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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4. 2023

[25] 사상 최초 '우승 결정전'을 아시나요?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2021년 10월 31일 kt 위즈와 삼성 라이온즈가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우승 결정전을 치렀다. 그해 정규시즌에서 두 팀은 최종전까지 76승9무59패로 공동 1위로 마감했다. 결국 1위 한 자리를 놓고 단판 승부인 ‘타이브레이커’를 펼쳤다. kt가 1-0 승리를 거두면서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냈다. 1989년 단일리그제가 채택된 뒤 KBO 역사상 최초의 우승 결정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KBO리그 역사에 ‘우승 결정전’은 없었을까?


 이 말을 듣고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게 있었나?”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듯하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있었던 사실이다. KBO리그 역사의 희미한 책갈피를 더듬다 보면 1986년 OB 베어스-해태 타이거즈의 3전2선승제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이 눈에 들어온다.


 [베팬알백] 25번째 주제는 1986년 해태와 OB가 펼친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 이야기다. 골수 올드팬들도 기억할까 말까 한, 그러나 실제 존재했던 34년 전의 가을 이야기. KBO리그 역사에서 최초로 기록된 ‘우승 결정전’의 역사를 탐험해 본다. 누구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언론에서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한국프로야구의 역사이자 두산 팬들이 기억해야 할 베어스 역사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1986년 후기리그 우승 헹가래 세리머니 ⓒ두산베어스


 ●희미한 그날의 기억,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어휴, 그건 나도 기억이 안 나네. 웬만한 것은 내가 다 기억을 하는데 말이야. 허허.”


 베어스의 역사라면 원년부터 컴퓨터처럼 줄줄이 꿰고 있는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1986년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 얘기를 꺼내자 "가만있자, 그런 게 있었나"라며 계면쩍게 웃는다.


 구 사무총장이 이렇게 얘기할 정도면 1986년 우승 결정전을 기억하는 이는 그야말로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우승 결정전은 사실상 순위를 가리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었던 경기였기 때문이다.


 다시 1986년으로 돌아가 보자. [베팬알백] <23편>과 <24편>에서 소개한 후기리그 최종전 김형석의 운명의 한 방과 포스트시즌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6년은 정규시즌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눠 치르는 방식은 그대로였지만, 전·후기리그 별로 1위와 2위팀에 각각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제도를 변경했다. 1985년 삼성이 전·후기리그를 모두 우승하면서 한국시리즈가 무산된 채 싱겁게 우승팀이 결정되자, 이듬해부터는 무조건 한국시리즈가 열리도록 제도를 보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전·후기리그에 걸쳐 티켓 두 장(1위와 2위 상관없음)을 쥔 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나머지 두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거행하며 ▲티켓을 가진 팀이 모두 다를 때(4개 팀일 경우)는 전기 1위-후기 2위, 후기 1위-전기 2위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제도의 모순은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2위만 차지해도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기 때문에 각 팀들은 2위 확보를 최우선 가치로 둔다는 점이었다. 1위나 2위나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 1위와 아무리 게임차가 벌어져도 2위만 두 번 차지해도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얻기 때문에 굳이 1위를 위해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OB는 9월 17일 후기리그 최종전에서 롯데 최동원에 눌려 1-3으로 뒤지던 9회말 김형석의 기적 같은 동점 2점홈런과 신경식의 3루타 후 롯데 수비진의 중계 실책으로 4-3, 끝내기 역전승을 거두고 해태와 후기리그 공동 1위에 올랐다. 그러면서 대회요강에 따라 OB와 해태가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었다.


김형석의 운명의 한 방 ⓒ두산베어스


 그러나 타이틀만 긴장감 넘치는 ‘우승 결정전’일 뿐이었다. 실상은 대회요강만 아니면 굳이 치르지 않아도 되는 의미 없는 경기였다. 어차피 해태는 후기리그 1위를 하나 2위를 하나 한국시리즈 직행이 결정돼 있었고, OB 역시 1위를 하나 2위를 하나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 5전3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그렇지만 제도는 제도. 시즌에 앞서 확정한 KBO 대회요강대로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을 소화해야만 했다.

 문제는 1986년에 건국 이후 최초로 서울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상황이라 아시안게임 대회 기간(9월 20일~10월 5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성사된 3전2선승제의 1986년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 9월 17일에 정규시즌 최종전이 열렸으니 18일간의 휴식기 끝에 10월 6일 해태의 홈구장인 광주에서 1차전이 개최됐다. 그리고 이로부터 4일 뒤인 10월 11일 대구에서 삼성과 OB의 사상 최초 플레이오프 1차전이 열리는 스케줄이 마련됐다.



  KBO 공식 기록지도 사라져 버린 우승 결정전의 역사


 1986년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을 제대로 복기하기 위해서는 당시 경기 영상이나 KBO 공식 기록지를 통해 확인해야 하지만, 현재 당시 경기를 담아낸 영상이나 기록지는 없는 상태다. 특히 KBO 공식기록지마저 사라진 점은 아쉬울 따름이다.


 우승 결정전은 정규시즌 경기도 아니고, 포스트시즌 경기도 아니다. 팀 기록도, 개인 기록도 합산되지 않는 일종의 번외경기. 당시엔 오로지 승패에 따라 순위만 가리는 의미밖에 없다고 본 모양이다.


 그렇다 보니 훗날 누구도 이 기록지를 제대로 챙겨 놓지 못한 듯하다. 안타깝게도 당시 경기를 볼카운트별로 복기할 수도 없고, 출장한 타자 한 명 한 명, 등판한 투수 한 명 한 명의 기록도 찾아낼 방법이 없다.


 다만 당시 승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활자로 남아 있는 신문 기사와 KBO가 발행한 한국프로야구 연감(Official baseball Guide 1987)뿐이다.


 다음은 1986년의 역사와 기록을 담아 펴낸 한국프로야구 연감 1987년판 124~125페이지 내용. 당시 기사체를 느낄 수 있도록 그대로 싣는다.




『각 리그 2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새로운 방식 때문에 이미 진출권을 확보한 OB와 반면 해태는 지더라도 전기리그·후기리그에서 각각 2위를 마크, 곧바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입장이어서 여유 있게 우승 결정전에 임했다.


 해태는 비록 우승 결정전의 승패에 큰 득실이 없다 하나 OB를 꺾고 우승을 거머쥐면 우승보너스가 뒤따르기 때문에 열심히 게임을 풀어나갔다.


1차전 승리투수 장호연 ⓒ두산베어스


 OB는 계형철 장호연(3회) 김진욱(5회) 박형렬(8회) 박노준(8회)이 이어 던지며 해태 강타선을 산발 3안타로 봉쇄했다.


 해태는 차동철 김대현(4회)이 계투했으나 적시에 7안타를 얻어맞아 3실점, 1-3으로 패하고 말았다(김대현은 1986년 해태에 입단한 뒤 1988년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87년 OB와 맞붙은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7이닝 3실점 승리에 이어 4차전에서 10이닝 완투승을 따냈다. 그가 아니었다면 1987년 OB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OB는 1회초 1번 이승희가 우월 2루타를 날려 게임의 뚜껑을 힘차게 열었다. 2번 김광수의 희생번트로 이승희가 3루를 밟자 2사후 신경식이 우전안타를 때려주어 선취점을 빼냈다.


 OB는 2회 들어서도 6번 유지훤, 7번 이종도의 안타 등으로 이루어진 2사 주자 1·3루에서 1번 이승희가 내야안타를 이어 주어 1점을 추가, 2-0으로 앞서나갔다.


 4회까지 1안타로 허덕이던 해태는 5회말 선두 5번 김종모가 포볼(볼넷)을 고르고 후속 땅볼로 2진하자(2루로 진출하자) 김응용 감독은 유격수 서정환을 벤치에 불러들이고 대타 전문 송일섭을 타석에 내보냈다. 송일섭은 깨끗한 중전안타를 때려주어 1점을 만회했다.


 게임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OB는 3회에 무사 주자 2루, 4회에 2사 주자 1·2루의 찬스를 잡았으나 후속타 불발로 득점으로 연결시키지 못했고 5·6·7회는 해태 김대현의 변화구를 공략 못해 3자범퇴(삼자범퇴) 당했다.


 그러나 8회초 1사후 4번 신경식이 우월 3루타를 날리고, 5번 김대진의 희생플라이가 뒷받침, 1점을 더해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1번타자로 나선 이승희는 3타수 2안타 1타점을, 4번 신경식은 4타수 2안타 1타점을 각각 마크, 승리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해태는 이순철 김봉연 송일섭이 1개씩의 안타를 때리는 데 그쳤다.』

1차전 승리의 주역 이승희 ⓒ두산베어스




 『OB는 박철순 최일언(3회) 윤석환(4회) 황태환(7회)이, 해태는 강만식 선동열(4회) 김용남(8회)이 계투, 끈질긴 투수전이 전개됐다. 두 팀 모두 에이스까지 투입하여 총력전을 편 결과 OB가 2-1로 신승, 3차전 없이 후기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해태는 1회초 기습 번트안타로 살아나가 2루를 훔친 1번 이순철이 후속 내야땅볼, 희생플라이로 홈에 살아 1점을 선취했다. 게임의 서장을 활기차게 연 해태는 그러나 2회부터 9회까지 산발 4안타에 그쳐 추가점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 OB는 해태 강만식 선동열의 피칭에 밀려 7회까지 무득점의 안타까운 행진을 거듭했다. 3회까지 던진 강만식으로부터는 1개의 안타도 뽑지 못했으며 4회부터 7회까지 마운드를 지킨 선동열에게 2안타를 빼냈으나 역시 득점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철저하게 OB 타선을 요리하던 해태는 8회에 접어들자 선동열을 불러들이고 김용남을 마운드에 내세웠다. 관중석에선 해태가 고의로 져주기로 작정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OB는 쾌재를 불렀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선두 5번 김호근이 삼진으로 물러나고 6번 김광림마저 내야땅볼로 잡혔으니 상황은 투아웃, 막바지에 다다랐다.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성미 급한 팬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OB 김성근 감독의 표정에는 체념과 절망의 빛이 역력했다.


 다음 타자는 7번 유지훤. 타순은 하위타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절망의 순간에서 유지훤은 중전안타를 때려 추격의 매듭을 풀었다.


 김성근 감독은 승부사답게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8번 이종도마저 좌전안타로 뒷받침, 1·2루를 점령하자 김 감독은 신인 이복근을 대타로 기용했다. 과감한 대타 작전이었다.


 이복근은 김용남의 제2구를 통타, 우월 3루타를 뽑아서 주자를 모두 홈에 불러들였다. 순식간에 상황은 뒤바뀌고 말았다. 멋진 역전 드라마였다.』


2차전 역전승의 시작, 유지훤 ⓒ두산베어스


 ● 결승타 주인공 이복근의 회상 모두들 좋아했던 그날


 2차전에서 대타로 나서 2타점 결승 3루타를 때린 이복근(58). 올드팬들이라면 그의 이름 석 자와 현역 시절 모습이 기억의 샘에서 어렴풋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1962년생. 충암고와 경희대를 나와 1986년 OB에 입단했던 루키 이복근은 지금 어느덧 예순의 나이가 됐다. 그만큼 세월은 흘렀고, 그만큼 OB 베어스의 역사와 팬들의 추억도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1991년을 끝으로 6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복근은 은퇴 이후 오랫동안 베어스 구단에서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매일매일 아마추어 야구가 벌어지는 현장을 누비며 미래의 보석들을 캐내면서 조용히 ‘화수분 야구’의 밑거름을 만들어 온 숨은 주인공이다. 지난해에는 퓨처스 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복근은 1986년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KBO리그 역사에서 우승 결정전 마지막 결승타 주인공으로 남아 있는 그는 그날의 상황에 대해 묻자 “하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서 “그날 결승타를 치고 나서 경기 후 감독님과 선배들, 프런트 직원 등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은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떠오른다. 승리 후 모두들 되게 좋아했다”며 웃었다.


 정규시즌 한 경기에서 결승타를 때려도 축하를 받는데, 우승 결정전이었으니 당연지사. 무엇보다 축하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우승 결정전을 3차전까지 치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 팀장 역시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며 기억을 더듬었다.


 “마운드엔 김용남 선배가 계셨던 걸로 기억해요. 우승 결정전이었지만 그렇게 전력으로 피칭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OB가 우승 결정전에서 이기나 지나 플레이오프에 가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게 크게 의미가 있었던 경기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2차전에 졌다면 1승1패로 3차전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감독님이나 선배들이 2차전 승리에 더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굉장한 환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그날 기록은 정규시즌 기록에 안 들어가더라고요. 하하.”


1994년 이복근 스카우트와 박철순 ⓒ두산베어스


 1986년 OB는 신인드래프트에서 박노준(고려대), 박형렬(서울고) 임채섭(건국대) 이복근(경희대) 등 총 10명을 1차지명했다. 이복근의 1986년 프로 첫해 기록은 5타수 2안타(타율 0.400). 장타는 없었다. 그의 말처럼 우승 결정전의 3루타 기록은 정규시즌 기록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KBO리그 역사에서 최초로 펼쳐진 페넌트레이스 우승 결정전은 당시 팬들에게도 큰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2경기 관중수는 합쳐서 3900여 명에 불과했다.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 결과에 따라 포스트시즌 스테이지가 달라지는 것도 없었기에 흥행 카드가 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포스트시즌 전초전 격으로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프로야구 관람에 목말랐던 야구팬들이 광주 무등야구장에 와서 지켜보는 이벤트 게임 성격이 짙었다.


 그럼에도 OB 베어스로선 후기리그 우승이 나쁠 것은 없었다. 1982년 전기리그 우승 이후 4년 만에 정규시즌 우승 타이틀을 따냈기 때문이다. 축하를 받고, 기뻐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일이었다. OB 베어스 팬이라면, 나아가 야구 팬이라면 상식으로 알아둘 만한 KBO리그 역사상 최초 우승 결정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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