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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0. 2023

[16] 김영덕에서 김성근으로…감독교체 소용돌이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OB 베어스는 1983시즌 홍역을 치러야 했다. 1982년 원년 우승팀에서 1983년 전기리그 최하위(6위)로 내려앉았고, 후기리그에서 가까스로 탈꼴찌에 성공했지만 6개 팀 중 5위에 그쳤다. 시즌 후에 후폭풍이 몰아쳤다. 초대 사령탑 김영덕 감독이 물러나고 제2대 사령탑으로 김성근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베팬알백] 16번째 주제는 제1기 ‘김영덕 시대’에서 제2기 ‘김성근 시대’로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이야기다.


OB베어스 원년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된 김성근 ⓒ두산베어스

●원년 우승 후 이듬해 최하위…1983년의 악몽


 원년 박철순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OB는 1983년 허리 부상으로 이탈한 에이스의 부재를 실감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4월 9일과 10일 대구에서 삼성에 패하더니, 하루 쉬고 12일과 13일 대전에서 삼미에도 연패를 당해 4연패에 빠졌다. 특히 삼미는 원년에 16전 전승을 거둔 상대. 만나기만 하면 이겨온 삼미에 당한 연패의 충격파는 컸다.


 삼미전 16연승의 역사가 마감된 것은 4월 12일이었다. 상대 선발투수는 그해 30승의 괴력을 발휘한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 장명부는 이날 연장 13회까지 완투했다. OB는 13회초 대거 6점을 내주면서 5-11로 져 삼미전 첫 패를 기록하고 말았다(OB는 1983년 전기리그에서 삼미에 4승6패로 열세에 놓였고, 후기리그에서도 4승6패로 밀렸다. 시즌 전체로 봐도 8승12패로 뒤졌다).


 OB는 6월 5~15일 사이 6연패를 당하며 최하위로 떨어졌고, 롯데와 전기리그 최종전에서는 박상열이 9회까지 1안타로 호투를 했지만 0-1으로 지는 바람에 결국 전기리그 22승28패로 롯데(22승27패1무)와 삼성(21승26패3무)에 0.5게임차 뒤진 꼴찌로 주저앉고 말았다.


 OB는 “전기리그는 잊고 다시 시작해보자”며 후기리그에 앞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당시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우승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시스템이었다. 전기리그 꼴찌를 해도 후기리그 우승만 하면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OB로선 부상으로 이탈한 에이스 박철순이 복귀하는 시점까지 버티다 후기리그 우승할 기회가 오면 승부를 한번 걸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런 꿈과 계획은 시작부터 산산조각이 났다.


 후기리그 개막전인 7월 9일 대전 해태전 3-6 패배를 시작으로 20일 대전 MBC전까지 내리 7연패. 장호연~박상열~김현홍~장호연~박상열~계형철~장호연이 차례로 패전투수의 멍에를 썼다. 1983시즌 개막전에 선발등판해 깜짝 완봉승을 거둔 장호연은 이후 패수를 쌓아나갔다. 7연패 기간에 무려 3차례나 패전투수가 됐다. 루키에게 그 정도로 의존해야 할 정도로 베어스의 마운드 사정은 좋지 않았다(장호연은 그해 6승17패2세이브를 기록했다).


1983년 신인 장호연 ⓒ두산베어스


 박철순이 없는 마운드에서 기둥이 돼 줘야 할 선우대영(시즌 성적 4승6패1세이브)과 1982년 후반기부터 연승을 거듭하다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까지 맡아 우승의 밑거름을 만들었던 잠수함투수 강철원(시즌 성적 4승2패)마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여기에 선수단 내에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OB 구단은 7월 25일 원년 한국시리즈 만루홈런으로 MVP에 오른 김유동에 대해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자체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투수코치가 선수기용을 놓고 수시로 충돌하면서 선수단 전체가 어수선했다. 특정 선수의 배팅볼 투수 투입을 놓고 감정싸움이 격해지면서 김성근 투수코치가 경기 도중에 가방을 싸서 경기장을 나가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OB는 9월 16일 대전 삼성전부터 24일 대전 삼미전까지 5연패에 빠졌다. 사실상 후기리그 꼴찌도 예약하는 분위기였다.


 그나마 원년 우승 팀의 자존심은 마지막에 살아났다.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며 8경기를 남겨둔 9월 25일부터 시즌 최다인 5연승을 달렸다. 10월 2일 롯데에 3-4로 패했지만 다시 삼성을 2연파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마지막 8경기에서 7승1패의 늦바람을 내면서 후기리그 최하위를 모면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5게임차로 롯데를 끌어내리고 5위가 됐다.


 전•후기리그를 합친 1983년 전체 성적은 44승1무55패. 롯데(43승1무56패)를 1게임차로 밀어내고 5위를 차지하면서 가까스로 탈꼴찌에 성공했다. 시즌 막판의 선전으로 최소한의 체면은 세울 수 있었다.


●김영덕 감독 사퇴 후 11일 만에 삼성행

김영덕 감독 ⓒ두산베어스

 원년 우승 팀에서 이듬해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 시즌 말미부터 호사가들 사이에 OB 감독 교체설이 돌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출범 후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원년 창단 감독 6명 중 5명이 이미 지휘봉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김영덕 감독은 그 6명 중 마지막 생존자였지만, OB 역시 감독 교체의 칼을 뽑아들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었다. 


 그러자 OB 구단은 진화에 나섰다. 박용민 단장이 9월 26일 기자들을 모아 놓고 “올 시즌 성적에 관계없이 김영덕 감독, 김성근•이광환 코치 등 현 코칭스태프를 84시즌에도 유임시킨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박 단장은 “팀 성적 부진은 선수들의 부상과 스카우트 부실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항간에 나돈 코칭스태프 경질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일축했다. 이에 따라 9월 27일자 신문에 “OB 코칭스태프 유임 확정"이라는 기사가 일제히 게재됐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전개됐다. 구단에서 유임을 결정한 김영덕 감독이 시즌 후 돌연 자진사퇴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프로야구 창단 감독으로 유일하게 자리를 지켜왔던 베어스의 김영덕(48) 감독이 14일 사임했다. 전기리그 최하위를 마크한 이후 사의를 표명해 왔던 김 감독은 올해의 성적 부진과 슈퍼스타 박철순의 부상 등의 책임을 이유로 감독직을 자퇴했다. 김 감독은 그동안 구단 측으로부터 계속 팀을 맡아 달라는 종용을 받아왔으나 “야구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또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어야 내년 시즌 성적이 나아질 것이다”라면서 사의를 고집해 왔었다. 박용민 구단 전무는 이날 김 감독의 사임을 발표하며 후임 감독으로는 현 코치인 김성근 씨를 승진 기용하기 위해 접촉 중이라고 밝혔다. 사임한 김영덕 감독은 자신의 야구를 정리한 뒤 1년간 일본에서 유학할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 10월 15일자 동아일보>


 당시 경향신문에서도 김영덕 감독의 사임 소식을 전하며 『김 감독은 지난 7월초 “박철순이 완쾌되지 않는다면 나도 의리상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착잡한 심경을 밝힌 바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자진사퇴 의사를 밝힌 지 불과 11일 후에 모두를 놀라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삼성이 김영덕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하기로 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OB 베어스의 전 감독 김영덕 씨가 팀을 떠난 지 11일 만에 삼성 라이온즈의 새 감독으로 들어앉았다. 삼성 라이온즈는 25일 ‘계약금 2천5백만 원, 연봉 2천5백만 원의 조건으로 김 감독과 3년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감독은 지난 14일 팀 성적 부진 등의 이유로 베어스의 감독직을 사퇴했었다.』 <1983년 10월 26일자 동아일보>


 당시 매일경제는 “실제 계약금은 5천만 원이며, 연봉도 3천5백만 원 선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김영덕 감독이 최고 대우를 받고 삼성으로 이적한 것이었다.


 정황상 뭔가 시나리오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KBO리그 전체가 술렁거렸다. 그러자 KBO와 각 구단은 감독 이적에 대한 제재안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1983년 11월 4일 열린 구단주 회의에서는 구체적 안이 논의되기까지 했다.


 11월 4일자 동아일보는 『감독 문제에 대한 제재 움직임은 최근 OB에서 사의한 뒤 불과 10여 일 만에 삼성의 유니폼을 입은 김영덕 감독의 케이스 때문에 더 구체화되고 있다. 구단이 서로 유능한 감독을 끌어오기 위해 유리한 조건을 미끼로 과열경쟁을 하지 말자는 것과 감독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교묘하게 이적하는 행위 등이 규제돼야 한다는 얘기다』라고 보도했다.


 KBO 실행위원회는 3년 계약을 한 감독이나 코치가 계약기간 안에 자의로 사임하거나 해임됐을 경우 계약 잔여기간에다 1년을 추가한 기간 동안에는 다른 어떤 구단도 기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이 안이 실질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원년 우승 감독인 김영덕 감독의 삼성행은 야구계 전체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1984~1988년 5년 장기계약…OB 2대 감독 김성근 시대로

OB베어스 원년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코치 ⓒ두산베어스

 이 일로 인해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코치는 그렇잖아도 불편했던 사이가 극도로 틀어지고 말았다.


 사실 그에 앞서 시즌 도중부터 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삼성 초대 사령탑 서영무 감독이 5월에 퇴진하고 재일교포 이충남 코치가 삼성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었으나 성적 부진에 시달렸다. 그 무렵 삼성 측에서 당시 OB 김성근 코치에게 접근을 했다.


 김성근 전 감독의 회상은 다음과 같다.


 당시 삼성 측에서 5년 계약을 제안하자 김 코치는 “투수코치라면 유백만에게 맡겨보라”고 조언한 뒤 김영덕 감독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코치 계약이 아니라 감독 계약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는 것. 시즌 후 김영덕 감독이 OB 감독 자리에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뒤 곧바로 삼성 감독으로 가자 김성근 코치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선배에 대한 더욱 큰 불신이 더 커졌다. 김영덕 감독을 찾아가 따지고 묻자 “나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잖아도 껄끄러웠던 둘 사이에 완전히 금이 간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김영덕 전 감독의 말은 또 다르다. 당시 상황에 대해 묻자 펄쩍 뛰며 “그럼 내가 삼성 감독 자리를 가로챘다는 말이냐”며 “삼성에서 김성근한테 관심이 있었으면 곧바로 감독 제안을 하고 영입을 했겠지, 왜 나한테 제안을 했겠느냐.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김영덕 감독이 OB 사령탑에서 사퇴를 하고 삼성 감독으로 이적하면서 김성근 코치가 OB 감독이 될 기회를 잡았다. OB는 김성근 코치에게 제2대 감독 자리를 맡기면서 계약기간 5년(1984~1988년)이라는 파격적 조건을 내걸면서 사기를 진작시켰다.


 박용민 전 단장은 이에 대해 오래된 기억이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김영덕 감독, 김성근 코치, 이광환 코치가 있었는데 김영덕 감독 다음에는 김성근 코치가 연장자이기도 하거니와 팀을 수습하는 데는 적임자라고 생각했어요. 김영덕 감독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외부 감독 영입보다는 자연스럽게 선수들을 가장 잘 아는 김성근 감독을 선택해 빨리 팀을 안정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죠. 김성근 감독이 그럴 만한 능력도 있다고 봤고.”


OB베어스 박용민 단장(앞)과 김성근 감독(뒤에서 왼쪽). 오른쪽은 구경백 매니저. ⓒ두산베어스


 김성근 감독은 이렇게 OB 베어스의 제2대 사령탑에 올랐다. 그러나 주변 평가는 냉소적이었다. OB 베어스를 향해 “누가 감독이건 꼴찌 아니면 다행”이라는 평이 주를 이뤘다. 박철순의 재기가 없는 한 현 전력으로 팀을 재건하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베어스의 새로운 지휘봉을 잡자마자 대전 연고지 마지막해인 1984년 초반부터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베팬알백_17]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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