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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4. 2023

[24] 최동원과 세상을 울린 김형석의 운명의 한 방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오늘날 '두산'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미러클(기적)'이지만, 그 원조를 찾는다면 어쩌면 1986년 정규시즌 최종일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베팬알백] 24번째 주제는 최동원과 세상을 울린 '미스터 OB' 김형석의 홈런에 얽힌 추억이다. 


 앞서 [베팬알백] <23편>에서 1986년 후기리그에서 OB와 롯데의 시즌 최종전이 얼마만큼 중요했는지 시대적, 상황적 배경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운명의 그 마지막 경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1986년 후기리그 최종전을 소개한 1987년 팬북 ⓒ두산베어스



●아최동원이 거기서  나와?


 최종전을 앞두고 부담감이 큰 쪽은 오히려 MBC에 1게임차로 앞서 있는 OB였다. 쫓기는 처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최종전 상대인 롯데의 선발투수가 당대 최고 투수 최동원이었기 때문이다.


 OB로선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롯데는 전기리그에서 30승4무20패로 잘 싸웠지만 3위에 그치는 바람에 2위까지 주어지는 플레이오프 진출 티켓을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후기리그 최종전에 이긴다고 해도 포스트시즌에 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미 가을야구 탈락이 결정됐고, 이날 경기 전까지 20승2무31패를 기록해 후기리그 순위도 5위로 확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웬 최동원?


 더군다나 다음날인 9월 18일은 추석이었다. 17일과 19일이 추석 연휴로 묶여 있어 롯데는 17일 낮경기가 끝나면 구단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추석 전날이라 귀성 차량과 엉켜 지옥 같은 교통 체증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데는 왜 굳이 최동원을 서울까지 데리고 와서 선발등판시키려고 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바로 최동원의 3년 연속 정규시즌 20승 달성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3년 연속 20승은 그 이전에 누구도 해내지 못한 기록.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없는 대기록이다. 해태 선동열도 전성기 시절 3년 연속 20승은 이루지 못했다.


 최동원은 입단 이듬해인 1984년 정규시즌에서만 27승(13패 6세이브)을 올린 뒤 1985년 20승(9패 8세이브)을 기록했다. 그리고 1986년 최종전에 앞서 19승(13패 2세이브)을 기록 중이었다. 마지막 경기에 등판해 OB를 꺾고 승리투수가 된다면 3년 연속 20승을 달성하는 상황이었다.


인터뷰하고 있는 김성근 감독 ⓒ두산베어스


 “최종전을 앞두고 잠실야구장 백스톱 쪽에서 김성근 감독님이 선수들에게 토스배팅 공을 올려주고 있었어요. 원정팀 롯데 강병철 감독님이 잠실구장에 도착하자마자 김성근 감독님을 찾아오시더라고요. 아무래도 홈도 아닌 원정경기에, 그것도 추석 연휴인데 굳이 최동원까지 데려와 선발로 내보내는 게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강 감독님이 김성근 감독님한테 ‘형님, 최동원 20승 때문에 이렇게 됐습니다. 고춧가루 뿌리려는 게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라며 이해를 구하기까지 했어요. 김 감독님도 ‘어쩔 수 없지’라며 웃어넘기더라고요. 제가 감독님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그때 두 감독님의 대화가 생생합니다.”


 당시 OB 매니저였던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마치 수첩을 뒤지듯 그날의 기억들을 그대로 떠올렸다.


 “그런데 최동원은 그렇다 쳐도, 롯데는 야수들도 최정예 멤버가 서울로 올라왔더라고요. 후보 선수 위주로 엔트리를 구성해도 됐지만 최동원 20승을 지원해 주기 위해 주전들이 총출동한 것이었죠.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솔직히 당시엔 OB로선 갑갑한 정도가 아니었죠. 최동원도 그렇고 롯데도 얼마나 이를 악물고 싸울지 훤히 그려졌습니다. 최동원이 아예 그 이전에 20승을 달성했더라면 차라리 이런 상황 자체도 안 만들어졌을 텐데, 속으로 ‘왜 진작 20승을 하지 않고 최종전까지 왔나’ 싶어 솔직히 그런 상황 자체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최동원은 1회부터 9회까지 구위가 떨어지지 않는 투수였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공이 더 좋더라고요. 금테안경을 치켜올려 쓰며 이를 악물고 던지는 모습까지 얄밉더라고요."


 롯데가 19승의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웠다면, OB 역시 19승(4패 2세이브) 투수 최일언 카드를 꺼내 맞불을 놓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결국 이날 최동원도, 최일언도 20승을 놓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최일언 ⓒ두산베어스


●최동원을 울리고세상을 울린, '운명의 한 방'


 어쨌든 OB는 무조건 최동원을 꺾고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기는 OB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1회 초 시작하자마자 최일언이 2 실점을 하고 말았다.


 1 사후 조성옥의 2루타가 나왔다. 이어 김민호의 유격수 땅볼로 1사 2루. 여기서 김용철의 중전 적시타로 선취점을 빼앗겼다. 그리고 김용희의 중전안타로 만들어진 2사 1·2루에서 유두열에게 우전 적시타를 맞았다.


 OB는 1회 말 선두타자 박종훈의 볼넷과 김광수의 희생번트, 포수 한문연의 패스트볼로 1사 3루가 된 상황에서 김형석의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1-2로 추격했다.


 양 팀 선발투수들은 이후부터는 경쟁이라도 하듯 안정을 찾았다. 2회부터 7회까지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면서 1점 차 승부를 예고했다.


 그러던 8회 초, 균열이 생겼다. 1사 후 김용철의 2루타와 김용희의 볼넷, 다시 유두열의 좌전 적시타가 터졌다. 1-3으로 뒤지게 된 OB 벤치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투수는 박노준으로 교체됐고, 8회 1사까지 3점을 주고 강판당한 최일언도 패전의 위기에 빠졌다. 만약 패한다면 19승 5패로 승률은 0.792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20승도 달성하지 못한 데에다 승률왕마저 해태 선동열(24승 6패, 승률 0.800)에게 넘겨줄 판이었다.


 최동원은 이날이 그해 39번째 등판이었다. 이 경기 전까지 무려 16차례나 완투를 펼친 철완은 여전히 압도적 구위를 자랑했다. 8회까지 4안타만 허용한 채 힘 있는 투구를 이어나갔다. 이 기세라면 9회에 접어든다고 해도 지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 멀리 전주에서 결과가 먼저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MBC가 김건우(선발 6이닝)와 김용수(마무리 3이닝)를 투입해 해태를 9-4로 꺾었다. 이때가 오후 4시33분이었다.


 이제 잠실경기 결과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게 됐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경기를 먼저 끝낸 MBC는 시외전화를 통해 잠실 상황을 전해 들었다. 최동원이 계속 던지고 있는 가운데 롯데가 8회초 1득점으로 3-1로 앞서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동원에 2점차라면….”


 MBC는 전주 원정 때 숙소로 사용하는 코아호텔로 이동했다. 1983년 한국시리즈 이후 3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자축의 샴페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포수)의 명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운명의 9회말. OB 선두타자 김광수가 최동원을 상대로 5번째 안타를 뽑아냈다. 절망의 동굴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살려냈다.


 타석에는 1회말 희생플라이를 때리고, 6회에도 2루수 쪽 내야안타를 기록한 입단 2년생 좌타자 김형석이 들어섰다.

김형석 ⓒ두산베어스

 김형석이라면 그해 4월 22일에도 최동원을 상대로 8회말 역전 결승 2점홈런을 날린 기억이 있다. 그러나 최동원은 굴하지 않았다. 초구와 2구를 거침없이 스트라이크존에 꽂아 넣었다. 평소 스타일대로 ‘칠 테면 쳐봐라’는 식이었다.


 3구째는 유인구가 날아들지 않을까. 그러나 돌아가는 법이 없는 최동원이었다. 내친김에 강속구를 몸쪽으로 찔러 넣었다. 삼진으로 경기를 끝내고 20승을 확정하겠다는 태세였다.


 여기서 김형석의 배트가 전광석화처럼 돌았다. 방망이에 공이 맞는 순간 불꽃이 튀는 듯했다. 하얀 공은 잠실의 푸른 하늘을 미사일처럼 비행하더니 오른쪽 외야 담장 너머에 꽂혔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3-3 동점. 플레이오프 탈락 일보 직전에서 거짓말 같은 동점 홈런을 때려낸 김형석은 무아지경 속에 그라운드를 돌았고, OB 선수들은 모두 덕아웃 밖으로 박차로 나왔다. 선수단은 일렬로 도열한 채 '개선장군'처럼 돌아온 김형석을 맞이했다. 얼마나 기뻤으면 어지간해선 선수들의 홈런에 미동도 하지 않는 김성근 감독조차 그라운드까지 달려 나와 김형석을 얼싸안고 기뻐했을까.


 OB의 기쁨 크기만큼 최동원의 허탈감도 반비례로 커졌다. 롯데와 최동원 측에서는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 타자는 신경식. 기운이 빠진 최동원이 던진 초구는 볼이었다. 그리고 2구째가 날아들었다. 신경식은 기다렸다는 듯이 후려쳤고, 타구는 좌중간을 갈랐다. 중견수 홍문종이 천천히 공을 주우러 가는 사이 신경식은 2루를 거쳐 3루까지 내달렸다.


 여기서 일이 터졌다. 커트맨으로 중계 플레이에 나선 유격수 정영기가 홍문종의 송구를 받아 3루에 던졌는데, 3루수 김용철의 글러브 밑으로 공이 빠져 파울 지역까지 흘러갔다. 이때 투수는 3루 뒤쪽으로 베이스 커버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최동원은 허탈감이 밀려와서인지 그라운드에 우두커니 선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신경식은 3루를 돌아 내친김에 홈까지 내달렸고, 4-3으로 승부를 마감하는 끝내기 득점을 올렸다. KBO 공식기록은 3루타와 상대 실책으로 기록됐다.


이날 경기 후 인터뷰 중인 신경식 ⓒ두산베어스


 1986년 6차례나 4연승을 거두면서도 한 번도 5연승을 올리지 못하던 OB가 시즌 처음으로 5연승을 기록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때가 오후 4시51분. OB는 33승2무19패로 해태와 후기리그 공동 1위를 확보하면서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내게 됐고, 소식을 전해 들은 MBC는 조용히 샴페인을 치우며 허탈한 마음으로 상경해야 했다.


 그해 아시안게임이 사상 처음으로 한국(서울)에서 개최되면서 포스트시즌은 그 이후로 일정이 밀렸다. 포스트시즌에 들어가기에 앞서 10월 6일과 7일에 3전2선승제의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도 기다리고 있었다.


 사상 최초로 펼쳐진 우승 결정전. 여기서 OB는 2연승을 거두고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6년 사상 최초 우승 결정전과 플레이오프 이야기는 다음 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OB베어스 선수단 ⓒ두산베어스


 추억의 김형석과 김형석의 추억


 김형석.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OB 베어스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팬들은 그를 두고 '미스터 OB'라 불렀다.


 185cm의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요즘엔 야구선수로서 평균적인 키라고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신경식(188cm)을 제외하면 그만큼 큰 선수는 없었다. 신일고와 중앙대 출신으로 대학 4학년 시절이던 1984년 LA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주포지션은 1루수. 1985년 입단 당시 OB에는 신경식이라는 큰 산이 주전 1루수로 버티고 있었다. 김성근 감독은 신일고 감독 시절 제자였던 김형석의 타격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설 자리가 마땅치 않자 결국 외야수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공 한 박스 분량을 펑고 치면서 김형석의 외야 수비 실력을 향상시켰다.


 OB는 박철순(1982년 입단)~박종훈(1983년 입단)~김진욱(1984년 입단) 등으로 미남 스타 계보가 이어졌는데, 김형석이 1985년 입단하면서 미남 군단에 또 한 명의 ‘얼짱’이 추가됐다.


 큰 코에 이국적인 얼굴. 스윙도 외모만큼이나 시원시원했다. 해마다 두 자릿수 홈런 안팎을 기록할 수 있는 중장거리형 타자로 사랑을 받았다. 당시는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리는 타자를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OB가 암흑기에 빠져 있을 때 베어스 팬들은 그의 호쾌한 스윙에 시름을 잊곤 했다. 1985년 OB에 입단해 1998년 삼성으로 이적해 은퇴할 때까지 통산 14년간 119홈런을 때려냈다. 1993년에는 최다안타 타이틀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날 경기 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김형석 ⓒ두산베어스


 귀공자 같은 외모의 소유자지만, 내면은 악바리였다. MBC의 원년 멤버 '베트콩' 김인식이 작성한 연속경기 출장 기록(606경기)을 넘어 622연속경기출장 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1994년 선수단 집단이탈 사건 후폭풍으로 기록이 중단된 점이 아쉬웠다. 이 기록은 훗날 최태원(쌍방울~SK)이 1009연속경기 출장을 기록하면서 역대 2위로 밀려났다. 김인식~김형석~최태원으로 이어진 KBO 철인의 계보 한가운데에 섰던 ‘미스터 OB'. 팬들은 여전히 그의 외모만큼이나 빛난 그의 근성을 기억한다.


 1986년 추석 전날 터진 김형석의 홈런 한 방은 여러 팀과 여러 선수의 운명을 뒤바꾼 까닭에 ‘운명의 한방’으로 회자되고 있다.


 우선, 팀으로 보자면 OB는 이 홈런으로 인해 1982년 원년 한국시리즈 이후 4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MBC는 이 홈런으로 인해 3년 만의 가을잔치 참가가 무산됐다.


 여기에 투수 개인 기록과 타이틀의 주인공들이 줄줄이 바뀌었다. 만약 김형석의 홈런이 없었다면 최동원은 전무후무한 3년 연속 20승의 대기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연속 20승에 머물면서 훗날 선동열(1989 21승~1990년 22승)이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최동원이 3년 연속 20승을 올리지 못한 것은 김형석의 한 방이 결정적이었지만, 어쩌면 그해 14패를 기록하는 동안 1점차 패배만 무려 9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타선의 도움을 못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형석이 동점 홈런을 치자 가장 기뻐했던 인물은 최일언. 이날 7.1이닝 3실점한 최일언이 그대로 패전투수가 됐다면 시즌 19승5패(승률 0.792)를 기록할 뻔했다. 승률 1위 자리를 선동열(24승6패, 승률 0.800)에게 내주고 빈손이 될 판이었지만 결국 19승4패(승률 0.826)를 유지해 승률왕에 올랐다. 가만히 앉아서 3관왕에 오를 수도 있었던 선동열은 평균자책점(0.99)과 다승(24승) 2관왕에 만족해야 했다.


 베어스는 역사적으로 '미러클(기적)' 승부를 유난히 많이 펼쳐왔다. 그래서 지금도 '미러클 두산'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각자의 기억 속에 베어스가 만들어온 기적 같은 승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을 터. 요즘 팬들은 2019년 페넌트레이스 최종전에서 박세혁의 끝내기 안타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이 '미러클'의 정점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러나 올드팬이라면 1986년 최동원을 울린 김형석의 극적인 2점홈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베어스의 '미러클 신화' 원조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은퇴 이후 홍익대 감독을 지냈고, 구리 인창고와 상무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던 김형석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러다 2017년 kt 위즈 사령탑인 김진욱 감독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1년간 퓨처스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스터 OB’ 꽃미남 김형석. 이제는 꽃중년 아저씨로 변모했다. ⓒ김형석


 과거 호리호리했던 그의 몸매는 이제 후덕해졌고, 꽃미남 같았던 외모도 꽃중년 아저씨로 변했다. 그러나 그날의 추억은 여전히 청춘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날의 손맛도 마치 금방 홈런을 때린 것마냥 짜릿한 전율로 전해온다.


 “볼카운트가 2스트라이크로 몰렸죠. 평소 최동원 선배님은 2스트라이크를 던져놓고도 볼을 빼고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제 생각으로는 무조건 승부를 해올 것 같았어요. 몸쪽 직구로 붙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더라고요.”


 김형석은 여전히 그날의 승부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장면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끄집어냈다. 앨범 속의 사진을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볼카운트와 투구의 코스까지 정확히 기억해 냈다.


 “그해 최동원 선배님한테 끝내기를 한두 번 기록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비슷하면 치자’는 생각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노리던 그 코스로 직구가 날아오더라고요. 그대로 방망이를 돌렸죠. 운 좋게 하나 제대로 얻어걸린 거죠. 타구가 오른쪽으로 날아가는데, 속으로 ‘제발 파울로 휘어지지만 마라’라고 빌었어요. 맞는 순간 페어 지역 안으로만 들어가면 홈런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저를 알아보는 팬들을 만나면 아직도 그날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렇게 기억해 주시니 고맙죠. 저 역시 그날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손바닥에 홈런 순간의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86년 9월 17일 롯데-OB 경기 기록지ⓒ한국야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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