은행에 입단했다가 3년 만에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OB 유니폼을 입은 원년 멤버. 구천서와 구재서 쌍둥이 형제를 제외하고는 막내였던 신경식을 두고 OB 구단도 원년엔 “몇 년 후쯤 팀 주축 전력으로 성장해 주면 고마운 유망주” 정도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식은 첫해부터 깜짝 놀랄 만한 활약을 펼쳤다. 원년 스프링캠프에서 수비로 김영덕 감독의 눈길을 사로잡더니, 방망이로도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주전 1루수 자리를 꿰찬 뒤 시즌 0.334의 타율로 내로라하는 KBO 스타들을 제치고 원년 타격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OB가 초대 챔피언에 오른 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에이스 박철순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지만, 예상치 못한 신경식의 맹활약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베팬알백] 편>에서 신경식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는 키 188㎝의 장신 선수였다. 롯데 김용희(190㎝)에 이어 KBO리그 원년 6개 구단 선수를 통틀어 두 번째로 키가 컸다.
여기에 롱다리를 활용한 ‘다리찢기 수비’는 전매특허였다. 발레리나처럼 양 다리를 한껏 찢은 뒤 남들보다 한두 발은 먼저 송구를 마중 나갔다. 내야수들이 어렵게 타구를 잡아 상하좌우로 대충 던져도 큰 키와 긴 팔을 활용해 척척 처리를 해준 만능 1루수. 야수들은 “학다리가 1루에 서 있으면 수비하기가 그렇게 수월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 시절 동네야구를 하던 꼬마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신경식의 다리찢기를 흉내 낼 정도였다. 특히 1루수라면 으레 신경식처럼 가랑이를 한껏 찢을 수 있어야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 줄만 알았다.
“쟁쟁한 선배들이 많았는데 올스타전 최다득표는 생각지도 못했죠. 당시 학생들한테 표가 많이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다리찢기 수비로 인기를 끌었던 것 같아요. 요즘엔 최다득표 선수가 그런 인터뷰를 하는 것 같진 않던데, 당시엔 최다득표 선수라고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경식은 자신의 뿌리인 OB 시절 1983년 올스타전을 잊지 못했다.
훤칠한 키에 공격과 수비까지 만능이었던 신경식은 기록에 나타난 숫자 그 이상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가 1983년 올스타 팬투표에서 최다득표에 오른 것은 그 시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1983년 추억의 올스타전 역사를 찾아서
올스타전은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전국을 돌며 3차전으로 치러졌다. 1983년에도 3경기가 예정돼 있었지만 인천에서 열릴 예정이던 2차전이 비로 취소됐다. 이는 역대 올스타전 중 우천취소된 유일한 경기로 남아 있다.
1983년 올스타전은 2차전도 2차전이지만, 잠실에서 열릴 예정이던 3차전도 하마터면 우천으로 취소될 뻔했다. 비로 하루가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에 성사돼 그해 2경기를 소화할 수 있었다.
당시 규정상 팬투표 베스트10에 선정된 선수는 반드시 1차전에 선발출장을 해야만 했다. 신경식이 동군 1루수로 대구구장에서 열린 1차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3년 올스타전 1차전(6월 30일 대구) 라인업에 포함되는 팬투표 베스트10은 다음과 같았다.
<동군>
투수 김시진(삼성), 포수 이만수(삼성), 1루수 신경식(OB), 2루수 정학수(롯데), 3루수 김용희(롯데), 유격수 오대석(삼성), 외야수 윤동균(OB) 박용성(롯데) 장효조(삼성), 지명타자 김우열(OB)
<서군>
투수 장명부(삼미), 포수 김진우(삼미), 1루수 김성한(해태), 2루수 김인식(MBC), 3루수 이광은(MBC), 유격수 김재박(MBC), 외야수 김일권(해태) 김종모(해태) 이해창(MBC), 지명타자 김봉연(해태)
그해 올스타전 출전선수는 추천선수를 포함해 팀당 22명씩이었고, 올스타전 출전 수당은 당시 웬만한 회사원 월급보다 많은 30만원이나 됐다.
그런데 올스타전을 앞두고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올스타전 1차전을 이틀 앞둔 6월 28일, 원년 홈런왕인 해태 김봉연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올스타 브레이크를 맞아 해태 동료들과 여수로 가족동반 야유회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는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 머리와 얼굴 부위까지 총 314바늘을 꿰매는 중상으로 당연히 올스타전에 참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MBC 이종도가 대신 서군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됐다.
여기에 서군 베스트10 투수로 뽑힌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삼미)가 어깨 부상을 이유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알려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명부는 1983년 삼미에 입단하자마자 능구렁이 같은 투구로 ‘너구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해 30승을 거두며 누구도 깨지 못할 역대 한 시즌 최다승의 전설을 썼다. 전기리그에서만 무려 17승을 올렸다. 전반기만 놓고 보면 1982년 OB 박철순이 작성한 18승이 지금까지도 깨지 않는 역대 최고 기록인데, 장명부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승수를 쌓았다(1983년 해태 이상윤, 1985년 삼성 김일융에 이어 2019년 두산 조쉬 린드블럼이 15승을 기록해 역대 전반기 최다승 공동 3위를 형성하고 있다).
KBO 측에서 장명부에게 “베스트10은 규정상 무조건 1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해야만 한다”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자 장명부는 일단 KBO의 요청을 받아들여 1차전에 선발로 나가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장명부의 올스타전 불참 소식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너구리는 너구리였다.
●신경식, 1차전과 3차전 불방망이…베어스 최초 올스타전 MVP!
6월 30일 대구구장에서 1차전이 열렸다. 동군 선발투수는 김시진의 투구로 1983년 올스타전이 시작됐다.
서군 타자들은 1회초 시작하자마자 김시진을 몰아붙여 선취점을 뽑았다. 1사후 ‘대도’ 김일권이 볼넷을 고른 뒤 2사후 4번타자 이종도 타석 때 2루 도루에 성공해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진출했다. 여기서 김봉연 대신 올스타전에 출전한 이종도가 중전 적시타를 때리면서 서군이 1-0 리드를 잡았다.
1회말 동군 공격. 약속대로 서군 선발투수로 나선 장명부는 1번타자 박용성을 3구 만에 가볍게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그런데 장명부가 갑자기 마운드를 떠나는 게 아닌가. 어깨 통증을 이유로 자진강판한 것. 베스트10 자격으로 선발투수로 등판해 한 타자를 잡았으니 규정상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관계자들이나 팬들로선 예고에 없던 ‘너구리’의 조기강판에 모두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군은 또 다른 재일교포 투수인 해태 사이드암 주동식을 부랴부랴 마운드에 올려 이닝을 마무리했다.
2회초 서군의 공격이 무득점으로 끝나고, 2회말 동군 공격이 펼쳐졌다.
1사후 6번타자 1루수로 선발출장한 신경식이 좌타석에 들어섰다. ‘잠수함 투수에게는 좌타자가 유리하다’는 속설을 입증하듯, ‘학다리’ 신경식은 주동식을 상대로 우월 솔로홈런을 뽑아냈다. 1-1 동점.
이 홈런은 신경식을 그해 미스터 올스타로 밀어준 결정적 한 방이 됐다.
“지금도 올스타전 때 홈런을 치면 가장 강력한 MVP 후보로 떠오르잖아요. 제가 홈런을 못 치던 사람인데, 1차전 2회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치니까 솔직히 살짝 기대가 되긴 하더라고요.”
신경식은 1982년 4홈런, 1983년 5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대형 슬러거는 아니었다. 정교함을 바탕으로 하는 기교파 중거리 타자였다. 그런데 올스타전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으니 기분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1-1로 진행되던 4회말 1사 1루. 신경식은 2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나 3루수 직선타. 게다가 2루주자까지 한꺼번에 아웃되는 불운을 맛봤다.
5회까지 점수가 좀처럼 나지 않고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됐다.
결국 6회초 금이 갔다. 서군이 결승점을 뽑으면서 승부가 갈린 것. 선두타자 이종도가 중월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5번타자 김성한의 중전 적시타가 이어지면서 서군이 앞서나갔다. 서군은 이 점수를 끝까지 지켜 2-1로 승리하게 됐다. 김성한은 3타석에서 2타수 2안타에 결승타까지 치면서 1차전 MVP에 올라 100만원 상당의 스쿠터를 부상으로 받았다.
동군이 패하면서 신경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7회말 우전안타, 9회말 2사 1루서 좌익선상 2루타를 치며 맹활약했다. 1차전에서만 솔로홈런을 포함해 4타수 3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했다. 일단 2차전과 3차전 결과에 따라 MVP를 꿈꿀 수 있는 종잣돈을 마련했다.
인천에서 열릴 예정이던 2차전이 우천취소됐다. 그리고 3차전이 열리는 서울로 이동했지만 역시 비가 멈추지 않았다. 경기가 하루 연기된 가운데 7월 4일 잠실구장에서 우여곡절 끝에 3차전이 시작됐다.
동군은 롯데 잠수함 투수 노상수, 서군은 1차전에서 어깨 통증을 이유로 자진강판했던 장명부가 선발투수로 나섰다.
이번에도 선취점은 서군의 몫이었다. 2회초 1사후 김종모가 좌중간 담장을 넘기는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그러자 동군은 2회말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장명부를 상대로 1사후 이만수가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정학수의 볼넷, 오대석의 유격수 쪽 내야안타로 만루가 됐다. 여기서 박용성의 밀어내기 볼넷으로 1-1 동점에 성공했다.
장명부는 2회에 실점을 했지만 이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1차전 자진강판에 대한 따가운 여론에 눈치가 보였는지 이날은 3회까지 던지면서 1실점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다시 팽팽한 접전. 승부의 추는 5회에 동군으로 쏠렸다. 투수가 임호균(삼미)으로 바뀐 가운데 선두타자 윤동균(OB)이 중전안타로 포문을 열었다. 1사후 대타로 신인 한대화(OB)가 나서서 좌전안타를 쳤다.
1사 1,3루 찬스. 이때 타석에 등장한 신경식은 초구를 가볍게 쳐서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연결하면서 3루주자를 불러들였다. 2-1 역전. 이 점수가 결국 결승점이 됐고, 신경식은 3차전 결승타의 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동군은 7회 1점, 8회 2점을 추가하면서 5-1로 승리해 1승1패로 1983년 올스타전을 마무리했다. OB 황태환이 3차전 2번째 투수로 나서 2.2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대망의 올스타전 MVP 후보는 신경식과 김성한 2명으로 압축했다. 동군 1루수 신경식은 1차전 4타수 3안타 1타점을 기록하더니 3차전에서는 결승타를 때렸다. 합쳐서 7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 반면 서군 1루수인 해태 김성한은 1차전 2타수 2안타 1볼넷, 3차전 2타수 무안타 2사사구를 기록했다. 합쳐서 5타수 2안타 3사사구의 성적을 올렸다.
결국 기자단 투표 결과 신경식이 7-3으로 이겼다. 올스타전 팬투표에서 ‘최다득표’의 영광을 안은 데 이어 기자단 투표에서 ‘미스터 올스타’까지 거머쥐었다.
“1차전 대구에서 홈런 치고 안타를 2개 더 쳤는데, 2차전에서 승리타점(요즘의 결승타)도 올려서 내심 MVP를 기대하긴 했죠. 김성한 선배랑 후보에 올라 투표를 했는데 제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MVP로 호명돼 팬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가는데 김시진 선배가 갑자기 ‘야야, 큰절 한번 해라! 큰절 한번 해!’라고 두 번 외쳐서 얼떨결에 1루 쪽에 서 있다가 관중석에 큰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하.”
신경식은 다시 즐거웠던 추억을 돌이키며 말을 이어갔다.
“당시 처음으로 나이키에서 올스타전 스폰서를 해서 상품이 푸짐했어요. 대우자동차 로열 프린스 승용차를 받았으니까요. 그때 저는 차가 없었지만 운전면허증도 없었어요. 또 당시엔 차가 귀했고 젊은 선수가 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도 아니었잖아요. 결국 박용민 단장님이 그 차를 쓰시기로 하고, 단장님이 대신 찻값을 저한테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올스타전 끝나고 그날 저녁에 동군 팀 선수 전부 회식을 했어요. 계산요? 제가 한 턱을 냈죠. 프로에서 이렇다 할 타이틀도 없었는데 어쩌면 1983년 미스터 올스타가 제게는 가장 큰 훈장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올드팬들 중에 아직도 그걸 기억하는 팬들도 계시더라고요.”
원년 우승팀 OB는 1983년 전기리그 최하위로 떨어져 웃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신경식이 자존심을 살렸다.
그런데 그 이후 OB 베어스 선수들은 유난히 올스타전 MVP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신경식은 OB 베어스 선수로는 유일한 미스터 올스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두산 베어스로 이름이 바뀌고 21세기 들어서는 미스터 올스타를 자주 배출했다. 2001년 외국인타자 타이론 우즈가 그해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 MVP를 모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구단 역사상 2호 ‘미스터 올스타’가 됐다. 2006년에는 홍성흔, 2016년에는 민병헌이 베어스 역사상 3번째와 4번째 ‘미스터 올스타’ 역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